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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슬픈, 인간의 날개‘ - 천 상병 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휠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詩人의 보람인 것을…… .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 상병 시 ‘주막에서’ [酒幕에서], 민음사,1979.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박에 못 마.. 더보기
‘보는 것’과 ‘시선’의 차이 / 조지훈 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켜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어 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 지훈 시 ‘낙화‘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풍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 조 지훈 .. 더보기
‘삶’의 변혁기, 자식에게,, 정 희성 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 더보기
‘삶의 아픔과 나눔’ - 정 호승 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 호승 시 ‘ 슬픔이 기쁨에게‘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더보기
‘생명’의 유기적 구상화 / 정 한모 시.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했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라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 더보기
‘이미지’의 ‘모더니즘’/ 정 지용 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전하지 않고 머언 港口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 지용 시 ‘ 故鄕 (고향 )‘ * [鄭芝溶全集정지용전집 1詩시 ]民音社민음사 1988.1.30 어저께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았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정 지용 시 ‘홍시’ * 『향수』, 미래사(200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 .. 더보기
’자연‘ 속의 ‘나’ - 이 형기 시.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음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년의 강물이다 - 이 형기 시 ‘나무’ * 부산시 어린이 대공원 내 ‘시가 있는 숲`(1990,10.02 세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 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 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 더보기
시를 ‘살기’위한 기원 - 이 해인 시. 1. 하늘은 구름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세월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날엔 항상 하늘이 열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2.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3. 아아 하늘, 하늘에다 나를 맡기고 싶다. 서러울때는 하늘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순하게 흑흑 느껴 울고 싶다. 4. 하늘에 노을이 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이듯 타오르는 노을. 나의 아픈 그리움도 일제히 일어서서 가슴 속..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