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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삶의 아픔과 나눔’ - 정 호승 시.

엄마 품에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 호승 시 ‘ 슬픔이 기쁨에게‘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 보다 깊은 새벽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 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습니다.


- 정 호승 시 ‘또 기다리는 편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 호승 시 ‘봄 길’
*  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2021)




마음이 떠났다
마음에도 길이 있어
마음이 구두를 신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버렸다
비가 오는데 비를 맞고
눈이 오는데 눈을 맞고
마음이 먼 길을 떠난 뒤
길마저 마음을 떠나버렸다
나는 마음이 떠나간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종로에서 만나 밥 먹을 마음도
인사동에서 만나 술 마실 마음도
기차를 타고 멀리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이 다 떠나면
꽃이 진다더니
내 마음이 살았던 당신의 집에
꽃이 지고
겨울비만 내린다


- 정 호승 시 ‘마음이 없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오늘은 면도를 더 정성껏 해드려야지
손톱도 으깨어진 발톱도 깎아드리고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물어보아야지
TV도 켜드리고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시라고
창밖에 잠깐 봄눈이 내린다고
새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다고
귀에 대고 더 큰 소리로 말해야지

울지는 말아야지
아버지가 실눈을 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시면
활짝 웃어야지
어릴 때 아버지가 내 볼을 꼬집고 웃으셨듯이
아버지의 야윈 볼을
살짝 꼬집고 웃어야지

가시다가 뒤돌아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굳이 손을 흔들지 않으셔도 된다고
가시다가 중국 음식점 앞을 지나가시더라도
짜장면을 너무 드시고 싶어하지 마시라고
아니, 짜장면 한 그릇 잡수시고 가시라고
말해야지

텅 빈 아버지의 입속에 마지막으로
귤 향기가 가득 아버지의 일생을 채우도록
귤 한 조각 넣어드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아픈 것이라고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 정 호승 시 ‘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_《여행》(창비, 2013)




너는 이제 명심해야 한다
겨울이 오는 순간
강심까지 깊게 얼어붙어야 한다
더이상 가을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과감하게
절벽에 뿌리를 내린 저 바위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너는 강물로 만든 바위이며 얼음으로 만든 길이다
그동안 너의 살얼음을 딛고 걷다가
내가 몇번이나 빠져 죽었는지 아느냐
살얼음이 어는 강은 겨울 강이 아니다
너는 쩡쩡 수사자처럼 울음을 토해내고 얼어붙어
내 어릴 적 썰매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외할머니 집에 가듯
나의 겨울 강을 건너가게 해야 한다
나는 이제 강을 건너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누가 너의 심장 위에 뜨거운 모닥불을 피워도
얼음낚시꾼들이 끈질기게 도끼질을 해도
물고기들이 오갈 수 있는 물길 하난 남겨두고
더욱 깊게 침묵처럼 얼어붙어야 한다
살얼음이 언 겨울 강에 빠져 늘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나는
내 평생의 눈물이 얼어붙은
저 겨울 강을 지금 건너가야 한다


- 정 호승 시 ‘겨울강에게‘





꽃이 저 혼자 일찍 피었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꽃이 저 먼저 져버렸다고 봄날이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저 혼자 걸어간다고 새로운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다 무너졌다고 길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비가 와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탕 길을 걷는 내 발자국마다 그래도 꽃은 피었다

오늘은 선암사 고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다가 나를 바라본다
매화 향기에 취한 새들이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나를 바라본다

작은 새의 슬프고 기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사랑한다
새의 눈빛을 지니지 못한 당신도 사랑하다가 영원히 잠이 든다


- 정 호승 시 ‘ 슬프고 기쁜‘
* 《당신을 찾아서》(창비)





내가 걸어온 길은
내가 걸어온 길가에 놓인 낡은 의자를 사랑한다
그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간 사람들을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도 엉덩이를 밀치고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걸어오면서 남긴 발자국에 고인 빗물을
빗물에 비친 푸른 하늘을
그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져간 새들을 그리워한다
앉을 때마다 늘 삐걱거리기만 했던 낡은 의자에
그래도 봄눈이 내릴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먼 데서 날아온 풀씨들이 수줍은 듯
꽃을 피울 때가 자장 기뻤다고
삶은 어느날 동백꽃 한송이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일이었다고
오늘도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해질녘 막다른 골목길
독거노인의 낡은 의자에 앚아
풀꽃을 사랑하던 귀뚜라미를 그리워한다


- 정 호승 시 ‘ 길’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
갈대 숲 속에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는 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대 울지 마라.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정호승 시 '수선화에게-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모두





물을 붓고 누룽지를 끓인다
돌아가신 어머니 냄새가 난다
김장김치 한보시기 꺼내놓는다
그리운 어머니의 눈빛이
강가의 잔물결처럼 식탁 위에 퍼진다
햇살과 구름을 한데 섞어
된장에 시금치 무치듯 무쳐놓는다
젊은 날 내 청춘의 봄비가 잠깐
울면서 앉았다 간다
평생 아껴두었던 내 심장을 꺼내
초고추장을 조금 발라 올려놓는다
내가 사랑했으나 나를 사랑하지 않은
배고픈 나의 천사여
밤새도록 나를 노려보는
창가의 붉은 새가 쪼아 먹기 전에
드세요 누룽지와 함께 내 심장을
맛있게 드세요

- 정 호승 시 ‘천사를 위한 식탁‘
_《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새들이 날아와 빙벽을 쫀다
얼어붙은 미시령 매바위 폭포위에 하루종일
부리가 없어질 때까지 얼음을 쫀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 날아와 쪼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수십 마리의 새들이 설악에서 날아와
몇날 몇칠 잠도 자지 않고
빙벽을 쫀다
부리가 없어져도 빙벽을 쫀다
오늘도 눈송이마다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하고
미시령을 넘어가는 길은 또 끊어졌다
눈더미에 파뭇힌 길들은 사람들을 내려놓고
저마다 동해로 떠나가고
나는 아침 일찍 지옥에서 돌아와 빙벽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엔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푸르르 새들이 떠난 자리에
부처님 한분
찬란하다


- 정 호승 시 ‘얼음부처’





너를 따라 사막 속으로 도망쳐버릴 걸 그랬어
모래 위에 난 너의 발자국을 쫓아 영원히 사라져버릴 걸 그랬어
서울로 돌아와도 아무도 나를 찾는 이 없는데
이별한 뒤에도 또 이별할 일만 남아 있는데
너를 따라가 맛있는 너의 먹잇감이나 되어줄 걸 그랬어
추워 떨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나에게
네가 살며시 웃으면서 다가왓을 때
나는 왜 너를 멀리 쫓아버리고 말았는지
사막의 그 먼 밤길을 오직 내가 보고 싶어 찾아온 줄도 모르고
굴속에 재워둔 귀여운 새끼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꾸 날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왜 날카로운 플래시의 불빛을 너의 얼굴에 계속 비추기만 했는지
네가 막 새벽 지평선 위로 떠오른
노란 오랜지 조각 같은 반달을 내 머리맡에 데리고 왔을 때에도
네가 사막의 별들을 모두 모래 위에 내려앉게 하고
흰 조약돌 같은 북두칠성을 내 손에 쥐여주었을 때에도
나는 왜 나를 버리고 너를 따라가지 못했는지
그리운 사막여우
네가 나 대신 물고 간 내 가난한 신발 한 짝은 잘 있는지
지금도 내 신발을 물고 힐끔힐금 뒤돌아보며
사막의 사막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지


- 정 호승 시 ‘사막여우’
[포옹], 창비, 2014.





연꽃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 정 호승 시 ‘ 연꽃 구경‘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13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
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
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
내 어릴 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처럼
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서 있고
길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다
주인 할머니가 고양이처럼 졸다가 부채를 부치다가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
라면 몇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
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좋다

- 정 호승 시 ‘골목길‘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국화 한 송이
그대 무덤 앞에 놓고 간다

양심의 꽃이 되라고
자유의 꽃이 되라고
가슴에 꽃 한 송이 품고 자라고

황톳길 따라 쓸쓸히 흩어져 간
멧새의 길을 따라

그대 무덤 앞에 놓인
나를 두고 간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혁명의 길을
도봉을 바라보며 쓸쓸히 간다


- 정 호승 시 ‘ 수유리에서‘
[새벽편지], 민음사, 2012.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또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 정 호승 시 ‘짜장면을 먹으며’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99.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 호승 시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창작과비평, 1998)





내 지금까지 결코 버리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그림자다
버릴 것을 다 버리고
그래도 가슴에 끝까지 부여안고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해질녘 순댓국집에 들러 술국을 시켜놓고
소주잔을 나누는 희망의 푸른 그림자다
희망의 그림자는 울지 않는다
아무도 함께 가지 않아도 스스로 길이 되어 걸어간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신은 인간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주지만
절망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희맘이 희망의 그림자에게 조용히 말할 때
나는 너의 손을 잡고 흐린 외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막다른 골목길을 돌아나온다


- 정 호승 시 ‘희망의 그림자’
[여행], 창비, 2013.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
혼자 있을 때마다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부석사 안양루 돌계단 옆에 핀
접시꽃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핀
코스모스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어둠의 눈물이 소금처럼 내린다
이제 당신도 웃을 때가 있기를 바란다
고요한 미소로써 우리를 바라보길 바란다
당신에게도 봄은 오는 대로 오고
꽃은 피는 대로 피고
눈은 내리는 대로 내리길 바란다


- 정 호승 시 ‘ 제비꽃을 보내며’
[여행], 창비, 2013.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
창 너머 개나리는 또 피는데
당신이 신고 가리라 믿었던 신발만 남아
오늘은 식구들과 강가에 나가
당신의 모든 신발을 태운다
당신이 돌아다닌 길을 모두 태운다
푸른 강물의 물결 위로
신발 타는 검은 연기가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날 당신 떠나던 날
당신을 만나러 조문객들이 자꾸 몰려오던 날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집힌 그들의 구두를 정리했다
이제 산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과
죽은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이 다르랴


- 정 호승 시 ‘신발정리’
[여행],창비 ,2013.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 정 호승 시 ‘지푸라기’
[여행], 창비, 2013.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정 호승 시 ‘첫눈이 오는날 만나자’




벽에박아두었던못을뺀다
벽을빠져나오면서못이구부러진다
구부러진못을그대로둔다
구부러진못을망치로억지로펴서
다시쾅쾅벽에못질하던때가있었으나
구부러진못의병들고녹슨가슴을
애써헝겊으로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쓰러진늙은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모시고가서
때밀이용침상위에눕혀놓는다
구부러진못이다아버지도
때밀이청년이벌거벗은아버지를펴려고해도
더이상펴지지않는다
아버지도한때벽에박혀녹이슬도록
모든무게를견뎌냈으나
벽을빠져나오면서그만
구부러진못이되었다.


-정호승 시 '못' 모두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정 호승 시 ‘풍경달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열림뤈, 2009




창 밖에 기대어 흰 눈을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잘할 수 있었으면
시로써 거짓말을 다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통하여 진실에 이르는
거짓말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거짓말의 시를 읽고 겨울밤에는
그 누구 홀로 울 수 있을까.

밤이 내리고 눈이 내려도
단 한 번의 참회도 사랑도 없이
얼마나 속이는 일이 즐거웠으면
품팔이하는 거짓말의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생활은 시보다 더 진실하고
시는 삶보다 더 진하다는데
밥이 될 수 없는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어떻게 살아 있기를 바라며
어떻게 한 사람의
희망이길 바랄 수 있을까.


- 정 호승 시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다산 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나와 잔을 내미실 것이다
참수당한 눈물의 술잔을 기울이실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 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 정 호승 시 ‘다산주막’
[밥값], 창비, 2010.




나의 방명록에 기록된
인간의 이름은 다 바람에 날려갔다
기역자는 기역자대로 시옷자는 시옷자대로
바람에 다 날려가
씰크로드를 헤매거나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에 파묻혔다
어떤 애증의 이름은 파묻혀 미라가 되었으나
이젠 잊어라
이름이 무슨 사랑이더냐
눈물없는 이름이 무슨 운명이더냐
겨울이 지나간 나의 방명록엔
새들이 나뭇잎을 물고 날아와 이름을 남긴다
남의 허물에서 나의 허물이 보일 때
나의 방명록엔
백목련 꽃잎들이 떨어져 눈부시다.


  - 정호승 시 '나의 방명록' 모두




온몸이 텅 빈
종이코끼리를 타고 길을 걷는다
아기부처님을 태우고 묵묵히
연등행렬을 따라가던 종이코끼리 한 마리
코가 잘려나간 채 종로 뒷골목에 버려져 있어
코 없는 종이코끼리를 타고 길을 걷는다
아직 남아 있는 살아가야 할 날들을 위하여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새들이 집을 짓듯이
폭풍우가 가장 강하게 몰아치는 날
이 순간의 너와집 한 채 지어 불을 지핀다
버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버려야 하므로
온몸이 텅 빈 흰 종이코끼리 한 마리 불태워
한줌 재를 뿌린다.


   - 정호승 시 '종이코끼리' 모두




내가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공연히 나를 힐끔 노려보고 가는 당신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가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는 당신이
산을 오를 때마다 나보다 먼저 올라가버리는 산길이
꽃을 보러 갈 때마다 피지도 않고 먼저 지는 꽃들이
전생에서부터 아이들을 낳고 한집에 살면서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의 타인인 줄 알았으나
내가 바로 당신의 타인인 줄 몰랐다
해가 지도록
내가 바로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 정호승 시 '타인' 모두




꽃과 잡초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잡초란 인간이 붙인 지극히
이기적인 이름일 뿐이다.
인간의 잣대로 해충과 익충을
구분하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이 뭐라고 하던
제비꽃은 장미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정 호승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단정히
증명사진을 찍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서
증명사진에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 정호승 시 '증명사진' 모두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 정 호승 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 밥값/창비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져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 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 정 호승 시 ‘짐‘
* 밥값 / 창비





사람은 꽃을 꺾어도
꽃은 사람을 꺾지 않는다
사람은 꽃을 버려도
꽃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영정 속으로 사람이 기어들어가
울고 있어도
꽃은 손수건을 꺼내
밤새도록
장례식장 영정의 눈물을 닦아준다


- 정 호승 ‘꽃’
밥값 / 창비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 정 호승 ‘충분한 불행’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 가족 네 식구가
바닷게들과 가난하게 살았던
초가 문간방
솥단지 하나 달랑 입구에 놓여 있는
1.4평짜리 방 한칸
그 좁은 방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라산이 방 안에 저 혼자 앉아
어깨에 쌓인 흰 눈을
털고 있었다


- 정 호승 ‘이중섭의 방’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거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 정 호승 ‘뒷 모습’




폭설이 내린 날
칼 한 자루를 들고
화엄사 대웅전으로 들어가
나를 찾는다
어릴 때 내가 만든 눈사람처럼
부처님이 졸다가 빙긋이 웃으신다
나는 결국 칼을 내려놓고 운다
칼이 썩을 때까지
칼의 뿌리까지 썩을 때까지
썩은 칼의 뿌리에
흰 눈이 덮일 때까지
엎드려 운다


- 정 호승 시 ‘폭설’
* 밥값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
돌멩이도 촛불이 되는 곳
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홀연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돌아왔다가 고용히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죽은 꽃의 시체가 열매 맺는 곳
죽은 꽃의 향기가 가장 멀리 향기로운 곳


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었으나
하얀 눈길을 낙타 타고 오는 사나이
명동성당이 된 그 사나이를 따라
나 살기 전에 먼저 살았으나


어머니를 잃은 어머니가 찾아오는 곳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가 찾아와 무릎 꿇는 곳
종을 잃은 종소리가 영원히
울려퍼지는 곳


- 정 호승 시 ‘명동성당’
* 밦갑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 정 호승 ‘왼쪽에 대한 편견‘
* 밥값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플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 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 비에 젓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닥에
기대어 울고 있다.

술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 밥 한그릇 얻어 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숲으로 걸어 간다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걷옷만 찟으며 우는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데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 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귀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젓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랑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 하고 싶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 하는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 하는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 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는
더욱 불행 하다.



     - 정호승시 '서울예수'전문





나의 눈물에는 왜 독이 들어 있는가
봄이 오면 봄비가 고여있고
겨울이 오면 눈 녹은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줄 알았더니
왜 나의 눈물에는 푸른 독이 들어 있는가
마음에 품는 것마다
다 독이 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사랑이여
나는 이제 나의 눈물에 독이 없기를 바란다
더이상 나의 눈물이
당신의 눈물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독극물이 든 검은 가방을 들고
가로등 불빛에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더이상 당신 집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만 가던 독을 버리는 일
버리고 나서 또 버리는 일
눈물을 흘리며
해독의 시간을 맞이하는 일


- 정 호승 시 ‘사랑에게‘
*이 짧은 시간 동안 / 창비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 정 호승 시 ‘벽’




사람들이 잠든 새벽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품은 칼을 꺼내어 눈에 대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다시 칼을 품으며 울었습니다
용기 잃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추억을 흔들며 울었습니다.

눈사람이 흘린 눈물을 보았습니까?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
인간의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그친 눈을 맞으며 사람들을 찾아가다
가장 먼저 일어난 새벽 어느 인간에게
강간당한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사람들이 오가는 눈부신 아침거리
웬일인지 눈사람 하나 쓰러져 있습니다
햇살에 드러난 눈사람의 칼을
사람들은 모두 다 피해서 가고
새벽 별빛 찾아나선 어느 한 소년만이
칼을 집어 품에 넣고 걸어 갑니다
어디선가 눈사람의 봄은 오는데
쓰러진 눈사람의 길을 떠납니다.


  - 정 호승 시 ‘눈사람' 모두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온 나무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속에 숨겨 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무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길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툭툭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 정 호승 시 ‘부드러운 칼' 모두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루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끓고
서랖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 정호승 시 '산산조각' 모두




여든일곱 생신을 맞아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 본부건물 발코니에 나와
몰려든 축하객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답례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웃는 사진이
동아일보 일면 머릿기사로 나왔다
나는 아침밥을 먹다가 그 사진을
몇번이나 들여다 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그 웃음이
합죽한 입가에 번진 수줍은 그 미소가
아흔에 돌아가신 내 경주할머니의 미소 같아서
평생을 첨성대 앞 채마밭에서 김을 매시던
반월성 들판에서 쑥을 캐시던
외할머니의 맑은 미소 같아서
그 사진 정성스럽게 오려놓았다
시를 쓰는 내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상처 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은 어느 계절이나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정호승 시 '마더 테레사 수녀의 미소'모두



돈을 벌어야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돈이 있어야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죽지 않고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이제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꽃을 빨래하는 일이다
꽃에 묻은 돈의 때를 정성 들여 비누칠해서 벗기고
무명옷처럼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꽃을 다림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돈을 태우는 일이다
돈의 잿가루를 밭에 뿌려서 꽃이 돈으로 피어나는 시대에
다시 연꽃 같은 맑은 꽃을 피우는 일이다



-정호승시 '꽃과 돈'전문





겨울 새들에게 주려고
호주머니에 늘 생보리를 넣고 다니시던
새싹들이 밟혀 죽는다고
제발 좀 살살 걸어다니라고 야단을 치시던
돈은 나무가 아니므로
더이상 물을 주지 말라고 하시던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고
술만 취하시면 나무를 보고 꾸벅 절을 하시던
내 얼굴에 침을 뱉은 나를
그래도 용서해 주시던
아버지를 찾아서
나는 오늘도 지하철을 탄다
승강장 입구 쪽으로 한 사내가 바삐 걸어간다
아버지인가 싶어 얼른 다가가 본다
아버지가 아니다
술집을 나와 한 사나이가 비틀걸음으로
골목 모퉁이를 돌아선다
아버지인가 싶어 얼른 따라가 본다
아버지가 아니다


   -정호승시 '아버지를 찾아서'전문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밤에
불행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하다
사랑을 잃고 서울에 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끝없이 흔들리면
말없이 사람들은 불빛 따라 흔들린다


흔들리며 떠도는 서울밤의 사람들아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까웁고
기다림은 언제나 꿈속에서 오는데
어둠의 꿈을 안고 제각기 돌아가는
서울밤에 눈 내리는 사람들아


흔들리며 서울은 어디로 가는가
내 사랑 어두운 나의 사랑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로 가는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이 밤
서서 잠이 든 채로 당신 그리워


  - 정호승 시 '밤 지하철을 타고' 모두





나 아기로 태어나 엄마 손을 처음 잡았을때
나의 손은 빈손 이었으나
내가 아버지가 되어 아가 손을 처음 잡았을때도
나의 손은 따스한 빈손이었으나

예수의 손도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기 전에
목수로 일하면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는 빈손 이였으나

지금 나의 손은
그 누구의 손도 다정히 잡아주지 못하고
첫서리가 내린 가을 들판의 볏단처럼
고요히 머리 숙여 기도하지 못하고
얼음처럼 차고 산처럼 무겁다

나 아기로 태어나
처음 엄마 손을 잡았을때는 빈손이었으나
내 손을 잡아준 엄마도 결국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나셨으나

-정호승시 '빈손'전문




너는 이제 더이상 시 쓰지 마라
그저 차나 한잔 마셔라
배고파도 더이상 밥 먹지 말고
보고 싶어도 더이상 찾아가지 마라
사랑이란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더이상 남길 것은 없다
나는 그저 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좀 있다가 목이 마르면
그저 물이나 한잔 마시다가
너도 너 혼자 어디로 가라

- 정 호승 시 ‘ 미리 읽어본 아버지의 유서‘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 정호승 시 ‘정동진’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시 '미안하다'모두




죽은 아기를 업고
전철을 타고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한 마리 들짐승이 되어 갈 곳 없이
논둑마다 쏘다니며
마른 풀을 뜯어모아
죽은 아기 위에
불을 놓았다

겨울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붉은 산에 해는 걸려 넘어가지 않고
멀리서 동네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떠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왜
무우시래기국 같은 아버지에게
총을 쏘았을까
혁명이란 강이나 풀,
봄눈 내리는 들판 같은 것이었을까

죽은 아기 위에 타오르는
마른 풀을 바라보며
내 가랭이처럼 벗고 드러누운
들길을 걸었다
전철이 지나간 자리에
피다 만 개망초꽃

- 정 호승 시 ‘개망초 꽃’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 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길을 홀로 걸었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 정 호승 시 ‘슬픔을 위하여’





선운사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서울역은 붉은 벽돌 하나 베고 지친 듯 잠이 든다
나는 프란체스꼬의 집에 가서 콩나물 비빔밥을 얻어먹고 돌아와
잠든 서울역에 라면박스를 깔고 몸을 누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먹다 남은 소주를 병나발을 불고 나자 찬비가 내린다
동백꽃잎 하나가 빗물을 따라 플랫폼 쪽으로 흐른다
보고 싶은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게 되는지
한 미친 여자가 찬비에 떨다가 내게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옷을 벗기자 여자의 젖무덤에서도 동백꽃 냄새가 난다
낡은 볼펜으로 이혼신고서를 쓰던 때가 언제이던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그대 옆에 남아 무덤이 되고 싶던 날들은 가고
다시 병나발을 불자 비안개가 몰려온다
안개 속에서 포크레인이 서울역을 끌고 어디로 간다
동백꽃 그림자가 눈에 밟힌다


- 정 호승 시 ‘흐르은 서울역‘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정 호승 ‘가난한 사람에게’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눈 내리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누군가 걸어간 길은 있어도
발자국이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끝내는 작은 발자국을 이룬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본다
부도 위에 쌓인 함박눈을 부르듯
함박눈! 하고 불러보고
부도 위에 앉은 작은 새를 부르듯
작은 새! 하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 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보인다 저 작은 새들이 눈발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신나게 춤추는 게 보인다
슬며시 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의 맑은 미소가 보인다


- 정 호승 시 ‘부도 밭을 지나며‘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정 호승 ‘술 한잔’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 정 호승 ‘가를편지‘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 정호승 ‘바닥에 대하여’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는 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대 울지 마라...


- 정 호승 ‘외로우니 사람이다’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정 호승 ‘결혼에 대해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정 호승 ‘사랑한다’





당신도 속초 바닷가를 혼자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지 않고
노천 횟집 지붕 위를 맴도는 갈매기들과 하염없이 놀다가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
벽에 옷을 걸어놓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잠은 이루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놓고
우두커니 벽에 걸어놓은 옷을 한없이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무인등대의 연분홍 불빛이 되어
한번쯤 오징어잡이배를 뜨겁게 껴안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먼동이 트고
설악이 걸어와 똑똑 여관의 창을 두드릴 때
당신도 설악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같이 묵묵히 등을 쓸어주는
설악의 말 없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바다가 보이는 여관방에 누더기 한 벌 걸어놓은 일이라고
누더기도 입으면 따뜻하다고


- 정 호승 시 ‘누더기‘
*<시와시학.2005.여름호>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잇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정 호승 ‘밥그릇’
시집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 정 호승 시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 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 정 호승 ‘무릎’
* 이 짧은 시간 동안 / 창작과비평사, 2004




내가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다 기어이 보고 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수평선으로 난 오솔길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난 해당화
그 붉은 꽃잎들의 눈물이었다

- 정 호승 ‘첫키스에 대하여‘



** 정호승: 시인, 1950년 1월 3일, 경남 하동군. 73세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9. 제3회 소월시문학상
2000. 제12회 정지용문학상
2001. 제11회 편운문학상
2005. 제9회 가톨릭문학상
2008. 제23회 상화시인상
2011. 제19회 공초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