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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자유로운 영혼’ - 백석 시. 나는 北關(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如來(여래) 같은 상을 하고 關公(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莫逆之間(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백석 시‘고향‘모두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같이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 더보기
’천(天)·지(地)·인(人)‘/박 재삼 시 우리 마음을 비추는 한낮은 뒷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 어린 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뻐 그려낼 수 있는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가 우네. - 박재삼 시 ‘매미 울음에’모두 * 1962년 시집 (신구문화사)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 더보기
바다로 간 ‘목마’ - 박인환 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모두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떠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小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더보기
생활속의 나 / 박목월 시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시 ‘가정‘모두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더보기
’蘭 과 石‘ /박 두진 시인.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 박 두진시 ‘하늘’모두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웃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꿔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시 ‘꽃’모두 산새도 날라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 더보기
‘날아오른 새’ / 박남수 시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시 ‘새’모두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 더보기
’ 거울 속, 나‘ / 도 종환 시.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 더보기
여인의 슬픈 ‘목’ / 노천명 시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冠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 본다. - 노천명 시 ‘사슴' 모두 대자 한치 오푼 키에 두치가 모자라는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를 어려워 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 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자고 괴로와하는 성미는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