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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보는 것’과 ‘시선’의 차이 / 조지훈 시.

본 것과 보이는 것, 그 미세함.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켜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어 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 지훈 시 ‘낙화‘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풍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 조 지훈 시 ‘ 풀잎 단장 (斷章)‘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랑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 조 지훈 시 ‘사모’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 지훈 시 ‘승무‘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 조 지훈 시 ‘행복론 (幸福論)‘



女人
조지훈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고풍의상 ( 古風衣裳 )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주 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샅샅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이다.



기다림
조지훈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 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 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울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산상(山上)의 노래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차운데

볕받은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움직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꿈 이야기
조지훈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민들레 꽃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 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 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병(病)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빛을 찾아가는 길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 조지훈: 한양 조씨,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1968년 5월 17일(향년 47세), 혜화전문학교(졸업),금관문화훈장. 청록파 시인, 대학 교수, 한국학자.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민권 수호 국민 총연맹,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김수영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적이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그를 디스했던 김수영 시인도 한달 뒤인 6월 16일, 46세의 나이로 교통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1982년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Ps)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 지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