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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이미지’의 ‘모더니즘’/ 정 지용 시.

짙게,, 푸르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전하지 않고
머언 港口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 지용 시 ‘ 故鄕 (고향 )‘
* [鄭芝溶全集정지용전집 1詩시 ]民音社민음사 1988.1.30




어저께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았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정 지용 시 ‘홍시’
* 『향수』, 미래사(200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 정 지용 ‘호수’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産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뻐 스스로 한가로워 ㅡ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ㅡ
나 ㅡ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 정 지용 시 ‘그의 반‘
* 동아일보 현대시 100년 사랑의 시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엄고란(嚴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살어 일어섰다.

     3
백화(白樺)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아니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 솔소리, 물푸레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기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석용(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새기며 취하며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산맥 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한나잘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정 지용 시 ‘백록담(白鹿潭)‘
* 정지용시전집, 민음사.




소개터
눈 위에도
춥지 않은 바람

클라리오넬이 울고
북이 울고
천막이 후두둑거리고
기(旗)가 날고
야릇이도 설고 흥청스러운 밤

말이 달리다
불테를 뚫고 넘고
말 위에
기집아이 뒤집고

물개
나팔 불고

그네 뛰는 게 아니라
까아만 공중 눈부신 땅재주!

감람(甘藍) 포기처럼 싱싱한
기집아이의 다리를 보았다

역기 선수 팔장낀 채
외발 자건차 타고

탈의실에서 애기가 울었다
초록 리본 단발머리 째리*가 드나들었다

원숭이
담배에 성냥을 켜고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나는 사십 년 전 처량한 아이가 되어

내 열 살보담
어른인
열여섯 살 난 딸 옆에 섰다
열 길 솟대가 기집아이 발바닥 위에 돈다
솟대 꼭두에 사내아이가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선 아이 발 위에 접시가 돈다
솟대가 주춤한다
접시가 뛴다 아슬아슬

클라리오넷이 울고
북이 울고

가죽 잠바 입은 단장이
이욧! 이욧! 격려한다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위태천만 나의 마흔아홉 해가
접시 따라 돈다 나는 박수한다.

- 정 지용 시 ‘ 곡마단‘
*째리=짜리. 십원짜리, 열 살 짜리의 짜리




저녁해ㅅ살
불 피여으르듯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곺아라.

수저븐 듯 노힌 유리 컾
바쟉 바쟉 씹는대도 배곺으리.

네 눈은 高慢(고만)스런 黑(흑)단초.
네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점.

빨아도 빨아도 배곺으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 해ㅅ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곺아라.


- 정 지용 시 ‘ 저녁해ㅅ살‘
[詩文學(시문학)] 2호, 1930. 5
+정지용전집 1, 민음사. 1988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러
포도(葡萄)순이 기여 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물음 당에 시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 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 쉬노니, 박나비 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다신교도(多神敎徒)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벌들이 참벌 날으듯 하여라.

- 정 지용 시 ‘ 발열(發熱)‘
*  [정지용 전집 1]




창을 열고 눕다.
창을 열어야 하늘이 들어오기에.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다.
일식이 개이고 난 날 밤 별이 더욱 푸르다.

별을 잔치하는 밤
흰 옷과 흰 자리로 단속하다.

세상에 아내와 사랑이란
별에 치면 지저분한 보금자리.

돌아누워 별에서 별까지
해도(海圖) 없이 항해하다.

별도 포기 포기 솟았기에
그중 하나는 더 훡지고

하나는 갓낳은 양
여릿 여릿 빛나고

하나는 발열하여
붉고 떨고

바람엔 별도 쓸리다
회회 돌아 살어나는 촉(燭)불!

찬물에 씻기어
사금(砂金)을 흘리는 은하!

마스트 알로 섬들이 항시 달려왔었고
별들은 우리 눈섭 기슭에 아스름 항구가 그립다.

대웅성좌가
기웃이 도는데!

청려(淸麗)한 하늘의 비극에
우리는 숨소리까지 삼가다.

이유는 저 세상에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저마다 눈감기 싫은 밤이 있다.

잠재기 노래 없이도
잠이 들다.


- 정 지용 시 ‘ 별‘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깟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정 지용 시 ‘비’




어찌할 수 다시 어찌할 수 없는
길이 <로마>에 아니라도
똑바른 길에 통하였구나.
시도 이에 따라
거칠게 우들우들 아름답지 않아도 그럴 수 밖에 없이
거짓말 못하여 덤비지 못하여 어찌하랴
                                      
- 정 지용 산문 ‘무제’
* 산문 1941.1  민음사




장미薔薇꽃 처럼 곱게 피여 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때 밤은 마른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석류石榴열매를 쪼기여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透明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달 ,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銀실, 은銀실,

아아 석류石榴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新羅 천년千年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 정 지용 시 ‘석류’
  * 지용詩選/을유문화사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 지용 시 ‘ 향수‘
* 지용詩選/을유문화사




老主人의 腸壁에
無時로 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돋아 파릇 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風雪소리에 잠착하다.

山中에 冊曆도 없이
三冬이 하이얗다.


- 정 지용 시 ‘忍冬茶‘




바독 돌 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

그러나 나는
푸른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바독돌은
바다로 각구로 떠러지는것이
퍽은 신기 한가 보아.

당신 도 인제는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귀를 들어 팽개를 치십시요.

나 라는 나도
바다로 각구로 떠러지는 것이,
퍽 시원 해요.

바독 돌의 마음과
이 내 심사는
아아무도 모르라지요.


- 정 지용 시 ‘바다 5‘
* [정지용전집 1]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우름 바다를 안으올때
포도(葡萄)빛 밤이 밀려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은회색(銀灰色) 거인(巨人)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창(窓)밖에는 참새떼 눈초리 무거웁고
창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때,
은(銀)고리 같은 새벽달
붓그럼성 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외로운 조름, 풍랑(風浪)에 어리울때
앞 포구(浦口)에는 궃은비 자욱히 둘리고
행선(行船)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 정 지용 시 ‘ 풍랑몽(風浪夢) 1‘
* [정지용전집 1]




우리 나라 여인들 은 오월달 이로다. 기쁨 이로다.
여인들은 꽃 속 에서 나오 도다. 짚단 속 에서 나오 도다.
수풀 에서, 물 에서, 뛰어 나오 도다.
여인들 은 산과실 처럼 붉도다.
바다 에서 주운 바독돌 향기 로다.
난류 처럼 따뜻 하도다.
여인들 은 양 에게 푸른 풀 을 먹이는 도다.
소 에게 시냇물을 마시우는 도다.
오리 알, 흰 알 을, 기르는 도다.
여인들 은 원앙새 수 를 놓도다.
여인들 은 맨발 벗기를 좋아 하도다. 부끄러워 하도다.
여인들 은 어머니 머리 를 가르는 도다.
아버지 수염 을 자랑 하는 도다. 놀려대는 도다.
여인들 은 生栗 도, 호도 도, 딸기 도, 감자 도, 잘 먹는 도다.
여인들 은 팔구비 가 둥글 도다. 이마가 희 도다.
머리 는 봄풀 이로다. 어깨는 보름달 이로다.


- 정 지용 시 ‘우리나라 여인들은‘
조선지광 78호 (1928.5)




바다는 뿔뿔이
달어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해도(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옴으라들고 …… 펴고 …….


- 정 지용 시 ‘바다 9’




내어다 보니
아조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잣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히 가
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안에 든 金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小蒸氣船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窓.
透明투명한 보라ㅅ빛 누뤼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熱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戀情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마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音響음향-
머언 꽃!
都會도회에는 고흔 火災화재가 오른다.


- 정 지용 시 ‘유리창 2’
* [정지용전집 1]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 정지용 ‘별똥’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瀑布 소리 하잔히
봄우뢰를 울다.

날가지 겹겹히
모란꽃닙 포기이는듯.

자위 돌아 사폿 질ㅅ듯
위태로히 솟은 봉오리들.

골이 속 속 접히어 들어
이내(晴嵐)가 새포롬 서그러거리는 숫도림.

꽃가루 묻힌양 날러올라
나래 떠는 해.

보라빛 해ㅅ살이
幅지어 빗겨 걸치이매,

기슭에 藥草들의
소란한 呼吸 !

들새도 날러들지 않고
神秘가 한끗 저자 선 한낮.

물도 젖여지지 않어
흰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또리도
흠식 한양

옴짓
아니 긘다.


- 정 지용 시 ‘玉流洞‘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런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옹승서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가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피기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정 지용 시 ‘춘설(春雪)‘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우 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맞어 쩌르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 정 지용 시 ‘ 산너머 저쪽’




불 피어오르듯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

수저븐 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네 눈은 고만스런 혹 단초
네 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점.

빨어도 빨어도 배고프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 햇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고파라.


- 정 지용 시 ‘저녁 햇살’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시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늘기는 불빛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 *


“오오 페롯(鸚鵡)서방! 굿이브닝!”
“굿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모 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정지용 시 ‘카페 프랑스‘
<1926년, 학조>
* 황해문화, 2000년 여름호, p.156.




당신은 내 맘에 꼭 맞는 이.
잘난 남보다 조그만치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사람처럼 사람좋게 웃어좀 보시요.
이리좀 돌고 저리좀 돌아 보시요.
코 쥐고 뺑뺑이 치다 절 한 번만 합쇼.

호. 호. 호. 호. 내 맘에 꼭 맞는 이.

큰 말 타신 당신이
쌍무지개 홍예문 틀어세운 벌로
내달리시면

나는 산날맹이 잔디밭에 앉어
기(口令)를 부르지요.

「앞으로 - 가. 요.」
「뒤로 - 가. 요.」

키는 후리후리. 어깨는 산ㅅ고개 같아요.
호. 호. 호. 호. 내 맘에 맞는 이.


- 정 지용 시 ‘ 내 맘에 맞는 이‘
《조선지광》64호, 1927.2



** 정지용(鄭芝溶): 1902.6~950.9.25(향년 48세),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

청록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2]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정지용은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수>, <유리창> 등이 있다. <향수>의 경우 가곡으로도 나왔기 때문에 이쪽으로 알 사람도 꽤 될듯. 가곡 <향수>의 인트로는 90년대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릿고개시대를 소재로 한 코너의 삽입음으로도 쓰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전까지는 친북인사로 규정되는 바람에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부 시절까지는 정지용 시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공인의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되어서 그의 시작(詩作) 대부분이 모두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서점 및 출판계에서도 정지용 시인에 대한 시집을 출간할 수 없었고 당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을 출간할 경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출판계 어느 곳도 정지용 시인의 시집에 대한 출간이나 출판을 꺼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득이 이를 출간해도 통일원(현재의 대한민국 통일부) 및 통일원 장관의 특별 허가가 내려져야 출간이 가능하겠지만 시기가 그런지라 이 역시 쉽지 않았다. 본래 출판 관련은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소관이지만 정지용 시인의 시집들은 당시 기준으로 정부 공인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또한 친북 인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시 통일원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출간이 가능하였다.

다만 단순 열람이나 상업 판매보다는 대부분 학술 및 연구 목적으로만 허가가 가능하였다. 납북으로 인정되어 해금된 1988년부터는 이같은 절차가 폐지되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고유 소관하에 정지용 시인의 시집의 출간이 허가되었다.

1988년에 정지용 시인 시작들이 금서목록에서 해금되면서 이 때부터 출판계에서 본격적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이 뒤늦게 출간되었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 중에는 늘 정X용으로 표현되던 정지용의 시가 수능 시험 등에 출제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정지용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 지정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 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로도 알려져 있다.

출생지인 옥천군에서는 정지용 시인을 기념하는 지용제가 매년 개최하고 지용제 중에 지용문학상도 진행된다. 생가도 있는데, 가보면 동명이인 정지용의 싸인을 많이 볼 수 있다. 옥천역에 그의 시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