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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깃발, 삶의 ‘생동감’ / 유 치환 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보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더보기
‘지성 이라는 향기‘ - 오규원 시. 1 가을. 하고도가을어느날. 길을가다가자리를잘못잡아지상(地上)에서반짝이는별,그런별몇개로반짝이는황국(黃菊)이나야국(野菊)을만나면가을동안가을이게두었다가그다음국(菊)을다시별로불러별이되게하고몇개는내주머니에늘넣고다니리라. 내주머니가작기는하지만그곳도우주이니별이뜰자리야있습지요.딴은주머니가낡아서몇군데구멍이있는데혹지나다니는길에무슨모양을하고떨어져있거든눈꼽이며그곳이나비누로좀닦아서어디든두고안부나그렇게만전해주시기를. 2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시인도시(詩)먹지않고밥먹고살아요 시인도시(詩)입지않고옷입고살아요 시인도돈벌기위해일도하고출근도하고돈없으면라면먹어요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오해하고싶으면제발오해해줘요 시인도밥만먹고는못살아요 시인도마누라만으로는못살아요 구경만하고는만족못해요 그러니까시인도무슨짓을해야지요 무슨짓을하긴하는.. 더보기
‘동화와 시’ - 안도현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안도현 시‘우리가 눈발이라면‘ 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에 쓸리우며 우리 연을 띄우자. 아직은 설푸른 슬기로 웃음 함께 모두어 뉘우침이 자욱한 새벽 끝에 서면 참 눈살 시린 하늘이 겨울에도 가슴으로 고여들고 예감은 밤나무 얼레로 풀려 가는데 훠어이 훠이 밀물처럼 밀려 오르는데 한결같이 바람 소리 높은 곳 저 아름다운 꽃잎 흩날리는 햇살은 누구에게 보내는 영원의 노래인가. 四季가 피었다 이우는 왼쪽 하늘에는 방패연 조개연 오색치마연 아.. 더보기
‘찔레꽃 향기‘ - 신석정 시.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 더보기
존재와 ’본질‘ - 신동집 시.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신동집 시 ‘오렌지’모두 마지막으로 .. 더보기
‘자유’와 평화 - 신동엽 시. * 네잎클로버는 ‘행운’이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행운을 찾느라 지천에 널린 행복을 잊어버리고 산데.., 아담한 산들 드믓 드믓 맥을 끊지 않고 오간 서해안 들녘에 봄이 온다는 것 것은 생각만 해도, 그대로 가슴 울렁여 오는 일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또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을 맞아 오고 겨울이 풀리면 다시 또 봄,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고웁게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딀 때 걷워딀 듯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 짤랑 꽃가마나 타 보고 환갑 잔치엔 아들딸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평생 살다가 조용히 묻혀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또, 가욋말일찌나, 그러한 세월 복 많은 가인(歌人)이 있어 봉접풍월(蜂蝶風月)을 노래하고 장미에 .. 더보기
‘시’를 노래하라 - 신경림 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 결 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별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결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시 ‘파장(罷場)’모두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 더보기
서글픈 ‘뒷 모습‘ - 서정주 시.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 서정주 시 ‘춘향유문-춘향의 말3‘모두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었읍니다 번쩍이는 비눌을 단 고기들이 헤염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저 날르는 애기 구름 같었읍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때 나는 미친 회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