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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부처와 보살’ 사이에서 - 공광규 시.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 공광규 시 '아름다운 회항' 모두 바위와 바위가 기댄 암문을 거쳐야 암자에 오를 수 있다 암문은 좁고 좁아서 몸집이 크거나 짐이 많은 사람은 통과 할 수가 없다 꼿꼿한 허리도 굽혀야 하고 머리를 푹 수그려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무릎걸음도 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게 올라가도 바위가 막아서고 사철나무가 막아서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야 한다 대웅전에서 해우소 가는 길도 그렇고 상관음전과 하관음전 가는 길도 그렇고 산.. 더보기
돌아 앉자서 눈물 흘리는 나’ - 황 지우 시. 삶이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사고 그러니, 저지르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택시 주차장으로 가면 국민학교 교사처럼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핸드 마이크로, 종말이 가까웠으니 우리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쳐대지 않던가 사람들은 거지를 피해가듯 구원을 피해가고 그는 아마도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혼자서 절박해져가지고 저렇게 나와서 왈왈대면 저렇게, 거지가 되지 - 황지우 시 '또 다른 소식' 모두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더보기
지식인의 삶과 사랑 - 황 동규 시. 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며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이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엇엔가 빨리듯 하늘 뒤로 넘어간다. 옆.. 더보기
‘혼자 서서 부르는 노래’ - 한 하운 시.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한 하운 시 ‘보리피리’ 잘못 살아온 서른 살짜리 부끄러운 내 나이를 이제 고쳐 세어본들 무엇하리오만. 이 밤에 정녕 잠들 수 없는 것은 입술을 깨물며 피를 뱉으며 무슨 벌이라도 받고 싶어지는 것은 역겨움에 낭비한 젊음도, 애탐에 지쳐버린 사랑도, 서서 우는 문둥이도 아니올시다. 별을 닮은 네 눈이 위태롭다고 어머니의 편지마다 한때는 꾸중을 받아야 했습니다 차라리 갈수록 가도 가도 부끄러운 얼굴일진댄 한밤중 이 어둠 속에 뉘우침을 묻어버리고 여기 예대로.. 더보기
정갈하게 ‘수놓는 시’ - 허 영자 시. 나는 많이 가진 것 없기에 버릴 것도 없습니다 버릴 것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남이 버린 것도 주워서 알뜰히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아주 떠날 때에도 버리지 않고 두고 떠날 것입니다 부끄러운 살림 몇 점 두고 떠날 것입니다. - 허 영자 시 ‘ 소유所有‘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허 영자 시 ‘ 완행열차’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미래문화사, 1995.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 더보기
‘당신의 침묵.., 그리고, 나’ - 만해, 한용운 시.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한 용운 시 ‘나룻배와 행인’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더보기
너는 ’꽃‘ - 최 두석 시.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최 두석 시 ‘성에꽃’ 모두 요즘에는 별미의 나물이지만 예전에는 섬사람들 목숨을 잇게 해서 명이라 부른다는 울릉도 산마늘잎 .. 더보기
‘존재’와 ‘투명’ 사이에서 - 천 양희 시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하는 한계령 바람 소리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천 양희 시 ‘한계’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 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