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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생명’의 유기적 구상화 / 정 한모 시.

그리움엔 거리가 없다.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했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라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 정 한모 시 ‘가을에’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잘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 정 한모 시 ‘나비의 여행’- 아가의 방5.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하는 엑셀러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막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에 실려
일러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마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들을 씻어 내어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나기 이전의 생명이 되어
혼돈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의 벽에
섬광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 정 한모 시 ‘새벽 1’



지붕 위에서는 철마다 꽃이 핀다
달빛 젖은 박꽃
익는 가을은 한 아름 空虛(공허)

四月은 거리에도 개나리 진달래
차마다 지붕마다 불꽃 高喊(고함) 소리
피묻은 內衣깃발 茂盛(무성)한 숲

여름은 해바라기
江心을 흘러가는 초가지붕 용마루에서
돌아가는 노란 하늘을 받쳐들고
天惠(천혜)를 嘔歌(구가)하는 한 그루 해바라기
叫喚(규환)는 입이여 絶望(절망)의 구멍이여

아니면 雪中梅(설중매)
새벽을 달리는 避難列車(피난열차) 지붕 위
송이송이 머리 위 하얗게 눈에 덮인 寂寥(적요)한 꽃무덤

한 짐 飢餓(기아)의 보따리 이고 지고
산을 덮은 버섯지붕 萬國旗(만국기)
夕陽에 눈이 부신 百日紅 꽃밭

아직은 記憶의 額(액)틀에 들어가지 않는
이 生生한 眺望(조망)이여 屋上花園이여.


- 정 한모 시 ‘屋上花園(옥상화원)‘



(1〕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장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한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가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얹힌다

〔2〕
바람은 산 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시시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하나의방향과 하나의 의지만을 생각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에선 갈대잎 소리로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진 벽을 지나 허물어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며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 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평지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여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 나는그런 바람속에서 만 너는 있어라.


- 정 한모 시 ‘바람 속에서‘



너는 다른데를 보고 있다.
웃고 달음박질 치는 이웃들 어깨 뒤로
지긋이 눈을 감고 그냥 걷고 있다.
누가 건드려도 돌아보지 않는 너는
다만 보고 있다.
담 모퉁이 햇볕 바른 땅바닥에
되는 대로 몇몇이 둘러 앉은
심심해서 풀이 죽은 아이들을 보고 있다.
쓰레기통에 팽개친 깡통을 보고 있다.
三月이 가면 四月이 올 골목 안의
집마다 잠긴 大門을 지켜보고 있다.
무슨 소리가 새어나온가를 듣고 있다.
귀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다.
들끓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쭈구러진 팽개친 깡통을 보고 있다.
남몰래 혼자 절뚝이고 걷고 있다.
오래도록 서서 그냥 보고만 있다.


- 정 한모 시 ‘목소리’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 정 한모 시 ‘어머니’



지금
아가는
먼 피리 소리를 듣고 있다

영원과 같은
그렇게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아가는 듣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푸르름도
흐르다 여기에 머무르고

어항의 금붕어
노란 꽃병
운명처럼 기울어진
슬픈 얼굴

모두 다
그대로 고운 것처럼 지니고

먼 피리 소리같은
맑음만이 엉기는
정한 우물

무서움에 부릅뜨는 눈을
아가는 모른다

저주스런 손가락은
멀리 가져가라

너였을 적의
꿈의 어느 골짜기
들국화 그늘 아래
두고 온
우물

지금껏 아득히 잊었었던
이 우물 위에서

나의 웃음은 서글프고
담겨진 얼굴은 구겨지기만 하는데

아가는
지금
맑게 서리는
먼 피리 소리만을
두 눈 모아
듣고 있는 것이다.


- 정 한모 시 ‘눈동자‘




보리밭 너머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고향의 뜰악에서
오늘은 양말을 벗고
하얀 고무신을 신어 보았습니다

울타리를 넘어서
맨 처음 날아 든

한마리
노랑 나비

그 나비를 쫓던
어린 봄의 경이(驚異)를

삼월(三月)은
오늘에도
이렇게
한 장 너의 편지로 보내왔구나.


- 정 한모 시 ‘ 삼월(三月)의 편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는
너는 네 눈을 감고
나는 내 눈을 감으면 된다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차라리 목숨과도 같은 것

구름의 생리로 부푸는 젖가슴과
허벅다리의 야무진 힘과
뜨겁게 젖어 물결치는 입술과

토실하게 잘 익은
이 과실의 변두리를
어둠이 핥는다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여백(餘白) 속에 묻혀서
나눌 수 없는 미각(味覺)의 샘을 한 입 하여 마시면서
너의 맹목(盲目)은 오히려 슬기롭고
나는 굴욕(屈辱)조차도 흐뭇한 종일 뿐

산의 무게 아래 실눈을 감고
바다의 움직임에 흔들리는 배가 되고
아름다운 기슭의 굴곡(屈曲)을 더듬으며
둘이서 찾아내는 마음의 섬

어둠이 씻어주는 이 순수한 공간(空間)에 누워
손끝이나 장심(掌心)에서
뜨겁게 살아나는 생명(生命)의 줄기에는
꽃이 열리고
너는 내 팔을
나는 네 가슴을 갖는다

비슷비슷한 모든 나로부터
나를 찾아
비슷비슷한 모든 너로부터
너를 찾아내어
우리는 이제

이슬진 알알 소담히 열린
우리의 석류(石榴)송이를
하나로 차지한다

장미나 라이락의 꽃내음 속을
긴 돌담을 끼고 혼자서 돌아가며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욕망의 날에서부터

버들가지 물올라 맴도는
봄을 지나
꽃씨 하늘로 터지는
가을과
즐겁고 괴로웠던
젊은 날의 모든 꽃밭을 지나서

이제
더 호화로울 수 없는 사치와
또한 적막과
완전(完全)한 망각(忘却)의 심연(深淵)에
꽂히는
이 전율(戰慄)의 화살

이것은
부끄러움일 수 없다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어둠 속에 열리는 까만 눈동자같은 것

나도 믿을 수 없는 억센 힘과
너조차 헤아릴 수 없는 너의
사랑스러움으로 환히 열리는
까만 동자 안에
우리의 밤을 빨아 들이기 위하여
너는 네 눈을
나는 내 눈을 감자구나.




- 정한모 시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여백을 위한 서정, 신구문화사, 1959>



달아오른 육체(肉體)로
할딱이는 숨결로
뜨거운 입김으로
어둠 속 몸을 비트는
지열(地熱)로 비등(沸騰)하는 이브들의
와라와라 속에서
솜털 부끄러운
알몸을 드러내고
단단하게 팽창하는
유두(乳頭)의 봉우리

견디다 견디다 못해
드디어 터지는
하늘 같은 환희(歡喜)여!
아, 바람에 하르르 떨고 있는
목련(木蓮)의 꽃이파리.



- 정한모 시 ‘ 목련‘
<원점(原點)에 서서, 문학사상사, 1989>



하루걸이 높은 身熱과 같은
아픔의 자국 위를
지금은 청자빛 바람이 지나가고

하늘의 깊이에서 들려오는
어머님의 기침소리
어린 날의 들판에서
번져 오는 저녁 연기

모든 말씀과 소리
이제와 그제없이 통하는
이 가을 저녁에

말갛게 닦아 놓은 등피 안에
서리는 그리움
지금 촉촉히 젖은 심지는
당신의 손
당신의 점화를 기다린다.


- 정 한모 시 ‘ 하늘의 깊이에서’



빛방울 방울지어
울리는 방울소리

목소리는 눈에서
불로 타고

굴 안에 퍼지는
햇살 같은 마음소리

울음은 가두었다
꿈길에나 터뜨리고

한 줌 가슴
산을 안고
발돋움 돋움하는
작은 새야

연잎 위를 구르는
물방울같이야
나뉘어 도글도글
굴러갈 수 있으랴

그늘 짙은 나뭇가지
그늘짓는 햇빛이다

날아라
나의 새야
나의 하늘을.



- 정한모 시 ‘작은 새‘
시집<아가의 방>





** 정한모 (시인) 1923 ~1991

서울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23  충남 부여 출생.
1973  << 현대시론 >>발간,
1981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8  문화공보부 장관 역임
1991  사망

1958  범호사       < 카오스의 사족 >
1959  신구문화사   < 여백을 위한 서정 >
1970  문원사       < 아가의 방 >
1975  일지사       < 새벽 >
1983  고려원       < 사랑 시편(時篇) >
1983  문학예술사   < 아가의 방(房) 별사(別詞) >
1983  현대문학사   < 나비의 여행(旅行) >
1989  문학사상사   < 원점에 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