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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위트’ & **’시니컬’ - 신 미균 시. *wit(위트): 명사, 말이나 글을 즐겁고 재치 있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능력. **cynical(시니칼): 1. 형용사 냉소적인 2. 형용사 부정적인(중요하거나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3. 형용사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 더보기
‘소녀에서 그녀에게,,‘ - 문 정희 시인.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더보기
일상속의 ‘무지개‘를 쫒아,, - 최 정례 시. 꽝꽝나무야 꽝꽝나무 어린 가지야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날 여보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어린 가지야 꽝꽝나무야 나에게 물어줄 수 있겠니? 여보, 밥 먹었어? 엄마, 밥 먹었어? 라고 그럼 나 대답할 수 있겠다 꽝꽝나무야 나 밥 먹었다 국에 밥 말아서 김치하고 잘 먹었다 - 최 정례 시 ‘밥 먹었냐고‘ [햇빛 속의 호랑이],세계사, 1998.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한 짝은 엎어져 딴생각을 한다 별들의 뒤에서 어둠을 지키다 번쩍 스쳐 지나는 번개처럼 축제의 유리잔 부딪치다 가느다란 실금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짐을 싸고 나면 병이 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가기 싫은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고야 만다. 고요하게 .. 더보기
유명하나 전혀 유명하지 않은, 이중적인 삶과 시 - 고은 시. 기원전 이천 년쯤의 수메르 서사시'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 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땽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하잔 더 드시굴랑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나 - 고은 시 ‘선술집’ 모두 * [허공], 창비, 2008.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칼날이 포릉포릉 울었다 흐르는 물이 마침 있어주었다 천행인바 네가 풀다발이 아니라 네가 가여운 암노루 모가지가 아니라 물인 것 아비의 적이 아니라 흐르는 물인 것 너! 물을 잘랐다 잘린 물에 칼자국 없이 피 한방울 없이 아무도 없이 그냥 흘러.. 더보기
섬진강, 물길 따라 피고 진 ‘꽃과 사랑’ - 김 용택 시.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김 용택 시 ‘구절초 꽃’ *나무, 창작과비평사, 2002 아내는 나를 시골 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득 발자국을 꼭꼭.. 더보기
‘그대’ 가까이,,‘존재의 부재‘’ - 이 성복 시 1 바람에 시달리는 갈대 등속은 저희끼리 정강이를 부딪칩니다 분질러진 다리로 서 있는 갈대들도 있엇습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정강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립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3 나무 줄기 거죽이 자꾸 갈라지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집니다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밥 먹고 옷 입는 일 외에는부러진 나뭇가.. 더보기
‘생활 속에 핀 꽃’ - 나 희덕 시. 17년 전 매미 수십억 마리가 이 숲에 묻혔다 그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해다 17년의 어둠을 스무 날의 울음과 바꾸려고 매미들은 일제히 깨어나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앉을 뿐 멀리 날 수도 없어 울음을 무거운 날개로 삼는 수밖에 없다 저 먹구름 같은 울음이 사랑의 노래라니 땅속에 묻히기 위해 기어오르는 목숨이라니 벌써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매미도 있다 하늘에는 울음소리 자욱하고 땅에는 부서진 날개들이 수북이 쌓여간다 매미들이 돌아왔다 울음 가득한 방문자들 앞에서 인간의 음악은 멈추고 숲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온 음악제가 문을 닫았다 현(絃)도 건반도 기다려주고 있다 매미들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갈 때까지 - 나희덕 시 ‘매미에 대한 예의‘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 더보기
‘강렬한, 직관적인 자기응시’ - 김승희 시. 누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가지를 효수해 걸었을까? 목을 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는 이렇게 목을 매는구나 울먹이는 마음 나 돌아가는 길에 어느 어둠의 모서리에 부딪쳐 쓰러지지 말라고.... 그런데 어두운 골목 옆 환한 담벼락 안에선 동화 같은 이런 말이 소근소근 들려오는 것도 같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전원에 줄만 꽂으면 꾸벅꾸벅 절하는 각시와 신랑 인형의 전기줄을 꽂아놓고 어여쁜 한국인형의 절을 받으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앞에서 웃는 사람들의 담소의 목소리 요즘에는 묻는 사람들에게마다 네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요술거울이 나왔나 보다 백설공주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런 거울 하나씩 갖고 동그라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