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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꽃‘ 처럼 다가온 사람, ‘체향’으로 다가온 시 - 이 문재 시.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알 수 없어서 꽃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향을 피우지 않았다 누가 당신의 이름을 가렸는지 무엇이 왜 당신의 얼굴을 숨겼는지 누가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의 당신들을 만나 온통 미래였던 당신의 삶과 꿈을 나눌 수 있었다면 우리 애도의 시간은 깊고 넓고 높았으리라 이제야 꽃 놓을 자리를 찾았으니 우리의 분노는 쉽게 시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야 향 하나 피워올릴 시간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각오는 쉽게 불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초혼招魂이 천지사방으로 울려퍼져야 한다 삶이 달라져야 죽음도 달라지거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지금 여기와 다른 우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 애도다 애도를 기도로, 분노를 창조.. 더보기
‘자아‘에 대한 부재적 ‘실존’ - 그 ‘이미지’에 대한 이해 - 최 승자 시.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로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최 승자 시 ‘ 시작’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휜 똥을 갈기고 죽어 삼일간을 떠돌던 한 여자의 시체가 해양 경비대 경비.. 더보기
‘커피는 검다‘’수프와 숲‘’대못‘ 외 몇편 - 한 재범 시 . 생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지하철부터 탔군요 미워하기 적합한 곳이네요 매일 지옥을 찾는 사람들처럼 창밖에 시신을 둬야겠군요 지옥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는 없고 지옥은 너무나 간편하군요 창밖을 보면 창 안의 내가 보이고 창밖은 모르는 얼굴뿐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 익숙해서 큰일이군요 기껏 태어났는데 일생의 절반이 지하라서 내일부터는 좀 걸어야겠네요 건강하기 위해선 걷기가 필요하고 걷기 위해선 걷는 몸이 필요하군요 지옥에선 불필요하지만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 더보기
‘너’의 침묵이, ‘나’의 침묵으로 ‘오롯이‘ 마주 설때 - 조 용미 시. #오롯이 1. 남고 처짐이 없이 고스란히, 2. 아주 조용하고 쓸쓸히. 이른 아침,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곳에서 사람을 만난 건 처음 있는 일 누군가 나무를 찾아오는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지금 희귀한 이 시간에 딱 부딪히다니 불편하지 만 그렇다고 피할 데도 없다 먼저 온 이와 나는 서로를 보지 못한 척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나무만 바라보았다 이 나무를 잘 아느냐고 먼저 그가 말을 붙였다 그와 나는 십수 년간 나무를 찾아왔다 멀리서, 내게 맞는 봄을 찾아, 해마다 이 늙은 매화나 무 아래 서 있다 가느라 나도 모르게 나이를 먹었다 손가락에 감은 붕대가 붉게 물들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무의 지문을 살핀다 그가 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아니다 햇빛 드는 한낮까지 늙은 꽃나무는 다정하지도 무.. 더보기
“어머니이자, 어머니를 그리는 엄마“ ‘페미니즘’의 시 - 정 끝별 시. # 페미니즘 [feminism]: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 정 끝별 시 ‘모래는 뭐래?‘ [모래는 뭐래],창비, 2023. 귓속 고막.. 더보기
‘무위(無爲)와 순리(順理)의 시’ - 오 탁번 시인. 입과 코를 숨긴 젊은이들 눈망울이 꽃샘에 피어나는 수선화 보듯 봄은 급하게 온다 오늘은 백신 맞으러 간다 다 산 다늙은이지만 추사가 수선화를 보듯 좀만 더 살아보자 그동안 너무 싸돌아다녔다 이젠 위리안치! 새싹 올라오는 마늘밭에서 어정버정하다 보면 다 궁금코 어여쁘다 - 오 탁번 시 ‘위리안치‘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더보기
삶의 찰나에 대한 ‘크로키’ - 장 석주 시. * 땅거미 내리니 컹컹대며 보채는 개들에게 먼저 사료 주고 들어와 푸른 형광등 아래서 서운산에서 뜯은 취나물과 막된장 놓고 저녁밥을 먹는다. 오월이다, 밤마다 풋감들 후두두 떨어지고 들고양이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운다. 저 홀로 시름 깊은 사람 있겠다 * 풀먹인 모시옷 입고 둔덕 죽은 나뭇가지에 와서 우는 뻐꾹새 울음에나 귀를 내놓고 소일한다. 밤에는 덤불 위로 개똥벌레가 떠다닌다. 남은 세월은 한량으로 지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붉은 모란촉처럼 씩씩하게 내밀어 보는 것이다. * 사는 동안 슬픈 일만 많았다. 무서리 내리고 된서리 내렸다. 고사리 새 순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살모사 놀다가는 날도 있다고, 물안개 자욱하고 나무들에 새 잎 돋는 날도 있다고, 초승달 떴다. * 종일 뱁새가 노래한다... 더보기
현실 시, ‘풍경과 체감온도’ - 이 수익 시. 고양이가 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지는 4천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고양이는 그것을 제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일 같기도 하고 또는 알면서도 그저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는 것 그렇게 고양이는 전혀 포커페이스의 은밀한 양동 작전에 휘말린 채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을 찬찬히 바라다보고 있는, 그 민첩한 교활성 때문에 나는 고양이가 좋다 고양이의 우아한 발톱과 유혹적인, 날선 눈빛 캄캄하게 내부를 숨겨둔 채 하얗게 피어오르는 교만함과 질투, 앙칼스럽지만 상대적으로 외교적 처세법을 터득한 고양이에게 나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고 싶다 모두들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만 믿어대는 우리 바보들에게 고양이, 너의 화려하고도 세련된 기품을 나누주고 싶다 - 이 수익 시 ‘포커페이스‘ [2019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현대문학,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