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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자연‘ 속의 ‘나’ - 이 형기 시.

저기, 내가 서 있다.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음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년의 강물이다


- 이 형기 시 ‘나무’
* 부산시 어린이 대공원 내
  ‘시가 있는 숲`(1990,10.02 세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 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 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 형기 시 ‘落花(낙화)‘ 시집: 돌베개의 시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이 형기 시 ‘폭포’




나의 마음은 비어 있다.
오직 네가 와서
가득 채워 주기를 기다리는 뜻으로
이것을 하나 마련하였다.

소리치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인내의 한때
그리고 멀리
떠나가면 그만인 구름 같은 마음을

아아 이 조그만 면적에 기대서
나는 나의 반평생을 저울질한다.

애절한 박모
안개 서린 골목길

부슬비 오는 밤에
나는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고 있다.

때로 나는 회의하고
때로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것들이 얼룩진 초가집 영창 밖에
밤을 새워 우는 가을 풀벌레.

귀를 기울이면 가랑잎이 지는데
조심스런 네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비어 있는 내 마음의 갈구의 표지
창에 불이 켜 있는 것을 보아라.


- 이 형기 시 ’ 窓2‘
* 오늘의 내 몫은 우수 한 짐, 문학사상사, 1986





내 죽거들랑 무덤을 짓지 말라
하물며 돌에 문자를 새긴 묘비일까 보냐
그냥 불에 태운 뼛가루 두어 줌
강가에 뿌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는
원래의 내 자리
실은 누구나 게서 온 그 자리
텅 빈 가이없는 허공으로
깨끗한 잊어짐의 길 떠나갈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추적대는 빗줄기
휴우휴우 바람 부는 밤이면
불어대는 그 바람으로 날려서

공중에 무수하게 찍혀 있는
새의 발자국 그것이나 주워서
가는 길 하늘에 고수레하고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무엇이든 마지막엔 드러나는 바탕
아무것도 없음이여
억조(億兆)의 죽음을 삼키고도 예전 그대로
없음만이 찰랑대는 그곳 허무의 집으로
나는 선선히 돌아갈 것이다

- 이 형기 시 ‘ 새 발자국 고수레‘
* [절벽], 문학세계사, 1998.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 세번 긁어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 되어 함께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 이 형기 ‘ 등’
[별이 물이 되어 흐르고], 미래사,1991




찔레꽃 피고 지는 이 언덕  이 고개
혼자 넘는 가슴에 함박눈 온다
가고 없는 사랑의 먼 그림자는
여름철 그윽한 찔레꽃 향기
설움도 잊었더라 이 모진 세파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온 순정
헤어지는 오늘은 혼자 가려네
찔레꽃 한아름 가슴에 안고

그대의 복을 빌며 돌아서는 날
눈 내리는 자하문 추억의 터전
순정일로 외줄기 가고 또 가도
찔레꽃 피는 길은 끝이 없어라


- 이 형기 시 ‘찔레꽃’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日募....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 이형기 시 ‘비’






소록도로 가고 싶다
문둥이 주제에 소풍이 당할까만
이 봄날 이 햇볕 아래서
문둥이는 문둥이끼리 손을 잡고
소풍 한번 가고 싶다

어제는 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겨우 두 개 남은 오른발 발가락이
그 오른발 아주 못쓰기 전에
절뚝거리면서 저편 들길을 지나
해변까지 걸어가고 싶다

꼭 돌아와야 하는 소풍은 아니다
가서 늦어져 이쪽에 등불이 켜질 때
아무 생각 말고 그 등불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잠들어버리는
그런 소풍

하지만 도시락 점심도 싸야 한다
수통에는 물을 채우고
소주도 몇병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한데는 한데
옷은 좀 두툼하게 껴입어야 한다

그러면 준비가 다 끝나는 소풍
그것은 얼마나 즐거울까
슬플 수도 있으련만 슬프다는 말은
하지 않고 웃는다
그냥 웃는다

그런 소풍을 가고 싶다
문둥이가 문둥이끼리 손을 잡고 가는
성한 사람은 낄 수 없는 소풍
귀로가 늦어져 마을에 켜진 등불을
바라보다 잠드는
그런 소풍을 가고 싶다


- 이 형기 시 ‘소풍’
* [절벽], 문학세계사, 1998.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 이 형기 시 ‘호수 ’




광대한 사막 하나 펼쳐져 있다
거기 터벅터벅
낙타 한 마리 가고 있다
쇠추를 매단듯 발걸음은 무겁다
등에 솟아있는 혹
그 몽우리엔 노을이 비켜있다
왜 가는지를 모르고 가는 낙타
지구는 둥글다
낙타는 느릿느릿 둥근 지구를 타고
간다
낙타는 외톨이
그리고 낙타는 눈이 멀었다
먼 눈으로도 볼 수 잇는 것만
보고가는 낙타
둥근 지구를 터벅터벅 타고간다


- 이 형기 시 ‘낙타 ’
* 문학마당. 2004. 가을호




나의 캔버스는 바람으로 되어있다
거기에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내 주변의 풍경과
또는 나의 초상화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많은 색채가 칠해진 그림
그러나 다시 보면 그것은
아무 색깔도 없느 그림이다

열가지 스무가지 설흔가지로 어지러운
그러나 잘 조화된 색깔의 어울림
그 어울림은 어울림 그대로 하나를 이룬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바람의 자리
나의 캔버스에서.


- 이 형기 시 ‘ 바람의 캔버스‘
* 문학마당. 2004. 가을호




자 이젠 다 왔다
다음은 쉴 차례
아니 깊이깊이 잠들 차례다
이 세상 끝나는 그날까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이젠 다 왔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정말 있는가
다만 다 왔다고 생각한
그 생각만이 공중에 떠돌 뿐이다

떠도는 가운데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젠 다 왔다는 한때
그것이 또한 끝이 아닌 것을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나의 죽음
그것조차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 이 형기 시 ‘다왔다’
* <문학사상> 2004. 6월호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 아 형기 시 ‘ 그해 겨울의 눈‘
* 별이 물되어 흐르고, 미래사





새를 그린다
힘차게 퍼덕이는 커다란 날개
날개를 타고 가는 크레온의 곡선을

그려놓고 다시 보니
새가 없다
다만 찢긴 날개 몇 짝
무참하게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리려는 순간에 재빨리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린 새
모양이 없는 새
그리고 뒤에 남은 휴지의 구겨짐

창밖엔 헛것처럼 달이 떠 있다
남은 도화지로
누군가 하늘에 오려붙인 새
새가 아닌 낮달


- 이 형기 시 ‘낮달’




혼자 거닐어 외롭지 않구나
이 풍경.

보람이 무너진 빈자리
길은 아무데나 트여 있는 거리에

노을이 지는가,
日暮를 알리는
적막한 동굴 같은 종이 우는가.

이제는 옛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인생은, 아
떠나서 뒤에 남는 뉘우침으로
인생은 산다.

운다는 것이
도리어 한 오리 바람으로 통하는
이 풍경.


- 이 형기 시 ‘풍경에서‘




심장을 만듭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색칠을 합니다.

원래의 심장은
지난 여름 장마때
피가 모조리 씻겨 빠졌습니다.

그리고 장마 뒤의 불볕 속에서
내 심장
빈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허물처럼 까실까실 말라 버렸습니다.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심장
구겨 뭉쳐 쓰레기통에 내 버린 심장
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심장을 달랍니다.

드리고말고요
어렵잖은 일입니다.
당신의 맘에 꼭 드는
예쁘장한 심장

어두운 가슴속에
감추어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쩨쩨하게 혼자
독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 둥둥 하늘에 띄우는 심장
떠다니다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심장
오늘 나는 그 풍선 심장에
곱게 곱게 색칠을 합니다.


- 이 형기 시 ‘풍선 심장’




1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오는 우리들의 체온을..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 이 형기 시 ‘그대’




한 세기가 저물고 있다
멸망의 아름다움
하늘에 붉게 타는 저녁노을은
그러나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백년 동안 온통 파헤쳐져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는 지구
완전히 골병든 그 노파는 아랫도리를
겨우 사막으로 가렸을 뿐이다

그녀의 깊은 샘은 말라버렸다
거기서 흘러나오던 정액과 눈물
눈물과 같은 비율의 소금기의 바다는 흔적만으로
그 사막치마 밑에 감추어져 있다

불모의 쓰라림을
또다른 불모로써 견디고 있는
차가운 무표정이 그녀의 몫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금이 필요없는 방부제의 시대
아무것도 썩지 않고 번영에 또 번영이 보태져
번영이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시대

멸망조차 방부제를 듬뿍 먹고
박제가 된 이 세기말의 저녁 하늘에는
해가 져도 타는 노을이 없다


- 이형기 시 ‘ 해가 져도 노을이 없다‘
* <현대문학>1994/4월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이 형기 시 ‘ 길‘
* 시집<별이 물되어 흐르고>,미래사




오랜 헤맴 끝에
간신히 골목을 빠져 나왔다
미로를 졸업하고
이젠 큰 길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동서남북 아무데로나 트여있는
넓은 자유의 길
아뿔사, 그러나
동시에 사방으로 갈 수는 없다
어떻게 방향을 잡을 것인가
캄캄하게 버티고 있는 미로
예대로의 미로!


- 이 형기 시 ‘미로’




밤,
봄비는 창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이 젖는다

봄,
밤에 내리는 비
반 옥터브 낮은 목소리

물기가 배인 육신의 무게를
가눌 길 없구나.
봄밤에 비 온다.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 재워 다오.


- 이형기 시 ‘봄 비’



얼음우에 댓닢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으려고
한겨울 이 밤 더디 새라 했더니
그리하여 가슴 저리는 사랑노래
애절한 꿈으로 하나 남기려 했더니
아서라 말아라
때는 바야흐로 지구 온난화시대
거대한 그 온실 안에서는
아무데도 얼음이 얼지 않는구나
아희야 댓닢자리 치워라
님과 나와 택시 잡아타고
포근한 러브 호텔 침대로 가리니


- 이형기 시 ‘ 신 만춘전‘
* ’죽지 않는 도시‘ 고려원.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그늘....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 이 형기 시 ‘들 길’




이 도시에는
편지를 쓰는 시민이 아무도 없다
전화를 두고
팩시를 두고
성가시게 편지는 무슨 편지

하지만 우체부 김씨의 우편낭은
산타클로스의 선물푸대보다 더 크다
그 속에 가득 찬
안 사면 손해인 소비자의 복음
홍보용 인쇄물

공짜로 줄 듯한 모델 아가씨의 미소와
모시는 말씀 알리는 말씀
말씀만 쏙 빠지게 다듬어낸 활자들은
마음이 없기에 어떤 마음도 가질 수 있다
마음이 어디 밥 먹여 주는가!

우체부 김씨에겐
루돌프 사슴이 모는 썰매가 없다

그래도 매일이 크리스카스 같은 우편낭을
꼽추 콰지모도의 등에 난 혹처럼 메고
찾아오는 김씨

편지를 쓰지 않으니 받을 편지도 없어서
누구도 김씨를 기다리지 않는 이 도시
다만 쓰레기통만이
공짜로 줄 듯한 상냥한 아가씨와
모시는 말씀 알리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 이 형기 시 ’우체부 김씨‘
<현대시사상,1992,봄. >




심부름 센터에 부탁하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대신해준다

시험지옥에는 대리시험
학위논문도 물론 대신 써준다

관공서에 가면 그는 그림자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실체는
그를 대신하는 주민등록증이다

다른 사람의 소송대리인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수재들

아들딸 낳고 싶으면
대리모와 정자은행에 연락하시오

살인도 대신해주려고
살인청부업자가 기다리고 있다
값이 좀 비싸지만

그러나 죽는 것만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내가 직접 죽을밖에 없다

아 안심이다
그래도 내가 꼭 나라야만 되는 일
마지막 희망 하나 아직 남아 있으니


- 이 형기 시 ‘ 마지막 희망‘




그는 언제나 추위를 탄다
어깨를 웅크리고 주위를 살피면서
그가 찾아가는 술집은 희망의 집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집이다
눈은 그의 가장 힘겨운 부채
희망을 하얗게 묻어버린다
지구처럼 둥글게 공중에 떠 있는 집
무덤 위에서 눈을 한 웅큼 덜어내
그는 가슴에 불을 지핀다
불길에 녹아서
누군가 한동안 울다 간 것처럼
하루바닥이 조금 젖어 있는 그 집
희망의 집


- 이형기 시 ‘희망의 집’
* 죽지 않는 도시.고려원.1994.




눈을 감으면
아득한 기억의 저 쪽에서
하얗게 떠오르는것이 있다
보니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수없이 입밖에 내었던
그리고 또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꿀꺽 삼켜버린 말들이다
원래는 색깔과 모양과 의미가 있었던
그것들이 이제는 그저 하얗다
만들어진 모든것은
필경 사그라져 버린다는 뜻인가
그러나 다시보면
그것은 싸락눈이 깔린 언덕이다
봄이되어 그 눈이 녹으면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그리하여 새로 시작할 그 자리
소멸과 생성이
둘이면서하나인 모순의 자리가
바로 거기 있구나


- 이 형기 시 ‘모순의 자리‘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흰색 보리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꿈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 이 형기 시 ‘비 오는 날‘




어길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루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가는 바람에도
불고가는 바람처럼 떨던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것.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또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 이 형기 시 ‘호수 ’




자꾸만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 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채 - 희망도 절망도
불 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라미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호올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 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나의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 이 형기 시 ‘코스모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다만 무력을 고백하는 나의 신뢰와
그리고 이 하찮은 두어 줄 시밖에.

내 마음 항아리처럼 비어 있고
너는 언제나
향그러운 술이 되어 그것을 채운다.

정신의 불안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생활에 이끌려
황막한 벌판
또는 비 내리는 밤거리의 처마 밑에서
내가 쓰디쓴 여수에 잠길 때
너는 무심코 사생에 주었다
토요일 오후의 맑은 하늘을.

어쩌면 꽃
어쩌면 잎새
어쩌면 산마루에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아니 이 모든 것은 전체와 그밖에
또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토지와
차운 대리석!

아 너는 진실로 교목같이 크고
나는 너의 그늘 아래 잠이 든
여름철 보채는 소년에 불과하다.


- 이 형기 시 ‘송가’




1
약속은 그것을 지켰을 때보다
어겼을 때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만 깜박 잊어버린 약속,
事後에 느닷없이 생각이 나서
혀를 차는 약속,
조금은 섭섭하고 조금은 아쉽고
또 조금은 죄스럽고 또 조금은......
혀를 차지만 역시 조금은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2
벌을 서서
청소 당번이 된 날의 하학 종소리,
여섯시 정각의 데이트를 놓친
여섯 번째의 괘종소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소리,
위약은 언제나 사후에 깨닫는
그 운명의 여운이다

3
잠시 한눈을 파는 새
그 사람은 떠나가 버렸다
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구나
그늘이 밝음을 일깨워주듯
위약이 나를 일깨워준 약속의 무게,
또 그만한 삶의 무게,
조금은 단념하고 조금은 뉘우치고......
하지만 역시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 이 형기 시 ‘위약(違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허탕밖에 없는
아무도 없는 이 벌판에서
그래도 찾아야 할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니
쉿! 저기 안 보이는 저기
숨은 듯 아닌 듯한 그림자
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
필경은 나를 찾는
확실하고 허망한 이 술래잡기!


- 이형기 시 ‘술레잡기 1‘
* 시집<절벽>.문학세계사.1998.





영화는 끝났다.
예정대로 조연들은 먼저 죽고
에이허브 선장은 마지막에 죽었지만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도 이제는 간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쳐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
그러고 보니 모비 딕 제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
진짜 모비 딕은
영화가 끝나고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 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제 정체를 드러낸다.


- 이 형기 시 ‘모비 딕’





나의 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다.
먼 길을 가다 말고
잠시 다리를 쉬는 풀섶에

흐르는 실개천
쳐다보는 흰 구름

또는 해질 무렵 산허리에 어리는
저녁 안개처럼 덧없이 가볍다.

아, 보랏빛 안개 서린 희노애락
먼 길을 가며 보는 강산풍경...

일모와 더불어 귀로에 오르는
내 이웃들의 단란을 빌고

외로운 사람의
불을 끈 창변에
서늘한 달빛같이 스미고 싶다.

여류한 세월에 물같이 흐르는
흘러서 마지 않는 온갖 인연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싶다.


- 이 형기 시 ‘나의 시’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있을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 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위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와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의 숲속의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커다란 가을이
숭엄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 이 형기 시 ‘귀로’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밤에 또한 잠을 못 잔다.
국산 수면제 스리나

그 매끈매끈한 하얀 정제 속에는
꿈이 스며들 틈이 없고나.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지만
때로는 너무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을수록 하얀 정제를......

아아 내게서 꿈을 내쫓고
복용,
한 시간 전후에 동물적인 수면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잠에 취해서 꿈을 잊어버린다.



- 이형기 시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1‘
* 시집<별이 물되어 흐르고>.미래사






** 이형기(李炯基): 1933~2005, 동양통신 기자, 국제신문 편집국장, 부산산업대 교수, 동국대 국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시인. 존재의 무상함과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비>가 있다

1949년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등단했다. 초기 이형기의 시 세계는 자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맑고 고운 현대적 서정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며 조락과 소멸의 운명을 수긍하는 전통 서정의 계보에 속했다. 시집 〈적막강산〉(1963)에서 그는 생의 근원적 고독과 세계의 공허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펼쳐 보인다.

1970년대 이후에는 투명하고 절제된 서정에서 벗어나 상투성과 모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과 시적 방법론의 갱신을 추구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인간 내면을 탐구해가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사물을 관념화하여 우회적으로 서정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썼다. 뇌졸중으로 투병 중이던 1998년 〈절벽〉에서는 소멸의 운명과 맞서 있는 단독자의 고독과 결의를 노래했다. 여기서 그는 소멸이라는 존재의 소실점과 생명의 궁극성에 대한 질문에, 삶이란 허무와 충만이라는 양가적 시간이 지속적으로 순환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한국문학가협회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