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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강렬한, 직관적인 자기응시’ - 김승희 시.

보여지는 나,









누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가지를
효수해 걸었을까?

목을 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는
이렇게 목을 매는구나

울먹이는 마음
나 돌아가는 길에
어느 어둠의 모서리에
부딪쳐 쓰러지지 말라고....

그런데 어두운 골목 옆
환한 담벼락 안에선 동화 같은 이런 말이
소근소근 들려오는 것도 같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전원에 줄만 꽂으면
꾸벅꾸벅 절하는 각시와 신랑 인형의
전기줄을 꽂아놓고
어여쁜 한국인형의 절을 받으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앞에서 웃는 사람들의
담소의 목소리

요즘에는 묻는 사람들에게마다
네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요술거울이 나왔나 보다
백설공주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런 거울 하나씩 갖고
동그라미 - 요술 물방울 - 천연색 기포(氣泡)
속에 갇혀
후욱, 불면 날아갈 듯이 조마조마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결코 가로등 불빛을 원하는
삶을 살지는 않겠지

그러나 무엇을 울고 있는가?
그들이 저 가로등의 이름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해서?


-김승희 시 '가로등 아래에서' 모두





푸른 색
석란희의 보라가
섞인 듯한 푸른 색

푸른 색
김환기의 회색이
섞인 듯한 푸른 색

푸른 색
반 고흐의 미친 주황이
소용돌이치는 푸른 색

푸른 색
모네의 아침 햇빛 일렁거리는
잠이 덜 깬 푸른 색

푸른 색
모딜리아니의 누드에서
설핏 끼쳐 있는 서러운 푸른 색

푸른 색
천경자의 푸른
독사에 나온 광나는 푸른 색

푸른 색
색상은 건반이고
영혼은 피아노
그러면 빨강은 `도'
파랑은 `레'
초록은 `미' 라고 했던

그 어디에도 없는
칸딘스키의 푸른 색

이 모든 푸른 색
그 모든 푸른 색
내가 죽어도
남아 있을
저 이유 없는 행복.


  - 김승희 시 '푸른색' 모두




장사익의 '찔래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런 노래 듣고 있을 때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다가오다가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무너지더라도
13월의 태양처럼
세상을 한번 산 위로 들었다가 놓는 마음

노래가 뭐냐?
마음이 세상에 나오면 노래가 된다는
장사익의 말......
그래서 아리랑이 나왔지,
하얀 꽃 찔레꽃 찔러 찔려가면서
그래서 나왔지, 찔리다 못해 그만 둥그래진 아리랑이
둥그래진, 멍그래진,
찔렸지 울었지 그래 목 놓아 울면서 흘러가노라

장사익의 '찔레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렇게 한번 세상을 산 위로 들었다 놓는 마음
13월의 태양 아래
찔레꽃 장미꽃 호랑가시 꽃나무가
연한 호박손이 되고 꽃순이 되고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로 날아갈 때까지
마음이 마구 세상에 흘러나오고 싶은 그 순간까지
숨을 참고 기다리다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런 아리랑.



  -김승희 시 '천의 아리랑'中 '(2. 부용산) 모두





더블어 살면서도
아닌것 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블음 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두개의 대나무가 묶이어 있다
서로간에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생기지,
그 빈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 동물들처럼
서로 돌기를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 목을 조르는 것

더블어 살면서도
아닌 것 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 피리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블음 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김승희 시 '萬波息笛'모두





무, 내가 롯데마트에서 사 온 겨울무 두개,
산처럼 쌓인 무 더미에서 몸통이 단단하고 무청이 싱싱한 것으로
내가 고르고 골라 두개를  사 왔네,
'내가' 라는 말은 참 위험한 말
곱게 씻어서 가운데를 잘랐더니 바람 든 무

가슴에 거뭇거뭇 구멍이  숭숭 뚫린 무
내면의 조소(彫塑), 조각이나 소조,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무영탑, 다보탑, 그런 돌탑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아니 지나가는 길손이 산길에서 돌 하나를 주위 와 탁 놓고 간
막 쌓은 막탑 같은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더 추운 것 같아, 이렇게 말하던 친구가
있었지, 이런 친구 저런 친구

말의 울림통이 막힌 지점에서
바람이 들어간 무를 보면서 생각하네
바람난 무 말고 바람 든 무

가슴속에 바람이 그린 무영탑, 다보탑, 또 여러 막탑의 형상,
조소, 조각이나 소조,
뒷면에 수은이 벗겨져서 반영이 일그러진 거울처럼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친구와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있다는
다른 친구 모두 지금은 소식이 끊겼지만
바람이 들어간 무 속에서 젊은 그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해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가슴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왔을지
바람의 악기 한 소절이 남아
무무 무무 무우무우 무무 무우무우
남몰래 가슴속에 돌탑을 가르며 바람 든 무 그렇게 살아왔겠지


- 김 승희 시 ‘ 바람 든 무‘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못 박힌 사람은
못 박은 사람을 잊을 수 가 없다
네가 못 박았지
네가 못 박았다고

재의 수요일 지나고
아름다운 라일락, 산수유, 라벤더 꽃 핀 봄날
아침에 떴던 해가 저녁에 지는 것을 바라보면
못 박힌 사람이 못 박은 사람이고
못 박은 사람이 못 박힌 사람이고
못 자국마다 어느 가슴에든 찬란한 꽃이 피어나고 있는데

못 박힌 사람이
못 박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듯이
못 박은 사람도 못 박힌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못 박힌 사람과 못 박은 사람만 있는 곳이 에덴의 동쪽

시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것
아픈데 정녕 낫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쓰는 것
못 박힌 아픈 가슴 움켜쥐고도
못을 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에덴의 동쪽에서 시를 쓴다


- 김승희 시 ‘못 박힌 사람‘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이미라는 말,
그런 것이다
언제 찬란했냐는 듯
겨울의 눈송이가 다 녹아 스며들었다는 말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라는 말은
그런 것이다,
공중에 뜬 리프트 상태에서 추락해 전신에 큰 부상을 입은 발레리나,
노을이 가슴에 내려와
한 사발 가득 목울대부터 채우던 울음,
언제 찬란했냐는 듯
빈 사발에 쓸쓸한 물빛만 맴돌고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기장처럼 뻥뻥 뚫린 가슴 안에 모기는 이미 들어와 있다,
움직일 때마다 모기소리가 식식거리는 흉곽,
어차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어붙은 가슴팍 밑으로
이미, 터무니없이,
언제 찬란했냐는 듯
그런데
봄눈 녹아
복수초부터 수선화, 유채꽃, 노루귀, 한계령풀,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개나리, 진달래…
줄을 이어 꽃잔치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덜어내고도 다시 고이는 힘!
이미란 말이다


- 김승희 시 ‘이미'라는 말‘
* 흰 나무 아래의 즉흥,나남, 2014





지하수가 지하에 있기를 거부하는 시간이 오면
지하수가 땅으로 올라오고
도로는 무너지고 문명의 금자탑은 스러지고
가두리 양식장은 바다로 끈을 뚫고 나아가고
지상의 것들은 속절없이 허물어져 싱크홀 속으로 삼켜지고
이 보다 더 큰 혁명이 있는가
엄마도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는 향기가 난다오
댁은 누구셔요?
너는 누구냐
병실 창밖으로 나비가 날아가니
아, 나비······나는 너를 안다
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딸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로즈 마리 이리 온
두 마리 조롱조롱한 강아지에 손을 내밀면서도
나만 못알아보는 순간의
너무나도 초롱초롱한 저 눈빛
로즈마리가 자식이요 해가 달이요 병상 모니터가 은하수요
전주가 경성이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인 가족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번개가 쳐서 스마트 폰이 떨어지면 흰 연기가 나고
우체국 배달이 다 끊어지고
가뭄에 땅이 갈라지는데 저기 비 온다 소내기, 빨래 걷어라
장독 뚜껑 닫아라 나물 소쿠리 치워라 허공에 두 팔을
흔들며 로즈마리 밥 줘라 로즈마리를
찾는
엄마 당신은 나의 엄마인데 였는데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나의엄마였다니까요
이 아귀들아 로즈마리 밥 줘


-김승희 시 ‘ 막막한 시간2 ‘
* 시로여는세상, 2015년 여름호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도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 김승희 시 ‘사랑의 전당‘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랑],창비, 2021.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퍼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은 외롭다


- 김승희 시 ‘ 희망이 외롭다 1‘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2월은 좀 무언가가 부족한 달
동백꽃은 한떨기 한떨기 허공으로 툭 떨어진다
떨어져서도 꿈틀대며 며칠을 살아 있는 꽃 모가지
낙태와 존엄사와 동반자살, 그런 무거운 낱말을 품고
선홍빛 꽃잎, 초록색 잎사귀
툭, 동백꽃은 모가지째로 떨어져 죽는다
부활이란 말을 몰라
단번에 죽음을 관통한다

더 이상 퇴로는 없었다
칼로 목을 자르자 하얀 피가 한길이나 솟구치고
캄캄해진 천지에 붉은 꽃비가 내렸다는
겨울 속의 봄날
산 채로 모가지가 떨어지고
모가지째로 허공을 긋다가 땅바닥에 툭 떨어져
피의 기운으로 땅과 꽃봉오리는 꿈틀대고

한떨기 한떨기가 피렌체 르네상스 같은 동백꽃,
너무 아름다워 무서웠던 파란 하늘 아래
꽃의 성모 마리아, 빛나는 한채의 두오모 성당의 머리를 들고
툭, 무겁게 떨어지는 동백꽃

여한 없이 살았다
여한 없이 죽었다
불멸이란 말을 몰라 날마다 찬란했다


- 김승희 시 ‘2월에 동백꽃은‘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죽이 되거나 밥이 되거나
그것이 절체절명도 아닌데
죽도 밥도 아닌 그것 그대로
그렇게 살면 안 되나

죽도 밥도 아닌 세월에
삶은 이 지극한 궁지를 빠져나가기 위해
영광스러운 밥을 한번 잘 지어보라고 하는데
궁지가 긍지가 되라고 하는데

죽이거나 밥이거나
양자 결단을 내리는 지엄한 칼보다는
죽도 밥도 아닌 그것 그대로
시시한 언어도단이라도 있으면 안 되나

이게 말이냐 막걸리냐
심각하게 따져 물어도
말 속에 막걸리가 있으면
막걸리 속에 말이 있으면
그것이 시다!

죽이냐 밥이냐 이런 흑백의 전쟁터
죽도 밥도 아닌 그것 그대로
그렇게 꽃 피면 안 되나


- 김승희 시 ‘동네북’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 2021.





공항에 가서 보면
인생 참 간단한 거야

Departure
Arrival

그렇게 어느 한 문을 골라
총총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각기 문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떠나는 것에는 홀림이 있고
도착하는 것에는 설렘이 있지
소리 없이 외치는 공기의 환호성
중력을 끊고 위로 이륙하는 사람과
중력을 잡고 아래로 착륙하는 사람들
온갖 일을 다 겪으며
우왕좌왕 살다가

Departure
Arrival

어느 한 문으로 총총
죽음이 두려운 것은 천국은 미리 비자를 주지 않고
가서 도착 비자를 받아야 한단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가서 도착 비자를 못 받으면
영영 환승 통로에서 빙빙 돌아야 한단다
긴 시간을 무궁의 미로 속에 처형받아야 한단다


- 김승희 시 ‘공항에 가서 보면‘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백악관의 웨스트 윙 브리핑 룸 첫째 줄
헬렌 토마스가 사랑받는 기자이길 포기하면서
진짜 기자가 되어갔던 것처럼

캔터베리 대주교가 친구인
국왕 헨리2세의 사랑을 받기를 포기하면서
진짜로 대주교가 되어갔던 것처럼

시인도 사랑받는 시인이기를 포기하면서
정말로 시인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도 사랑받는 선생님이길 포기하면서
진짜 선생님이 되어가는 것이고

개도 사랑받는 개이기를 포기하면서
진짜 개가 되어갈 수 잇는 것인데
진짜 사람도 그렇게 되어갈 수 있는가

이것저것 오만가지 진통제를 끊고
고요히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밤
베네치아의 잔짝이는 해골 가면이 쇼윈도에서 나를 쳐다본다


- 김 승희 시 ‘사랑받는 진통제‘
산문집 [어쩌면 찬란한 우울의 팡세], 문학판, 2020.




오후 세 시의 식당은
들숨과 날숨이 뒤바뀐 시간
폐에 바람이 가득찬 풍금 건반이 저절로 홀로
유령의 건반을 눌러보는 시간
의사 가운을 입은 주방 아주머니들이
하얀 빵 모자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채
식당 테이블에 나와 앉아 밥을 먹는 시간
큰 양푼에 맛있게 무친 나물을 넣고
한번 더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여러개의 김나는 팔뚝들이 들락날락하며
함께 나누어 맛인는 시간
의사가 환자가 되는 시간
환자가 의사가 되는 시간
링겔꽅은 왼팔을 흔들며 무어라 말을 하려
......ㄱ ㄴ ㄷ ㄹ...... 하던 마지막 임종의 얼굴이 스치는데
남에게 국그릇을 퍼주던 김나는 팔뚝들이
자기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가는
여인들의 맛있는 시간
이사도라 덩컨이 차를 출발시키다 스카프에 목이 졸려
죽은 나이, 마흔 아홉, 오후 3시,
혼자 앉아 점심이나 먹는 나의 시간
정신박약의 당나귀가 어흥어흥 우는 시간
주방에선 양배추 끓이는 냄새가 자욱 올라오고
양배추들이 요오드크롬을 바르며 혼자 죽는 시간
알듯 말듯한 애도의 시간
활짝 펼쳐진 절정의 부채처럼
다 펼쳐진 부재의 시간


- 김승희 시 ‘오후 세 시의 식당‘





미나리꽝을 키우는 여자다
시에 미나리,
미나리는 맑은 물이 아니면 못 살지만
사실은 구정물에 산다
거머리와 함께 자란다

미나리꽝은 차가운 물속에 있고
얼음 속에서 맨손으로 일을 하니까
팔 어깨가 다 녹는다고 한다
술에 취해야만 일할 수 있다
술이건 무엇에든 취해서 추운 물속에서 미나리를 키운다

시 한 편 또 한 편
쏘옥 쏙 미나리 한 다발만큼 향기로울까
좋은 미나리는 자랄 때도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시에도 좋은 미나리가 없으면 안 되지
솨솨 바람 스치는 소리,
시퍼렇게 세운 칼날이 없으면 안 되지


- 김승희 시 ‘ 미나리꽝 키우는 시인‘
[도미는 도마 위에서],난다, 2017.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에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 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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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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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가 도미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서
몸서리치는 눈부신 몸부림부질없는 꼬리로
도마를 한 번 탕 치고 맥없이 떨어져
보랏빛 향 그윽한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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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희 시 ‘도마가 도미 위에‘
<시인수첩> 2016, 여름호





비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떠내려가는
찻잔 속의 외로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들어앉아
저토록 질질 끌리는 독가스 같은
음악을 켜고 있나?

한 잔의 커피... 열 잔의, 스무 잔의, 삼천 잔의 커피로...촉루
처럼 반짝이는 순결한 흰 뼈에 드디어 지옥 같은 카페인이 질 때까
지... 끈질기게 마셔보는 고요한 광기의 물...친구도 없이

하나의 섬, 아니 혼자인 인간, 그리고 여러 개의 찻잔, 스무 개
의, 삼천 개의 빈 찻잔들... 그만큼의 섬들, 혹은 사람들, 만일 아
직도 외로움이 있거든 네 외로움의 손발을 잘라버려라... 아니 이
직도 그리움이 남았거든 네 그리움의 골통을 부셔버리고 그 골통의
잔해를 찻잔삼아 마지막 한 잔의 차를 마셔보거라...

비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고여가는
찻잔 속의 그리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머리를 풀고 외치며 누워있나?

누가... 나의 찻물 끓이는 풍로 속에다...
고요히 제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고 있나...


- 김승희 시 ‘ 茶神이 필 때‘
[흰 나무 아래의 즉흥], 나남, 2014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듣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이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 김승희 시 ‘가슴’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울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 김승희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시집<희망이 외롭다> 에서





1. 가슴속의 피아노

누구나 한 번은 떨어지고 싶어 한강으로 간다.
가슴에 검은 피아노 한 대를 질질 끌고
한강 다리를 취중 횡단......
야, 이 미친년(놈)아, 너 죽고 싶어?
흠뻑 쌍욕을 먹어본 적이 있다. 죽고 싶으면 저나 혼자......환장......
뒤통수에 따라오는 빛나는 쌍욕의 훈장을 끌고 강가에 서면

그런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모여 강물이 숨을 쉰다.
이렇게 많은 피아노들이 한강에 떨어졌는가,
달을 주렁주렁 매달고 미친 피아노들이 숨을 쉰다.
강물은 숨결, 숨결은 이야기, 누군가의 숨결, 산맥의 이야기,
오늘 밤에도 누군가
한강 물속에서 녹슬고 부서진 벅찬 피아노의 탄식을 듣는다.

사랑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이리랑이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알아보는 것이다,
1890년대 후반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는 네 번의 조선 여행 중에 알아보았다,
조선 백성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뿐이라고,
아리랑이 있었고 아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요
서로 가시를 내밀어 부비며 쑤시며 마구 찔렸어도
다만 흘러내리는 피가 더웠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만났을 때
모든 피아노에 흰건반과 검은건반이 있듯
생소하지 않아서, 혈연처럼 참회처럼
온갖 독극물과 피와 쥐약과 정액에 시체 방부제까지 섞인
더러운 한강 물 속으로 뛰어들다가
잠시 멈춰
네 가슴의 녹슨 피아노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듯
미친 아리랑을 피아간에 아득하게 들어주는 것이다


- 김승희 시 ‘천의 아리랑 -1‘







영혼 없는 새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새
고장난 녹음기보다 더 나쁜 새
내 영혼을 들킬까봐 남의 말 뒤로 숨는 새
세상은 그런 새를 기르기를 원한다
그런 새를 만들려고
학교를 만들었고 입시를 만들었고
사법고시를, 언론고시를 만들었다
앵무새를 길러놓으니 참 편해, 내 말을 다 해주잖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참 고마워라,
숲에서 우는 소쩍새여, 꾀꼬리여, 부엉이여,
놀라워라
제 소리로 제 슬픔을 애통하며
에레미아 선지자처럼
세세년년
남의 슬픔을 관통하는 새
앵무새는 죽어도 못 따라갈
영혼 고운
새.


- 김승희 시 ‘ 서울의 우울 9 ‘
* 희망이 외롭다




“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
  
  - 제이 파리니,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그리고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작은 마을
안전지대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세상은 항상 그런 최후들로 가득 차 있다
파손된 것들을 복구하는 방법 너머로
가을이 온다
어딘지 그런 절벽들이 푸른 포도밭 과수원 뒤에 아득하다


포도밭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피레네산맥을 백 번을 넘어도 그 너머 그 너머에도
폐허와 절벽이 가득 차 있는 가을 풍경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눈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감옥 그 너머의 감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산맥을 넘고 넘어도 산맥
산맥 그 너머의 산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우리는 그런 것을 감옥이라고 부른다
희망의 연옥이라고


- 김 승희 시 ‘ 희망의 연옥‘
* 희망이 외롭다







어떻게든 세상은 쳐들어온다.

제목만 길고 내용은 없는 시처럼

세상이 다 나를 살아주고
나는 종속절처럼 점령된 몇 마디 말을
그저 덧붓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녹즙기의 스위치ON이 눌러져
혼비백산의 회전이 상당히 진행되어온 것이다.

어디에 가서 이 생을 구하리오.
삭발처럼 이 세상을 잘라내버리고
어디네 가서 피랍의 문을 어떻게 쳐부수리오?


-김 승희 ‘창문을 닫고 브라인드를 내리고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누워봐도‘
[시인박물관], 현암사, 2005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에 연이 뜨면
내 소식인 줄 알아,
어떤 바람 부는 날
휘날리는 언덕에 휘날리는 연이
펄-

훨- 훨-
할 말은 있는데
할 말은 잊은 채
신열이 끓어
신열이 끓어
그것은 나,
내 마음일 줄 알아,
벗지 못한 치마가
벗지 못한 가슴이
그렇게 펄- 펄-
연은 그런 것
훨- 훨-
펄- 펄-
그렇게 앓는 것


- 김승희 시 ’연鳶 ‘





空과 虛 사이, 무지개처럼 그네가 걸려 있습니다, 불에서 방금 구워낸 연분홍 이브과菓子처럼 마을의 새벽은 옹기종기 그럴듯하게 어여쁘지마는, 예쁩니다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슬을 깨뜨리며 식욕을 잃은 우리의 엿장수 아저씨가 녹슨 가위 속으로 시간을 재깍거리며 재깍재깍 누군가의 임종의 시간을 거두려고 지나갑니다, 지나갑니다, 싱싱한 야채의 밝은 무릎 속으로 붕대처럼 햇빛으로 부은 발을 싸맨 채, 모든 새벽의 상류에서부터 한 황혼의 하류에 닿을 때까지. 지나갑니다, 농담처럼 시시하게. 지나갑니다, 약속처럼 성스럽게

空과 虛 사이 그네를 밀며, 虛에서 空으로 되돌아 오며 우린 야비한 후회와 덧없는 전진 사이 움직입니다, 열렬하게, 솟구칩니다, 벅찬 파도처럼, 그리고 흔들립니다, 오락가락, 오락가락의 역사는 너무 길고 영원히 바다와 함게 오래 길어서 우리의 슬픈 눈은 밀물보다먼저 썰물을 보는 법을 익혔던 것입니다, 괴혈병이 오락가락, 재깍재깍 괴혈병이 엿장수 아저씨의 녹슨 가위소리를 따라 우리의 그네줄을 빠져나갑니다
빠져 나갑니다, 모욕처럼 은밀하게. 빠져 나갑니다, 학살처럼 고요하게


- 김승희 시 ‘그네 위에 앉은 채로‘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온통 벌거숭이로 피를 칠하고 있을 때
난 알 것 같았어,
왜 별이 아름다운지를,
난 알 것 같았어,
만일 구름의 너울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태양을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를,

밤에 마지막 외침처럼 황량한 마음으로
지붕 위에 서 있으면
먼 데 있는 사람아, 말하려무나
내가 평화처럼 혹은 구원처럼
금빛이더라고,
신비한 금선이 아득히 흘러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꿈꾸게 되는지를,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울부짖는 하나의 욕설처럼 추악해질 때
난 알고 말았어,
별과 神은 왜 그토록 멀리 있어야 하는지를,
모든 성당의 창문에는
왜 천연색의 색유리가 끼여 있는지를,

오늘 내가 여기 천벌의 화형으로
지새우는 불이
어디엔가 먼 사람에겐-
아마도 위안처럼 정다우리니
생각해 보아,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별은,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왜 우리에겐 그토록 간격의 탐닉이
필요한 것인가를



- 김승희 시 ‘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민음사, 2002.





미안하지만
난 실용의 시대에 배덕자,
풍자를 선택한 순간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건 비밀이지만
접시 물에 빠져 죽는 파리처럼
시대를 선택하면 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사방에서 다가왔던 것이다,

오선지 위에 마술피리처럼 미끄러지며 날아가는 모차르트의 손가락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혁명인 것이다.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후궁에서의 도주......
파...... 파...... 파...... 파파게니,
파...... 파...... 파...... 파파게노......
도무지 그런 것들은 실용을 비웃는다, 웃는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이 여자를 사랑해요......

모차르트의 눈물 묻은 편지는 실용을 넘어선다,
실용을 넘어서면 운명이 나온다,
모차르트족은 그렇게 실용을 넘어 운명을 보여준다,
육신 묻을 땅 한 평 없어
빈민들의 시체와 함께 공동 구덩이에 던져졌다


- 김승희 시 ‘모차르트의 엉덩이 2‘
<문학사상>(2009. 2) : [2010오늘의 좋은 시],푸른사상, 2010.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웠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 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 김승희 시 ‘하나를 위하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김승희 시 ‘ 솟구쳐 오르기 2‘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하늘은 넓고 갈 길은 막막한데
이토록 자잘한 근심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여
무엇으로 밤을 마감할 수 있을까요
근심이야말로 분명한 행선지
삶의 공허 앞에 비석처럼 세워진
확실하고도 고마운 하나씩의 이정표

세상은 광막하고 시대는 혼란스러온데
나에겐 자잘한 근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취직걱정 건강걱정 자식걱정에 반찬걱정
주택부금 상호부금 월부책값에 세금걱정
연탄가스 주의보와 동파된 하수구 걱정,
시어머님 생활비와 친정아버지의 병원비와

이 조그만 근심들이 있어서
난 우주가 막막하게 텅빈 낯선 것이 아니고
쌀독처럼 친숙한 것이며,
밑도 끝도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라
한없이 체온으로 정든
내 헌옷 샅은 생각이 들어요,
근심이야말로 정다운 여인숙
그것조차 없다면 삶은 정말 매달릴
것이 없는 백골산의 단애와 같아요

작고 미소한 근심들이여
너는 위대합니다,
너야말로 나를 삶에 꼭 매달리게 하는
지푸라기며,
허무의 양손이 우리 상처의 아가리를 끔찍하고도 냉혹하게
옆으로 찢어벌려
그 속으로 죽음 같은 극약을 부어넣으려고 할 때
넌 작지만 완강한 손끝으로
상처의 벌어진 틈을 재빨리 오무려주는
전천후의 자동단추와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린 잽싸게 그 싶은 허무 속의
막막한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일심으로 근심에만 집착하면서
다시 살 길을 재촉합니다,
25시도 지난 지금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을 잊어버리도록
더 많고 자잘한 근심들을 주소서,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하여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하여


- 김승희 시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사랑한다는 것
미워한다는 것
같이 살자는 것
같이 죽자는 것

손금이요
지문이다
같이 사는 동안
손금과 지문이 닮아졌네

배와 배가 만나야만 잉걸불이 탈 수 있는
배밀이 불새


- 김승희 ‘여보’




-뉴욕의 희규에게


[결혼한 지 일 년이 되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
미혼의 세계는 FM 같고
기혼의 세계는 AM 같고
언니는 지금도 FM 방송을 더 많이 듣지? ]

AIR MAIL 봉투를 뜯고
뉴욕 맨하튼에서 온 희규의 절망을 듣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실을 말해 버릴까, 사실을
말해버릴 수 있을까, 난......
도무지 FM도 AM도 들을 시간이 없고
(나의 뇌에는 음악을 위한 자리도 상식을 위한
자리도 없기는 없다마는)
그보다도, 난, 스스로 AM 방송국이 되어
하루종일 상투적인 전파를 송신하고
퍼뜨리는 너절한 주부생활 방송국 국장이 되어

그런데. 희규에게.
[결혼한 여자라고 해서 FM을 안 듣는다는 건
잘못 유포된 미신이야. 결혼한 여자는 AM의 세게에만
머물렀으면 하는 건, 남자중심주의가 만든
민속신앙이야. 이상하지, 우리의 속신은 남자를 위해,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더 많은데
여자들이 더 열렬하게 옹호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난 마음의 지하실에 무수한 FM방송국을 세우고
또 허물어. 물론 낮에는 AM방송국에 근무하지.
다만 왼손과 오른손의 세게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고
싶진 않아서.]

우리 집 마당귀에 서 있는 라일락 한 그루.
구름처럼 퍼져가는 보라빛 향기.
저 불쌍한 땅을 데리고
향기의 초현실을 만드는 그녀를 닮기 위해
결혼의 세게엔 때로 살륙과 뼈가 튀었다.


- 김승희 시 ‘ 결혼의 세계‘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렇게 神氣신기가 오릅니까?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토록 검은 질료에서 주황빛 신이 불려 나옵니까?

옛날부터 늘 그래 왔습니까?

목숨을 지나서도 타오르는
무슨 한 덩어리 불이 있겠습니까?

너무 모욕받았는데 너무 큰 모욕이 내려왔는데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괴로운데 이렇게 괴로워도
토막난 늑대의 이글거리는 횃불처럼
뭉쳐서 뭉쳐서 화려하게 꿈을 꿔도 되겠습니까?


- 김승희 시 ‘ 아네모네 꽃이 핀 날 부터 .1‘





오선지의 악보는 굳어버린 듯하였다.
저공비행의 헬기 위에서
화염방사기로 하얀 폭양을
무차별 난사하고 있는 듯한
여름날 오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그 불안한 [시]에 걸려
아무것도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노점상 아줌마는 구루마 위에
화덕 두 개를 올려놓고
하얀 김이 펄펄 날리는 옥수수를
찌고 있었다.
한 화덕 위에선 홍합조개 국물을 끓이는
흰 수증기가 부들부들 떨면서
아줌마의 얼굴과 목을 마구 조이고 있었다.

사람마다 자기 아우슈비츠를 갖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지,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양계장의 닭들이 삼천 마리나 떼죽음을
당하던 시간,
사천 마리의 돼지떼들이 폭염 때문에
한꺼번에 몰살 당하던 시간,
대체 저 여인은 누구를 사랑하기에
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화덕을 두 개나 껴안고도
지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생물이
될 수 있었을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그 뜨거운 [시]에 걸려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화덕을 껴안은 그녀의 사랑은
그 불안한 [시]의 목울대를 성큼
뛰어 넘어
니그로의 멜로디처럼
니그로의 멜로디처럼
푸른 옷소매의 높은 生의 옥타브를
푸르게 푸르게 탄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 김승희 시 ‘진주 기르기 2‘





가슴이 뻥 뚫린
도우넛들이
환한 상점의 쇼윈도우 앞에
앉아 있다.
심장이 뭉개진 너.
심장이 도려내진 너.
고통의 가장자리만 남아
그 사이로 한없이 조용하게 나를 바라보는
앙상한 너.

나는 말이야,
성냥갑에 누운 성냥알들이
나에게 쳐들어올까봐
성냥갑을 제대로 열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실험증에 빠진 것 같기도 해,
날개가 떨어진 파리는
얼마동안 붕붕거리는가,
붕붕거리다가 날아 보려고 맴도는가,
아니면 날아 보려는 생각 없이
맴돌기만 하는가,
붕붕거림은 언제 으르렁거림으로
바뀌는가,
혹시 머무름과 함께
제자리 걸음으로 맴돌면서
행여라도 전진하는 것은 없는가,
언제 우울증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격한 정신이상으로
발전하는가 등등......

도우넛 가게의 유리창 안에서
혼자, 조용히, 심장이 도려진.
우주적 심장절개의
무한대의 깊은 나락의
투명한 구멍.
생의 한가운데는 어디 있는가?
그런 질문은 좀 앳된 것 같다.
우리는 단지 조용히
고통의 가장자리만을
지뢰 검사반처럼
조심스레 맴돌며 돌고 있을 뿐.



- 김승희 시 ‘생의 가장자리‘
[1991년도 소월문학상 수상작품집]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아래 휘여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잇는 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말이야, 꼭 미친 듯이 뛰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어.

그래서 난 새해 같은 것이 오면
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서서
자신을 봐야 하니까.
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
갑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

[쓰러질 것 같아요]
[용기를 내]
[아직도 멀었으니까?......]
쓰러질 것 같아서
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 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다,
자신의 보리수 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 김승희 시 ‘ 보리수 나무 아래로‘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불행한 마차가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너는 나와 함께 금색 태양을 위한
   추운 싸움의 길 떠나야 한다.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암초 때문에 더욱더 빛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의 다른 조명등들을
   아낌없이 모두 꺼벼려야 한다.

   숲들은 슬픈 안개에 아주 덮여 있었다.
   비가 내리고 고요한 산정.
   하늘 속에선 새들이
   그들의 고독한 장난을 다시 시작하고
   바람이 불었다.

   그때 나는 꿈꾸었다, 너와 함께,
   그리고나서 우리의 발걸음은
   지상의 지평선을 모두 잊어버리었다.

   온갖 무장한 죽음이 나를 기다릴지라도
   너 몰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싸움이 용감하였다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죽음의 검은 도화지 위에
   금칠한 천사를 그리겠다,
   너의 얼굴과.
                

- 김승희 시 ‘사랑을 위한 노래‘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지

밥도 먹고
시내도 나가고
싫은 사람 만나서 히히호호 떠들다가
먼지 같은 그 소음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차도 나누고
거짓말도 나누고
아아 그러나 그리운 사람
끝끝내 못 만나고
그리운 일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하루

오만한 클레오파트라가 식초물통 속에
잔인하게 진주 귀걸이을 풀어 담굴 때
진주 귀걸이는 거품 하나
남기지 못하고
녹아서 사라져 버렸지,
그렇듯이
가로수 그림자들
어둠 속에 말없이 용해되고 있을 때

막차에서 내린
조그만 한 사람이
길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말없이 풍선껌 한통을 집어드는
무렵

수은등 등갓에 고운 얼굴 파묻고
창백하게 죽어있는
지천명을 보는가,
외로운 담배연기 허공 속에
목도리처럼 희게 풀어지고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 사이
오늘이란
참 어슬픈 허구가 있으니

하루는 길어도
인생은 짧고


- 김승희 시 ‘하루살이‘
[미완성을 위한 연가]





인연은 재앙이니라-
내가 너무 배가 고파
어두움 속에
달덩이 같이 삭발한 그리움을
하나 걸어두었더니
꿈인듯 생시인듯
이상한 향기나는 白馬백마가 날아와
내가 하늘을 타고 갔느니라-
오색구름 속에 황금궤가 홀연히
걸려 있는데
너무 곱고 너무 신령하여
내가 그만 외상으로 너희들을
사오고 말았더니라-

인연은 재앙이니라-
뭉게뭉게 퍼져가는 암세포처럼
시시각각 외상값은 계속 불어나
강아지같이 불쌍한 내 새끼들아,
너희가 갚아야 하느니라,
멧돌을 목에 걸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광견병 든 개처럼 맞아서 죽더라도
잔인한 것은 내가 아니다
흡혈귀는-나는-아니다

고문처럼 질긴
철천지의 사랑-
이 무슨 원한의 달콤한
피냄새-나는-
아니다-내 착한 새끼들아
사랑은 우환이니라-
인연은 우환이니라-


- 김승희 시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주신 말‘
[왼손을 위한 협주곡]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
다면,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 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 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가는 그대
여, 그대여,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생일날의 흉터,
고아들의 패찰,
인광을 칠한 백골의 주황색 입술이
아삭아삭 제일 먼저 뜯어먹는
온순한 육체의 이삭,
우리는 배꼽 위에서 너무나 평등하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버리지
만 않았다며는, 나 그대를 열렬히 용서하겠습니다. 봄이
되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거나
푸드득---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습진
처럼 나의 배꼽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배꼽
은 과거 완료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나의 삶
속에 움터 오르고, 어머니--- 아, 어머니--- 라고 불러보
면 바닷가를 울면서 걸어가는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그
녀의 슬픔 그녀의 사랑 그녀의 절망을 따라 나의 배꼽은
또 하염없이 시원의 태 속으로 적셔 들어가고, 어머니---
자비와 자주의 비밀 계좌인 어머니--- 나의 어머니시
여......



- 김승희 시 ‘ 배꼽을 위한 연가 1‘
* 왼손을 위한 협주곡 / 민음사, 2002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터지자마자
  TV들은 모조리 전쟁생방송 체제로
  돌입하였다.
  올림픽보다도 세계 권투 헤비급 타이틀
  매치보다도
  더 많은 시청률을 올려주며
  시청자들은 사막 위 폭풍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시가 공습에 대해 한 기자는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일백 배 확대한 것 같다>
  고 말했고,
  미 ABC TV의 앵커맨 피터 제닝스는
  <이것은 멋대로 진행되는 쇼>라고
  토를 달았다.
  한국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는
  <막상 전쟁이 터지고나니 후련합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인지
  주가가 폭동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라면서 투자자들은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것 같았다. (1991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중에서)

  엄청난 인명의 살상이라는
  대학살의 느낌은 없고
  불꽃놀이 생방송과 주가의 폭등과
  앵커맨이 영웅이 되는
  찬란한 쇼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딱 두 번 보았다.
  방독 마스크를 쓴 엄마가
  우주인 같은 모습으로
  병원의 비닐보호막 속에 누워 있는 환자 아기를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다.
  슬퍼하는 여인과 아픈 아기의 눈동자는
  서로 부딪치며 이런 최후의 암호를
  주고받는 듯했다.
  --인간은 이제 이 세계의 중심명제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호모 사피엔스 여러분?

  그리고 쇼핑을 하려고 세계각국의
  백화점마다 슈퍼마켓마다 벼룩시장마다
  현찰을 든 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비싸게 팔리고자 하는 욕망과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헐리우드 쇼보다 더 재미있는 쇼는
  시시각각 진행되고
  비닐 위에 사진 실크스크린 된 것 같은
  인간의 형체 비슷한 몽그러진 모습들이
  이리저리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욕망의 질주로 부윰하게 떠오르고 있는
  몽중보행이여.



- 김승희 시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시집/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가시오
서시오
대기하시오
일단 멈춤
우회
직진
비보호 좌회전
U턴
U턴 금지

口 속에서 사는 囚
口 속에서 쉬는 숨


- 김승희 시 ‘법 아래서‘
* 냄비는 둥둥





“웃음이란 상징적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씨앗 중의 하나 ---  보들레르



바보 산수
정자에서 네 팔을 벌리고 낮잠을 즐기는
바보 산수
빨래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동네 영감이 있는
바보 산수
엿장수를 반기는 즐거운 아이들이 웃는
바보 산수

중력의 악마를 뿌리 채 뽑아내려는 듯
질질 끌고 가다가
휘두른 듯이 내려친 자루 걸레
그 봉 걸레에 먹을 듬뿍 찍어
병풍 위로 질질 끌고 다니며
불굴의 한 획으로
웃고 달려가는
잇달아 파고들며 웃고 달려가는
달아날수록 웃고 덤벼드는 뭉클뭉클한 천千의 산맥을
그린
걸레 수묵

후려치는 봉 걸레
빗자루를 타고 달려가는
웃는 웃음
그 웃음의 산맥을 타고 달려가는
꿈틀대는 웃는 웃음
그 웃음
빗자루가 휘갈기는 그 웃음
바보 웃음


- 김승희 시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민음사, 2000





나대로 살고 싶다
나대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구나


- 김승희 시 ‘꿈과 상처’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황혼이면
밥상을 부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던
한 여류작가가
생각나지,
언제부턴가 하루하루란 사는 것이 아니었고
힘껏 견뎌야만 하는
무엇이었지

푸른 목숨의 그리움
있는 대로 선혈처럼 다 배어나오는
저 미친 하늘
일그러진 얼굴을 원흉처럼 거느린 채

치마폭일랑은 치렁치렁
난파의 깃발처럼 펄럭이며
아아, 머리칼은 욱조아 묵은 채로
그대로 두고 말까
괴물의 마수처럼 훨훨 이글거리며
제 슬픔의 또아리를
힘껏 틀고 있으라고,

밤은 모르는 남자로부터 매일 오는
연서처럼
상냥하고도 은밀한 것,
두근거리며 드럼, 드럼, 드럼,
위험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인

나는
더 이상 산이 안보이는
그런 산 위에 서 있고 싶다.

가라, 가서
루마니아 폴카를
피가 절이도록 루마니아 폴카를
추며 잊으며 돌아오지 말까,
음악이 공범이 될 때까지
춤이 정사가 될때까지

나는 더 이상
절벽이 안 보이는 그런 절벽 위에
춤추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래 서 있었다,
춤을 추지는 않고
별빛이 내내 뼈에 시릴 때까지-


- 김승희 시 ‘황혼이면‘
[미완성을 위한 연가 / 나남]








오늘도 밥을 먹습니다.
빈곤한 밥상이긴 하지만
하루 세끼를.
오늘도 잠을 잤습니다.
지렁이처럼 게으른
하루 온종일의 잠을.
그리고 사랑도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식은 숭늉처럼 미지근해져 버린
그런 서운한
사랑을.

인생이
삶이
사랑이
이렇게 서운하게 달아나는 것이
못내 쓸쓸해져서
치약튜브를 마지막까지 힘껏 짜서
이빨을 닦아보고
그리고 목욕탕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봅니다.

자신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참을 수 없이 허전한
가을 사랑
하나로.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원의 색인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의 제목을 찾아
절망의 목차를 한장 한장
넘겨보아야

따름이
아닌가요


- 김승희 시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달걀속의 生 / 문학사상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 시 ‘죽도록 사랑해서‘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藝術의 말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現代의 이마를 바로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 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피리를 깍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銀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江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現代의 고장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罪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罪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 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과육이
왠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江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江은 깊이 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싺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 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江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 아래엔 강이 흐르고
금새 금새
환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江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 김승희 시 ‘그림 속의 물‘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김승희 시 ‘칼로 사과를 먹다‘
*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 문학과지성사
*남자들은 모른다 / 김승희 / 마음산책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 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물음표,

뒤주 안에 갇힌 왕자가
어둠 속에 날아다니는 들불 도깨비불에
홀려
퍼얼펄 옷을 찢어버릴 때의
피의 급류처럼
때때로 내 몸속으로도 그런 광기 젖은
물음표의 급류들이 뚫고
지나가느니---

신령님이 세상과 하늘에 대해
가장 붉은 글을 적으실 때에
흰 뼈
내 두개골의 가장 무심한 흰 뼈를
그의 연필심으로 바치고 싶었었지,
그리고 나머지 나의 몸은
강물 어느 모든 강물 위에 누워
말없음표처럼
평화를 사랑하리라고......

나는 하나의 초라한 물음표,
신의 나라에는, 물음표 가진 문장이
필요없다 하여서,
나는 하나의
더디 지워지는...... 울음표......


- 김승희 시 ‘신의 연습장 위에‘
* 왼손을 위한 협주곡 / 민음사, 2002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 김승희 시 ‘시계풀의 편지4‘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 김승희 시 ‘객석에 앉은 여자‘





냉장고 문을 열면 달걀 한 줄이
온순히 꽂혀 있지.
차고 희고 순결한 것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난 그것들을 쉽게 먹을 순 없을 것 같애

교외선을 타고 갈곳없이 방황하던 무렵,
어느 시골 국민학교 앞에서
초라한 행상아줌마가 팔고 있던
수십 마리의 그 노란 병아리들,
마분지곽 속에서 바글바글 끓다가
마분지곽 위로 보글보글 기어오르던
그런 노란 것들이
(생명의 중심은 그렇게 따스한 것)
살아서 즐겁다고 꼬물거리던 모습이
살아서 불행하다고 늘상 암송하고 있던
나의 눈에 문득 눈물처럼 다가와 고이고

그렇다면 나는 여태 부화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을까,
아아, 얼마나 슬픈가,
차가운 냉장칸 맨 윗줄에서
달걀껍질 속의 흰자위와 노른자위는
무슨 꿈들을 꾸고 있을까,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실에서
입원비 걱정을 하고 있는 우리 가난한 형제들처럼
흰자위와 노른자위도
무슨 그런 절망의 의논들을 하고 있을 것인가

사계절 전천후 냉장고
하얀 문을 조용히 열면
추운 달걀들의 속삭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엄마 엄마 안아줘요 따스한 품속에
어미닭에 안기지 못하고 만 달걀들처럼
희망소비자 가격보다 더 싸게 팔려온
너희들처럼
나도 역시 여권이 분실된 사람
희망의 온도가 차츰 내려갈 때
오히려 절망은 조용하고 초연해지는 것 같지,


- 김승희 시 ‘달걀 속의 生.2‘





어느날
새들의 임금님이
우리의 땅에 내려왔다.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누가 이카루스인가.
모두들 한번 날아보아라」
태양 가까이 날아
날개가 불태워져버린 아이에게만
불멸의 날개를 주겠다.
납이 아니고
뼈와 뼈의 날개,
녹을 수 없고 썩지도 않는 날개.

그러나 지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아이가 귀가 있어
그것을 듣겠으며
어느 날개가 천재가 있어
태양까지 날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이카루스만이 영원하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者는
이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 지금은
시인도 청년도
사슴도 독수리도 아무도 날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아무도 날지 않는 것을
그른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하늘 속에서 태양은 아름답고
태양 속에서 생명은 불타지만
그러나 이카루스,
이카루스는 잠을 자네.
파도와 회색바위 위에서
이카루스,
모든 이카루스는 아무도 잠깨지 않네.
아무도.


- 김승희 시 ‘이카루스의 잠‘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이 가혹하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신발을 신고 나설 때마다 난 어떤 본능을 다치는
것만 같아, 골절, 뼈 뼈 뼈가 어긋 물린 것 같고 어떤 때는
도에 지나쳐 피 피 피가
길 위에 흘러내려 나의 길을 모가지로 감고 엉겨 저지하는 것 같아,
신발에서 길을 갈라내지 못하면
미친 듯이 신발의 길에 먹힐지도 모른다
신발에서 발을 추려내지 못하면
어쩌면 신발에서 발목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또 신발의 중독에서 깨어난 발
발가죽의 중독에서 깨어난 뼈들조차
더 시끄러운 이 내란의 길목에 서서

꿈이여, 잠시 잠시만 더, 그래도, 이 가죽 부대 같은 신발 안에
뭉쳐 있지 않겠니? 신발을 들고 날아가는 저 눈부신 태고의 날개가
하얀 자갈밭에서 알을 깨치고 날아가는
태양빛의 뜨거운 새처럼
고요히 중심의 원시 신화 속으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나의 발은 아직 할 일이 많고
나의 발은 아직 더 가고 싶은 길이 있단다

그리하여 엘칸토 금강 에스콰이어 비제바노 브랑누아를 넘어
레스모아 미스미스터 엘레강스 허쉬파피 랜드로바를 지나
갔습니다
구두 대(大) 바겐에 가면 나에게 맞는 신발을 어쩌면 구할 수 있으리라
모두 신발이 뼈에 마치고 근육은 구두에 대들고
발톱은 구두 가죽을 찢고 한 발 가득 무성한 털은
솟구쳐 나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범주를 벗어난 모래와 엉긴 피가
나의 신발 너머 길 가득 수북이 넘치고 있으니
모든 신발이 수상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은 천적이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 김승희 시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역촌동 →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 버스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 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 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 김승희 시 ‘길이 없는 길 위에서‘





자유로는 이제 호텔이 되었다
자유로에서 자유는 이렇게도 많이 밀리고 있다.
싱싱한 브로콜리 같은 아침의 얼굴이여
누가 이 아침의 얼굴을 식물인간으로 눌러 놓았나
자유로에서 밀리는 것은 정말 자유만이 아니다

때묻은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가슴에 안고
아가야, 아가야, 젖 줄까, 베개를 토닥이며 돌아다니던
그 미친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붉은 그리움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움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움이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을 때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미칠 수 있을 것 같

미치거나 식물인간이 되어서 반쯤 졸거나 반쯤 자는 길.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그랫으리라. 깃발은 들었고
자유는 밀리고. 황토재 떠나 황룡촌 지나
첩첩 그리움은 막혀가고. 보은 지나 금강이여.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도 어려웠으리라
자유로에 점점 떨어진 푸른 알들이여
녹두 꽃잎들이여......

호텔 자유로. 인디언 담요에 몸을 두르고
김밥과 샌드우위치를 찬합에 놓고 먹으며
그렇게도 싫어했던 실려가는 삶에 대해
실려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밀려 있는 자유에 대해
밀려 가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또다시 언젠가 피어날 녹두꽃에 대해
피기도 전에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동자에 대해......



- 김승희 시 ‘호텔 자유로‘
*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우린 명동성당이 있는
종합병원
지하에 있는
X레이 촬영실에서 만났지,
한 남자가 나보다 먼저 온
한 남자가
차가운 금속촬영판에다
흉곽을 대고
저멀리 병실 밖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지,
희랍의 책을 읽는 학자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대의 눈동자엔 그래도
멀리 있는 천문을 관측하는
냉담한 우수가
조용하고 초연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난 문득 토성의 하얀 띠를 연상하엿다네,

난 웃옷을 벗고
차디찬 금속촬영판에 가슴을 댔지,
방금 나보다 먼저 온
한 남자가 가슴을 댔던
그 흉곽촬영판은언뜻 남자의 온도로
따스해진 것 같기도 했고,
난 뒷짐을 지고 금속판에 몸을 붙인 채
내 가슴 속의 병든 지도를
자조적으로 힘껏 상상해 보았지,

양귀비 벌판이었을거야, 아마,
낙조의 양귀비 꽃밭에선
벌레먹은 꽃잎파리들이
쾌락처럼 도도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 절망은
외설스럽게 보여지고 있었어,
야한 화장을 한 한 미녀의 시체처럼
나의 절망은 음란해 보였고
음란의 관점에서 그 절망은
쓸모없고 값싸고 방자한 것이었지,

나에게선 짐승가죽 냄새가 나고 있었고
내 긴 머리칼은
그 당시
마녀성으로 야광을 칠한 것 같았지,
X레이 흉곽사진을 찍고
그대와 나는 우연히 아니
자연히
지하의 복도를 나란히 걸어나오게 되었지
병원의 지하실에선
아기 울음소리와 떠도는 노환의 신음소리가
축축한 태고처럼 배어 있었고
누가 우는 것인지
누가 아픈 것인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 하여도
우린 한 송이 꽃을 볼 때처럼
그냥 이해하였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지하의 회랑을 돌아나올 때
우린 함께 미소를 나누었지,
투명 유리병 속에 진열된
Urine Collection
환자들의 오줌이 담긴 투명용기들이
줄줄이 회랑의 벽감 속에
진열돼 있었기에
우린 함께 쓸쓸히 웃었지
오줌 콜렉션 유리병이
나에겐 삶보다 신비해 보였던 때였어
그대여, 그대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대여
우리가 지하병동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막 성당의 저녁종이 울리고 있었지,
가을 석양빛의 쓸쓸함 속에
황망한 비둘기들이 색칠한 화환처럼 환히
솟구쳐 오르고
흐린 하늘 속에도 아직 빛이 남아
난 창세기처럼 새롭게
지상의 잔광에 잔긴 아름다움을
쓸쓸히 새로 바라보았지,
그대여,그대와 함께, 창세기를
지상의 첫여자와 첫남자처럼

그리하여 삶은 나에게
타국의 계단으로 가는 이방의
길처럼 펼쳐졌고
난 그대 눈동자 속에 잠긴
천문의 향기처럼 낯설고 이상한
우수라는 거주지를 알게 되었네,
방자한 젊음의 불꽃이 지나간 폐허
그 폐허의 슬픔을 오래오래 여과시키면
결국 토성의 띠처럼
신비한 숙명의 우수가 남는 것이라고

그대와 내가 서로 사랑함은 가을 문풍지에 서로 스치우는
바람소리와 바람 살결과 같이 쓸쓸한 것일지라도
끝에서 시작된 시작에 끝이 있을까
가을보다 늦게 온 시각에 무슨 가을을 이 다시 있을까,


- 김승희 시 ‘가을 결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기 젖꼭지를 먹으며 산다네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자기 젖꼭지를 찾으러 간다네

자기 젖꼭지
자기 젖꼭지

처처에 굶주린 입술들 날아다녀
말미잘 흡반들 같은
굶주린 입술들 처처허공 날아다녀

젖꼭지 찾으러
삼천리를 다녀도

사람은 무엇을 찾지 못하네
사람은 배고픔을 구하지 못하네

자기 젖꼭지
자기 젖꼭지

인생은 자기 배꼽에서 비롯하여
자기 젖꼭지로 가는
배고픈 울음 미로의 탐색

아마도 이 우주의 저 너머
지상에 내 껍질을
다 떨어뜨려버리는 날까지



- 김슬희 시 ‘자기 젖꼭지‘
시집<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1995





나는 조용히 골방 속에 앉아 있다,
한 사람만 수용된
우주의 고아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힘겹고 쓸쓸하고,
인생이란 오직
내 방문 밖에만 있는 듯
아무래도 조만간 옥사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조용히 벽을 바라본다,
벽 위엔 오죽하면
못 하나 박혀있지 않다,
내 호주머니 속엔 오죽하면
끈 하나 들어있지 않다,
끈도 없고
못도 없다면
그렇군, 밀교신도처럼, 오직 나에겐
자가발전 밖에 남은 것이 없어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쓰러지면
부드러운 무슨 막이 나를 받안아주는 것만 같다,
계란껍질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노른자위처럼
누군가 나를 포태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겐듯 어머니,어머니, 부르면서
부드러운 양수막을
손길로 만져보면
모든 육체가 잿빛 눈동자로 되어있다는
아아 그선 슬픔이라는
어머니,
슬픔이 나를 임신하고 있으니

나는 슬픔과 단둘이
오손도손 소꼽놀이를 시작한다,
슬픔에게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아가와 엄마가 병원놀이를 하듯이
침대에 엎드린 시늉으로 아프다고
울고 있으면
어머니는 하얀 붕대와 청진기를 가지고 와
의사시늉으로 도란도란 놀아준다,
어디가 아픈가요? 어디가요?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약을 준다,
마늘과 쑥을
백일 동안만 복용하라고

나는 조용히 그렇게 견디고 있다,
나 혼자만 수용된
우주의 보육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무섭고 쓸쓸하지만
봉제공장의 여직공처럼
난 그렇게 숨어서
성불하고 싶다,

슬픔의 어머니가 날 임신하였으니
마늘과 쑥을 항용 먹고 있으니


- 김승희 시 ‘슬픔과 놀며‘





가을이면
가을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자
내 기억의 수첩 속엔
봄에 죽은 사람도
여름에 죽은 사람도
겨울에 죽은 사람도
있지만
가을이면 가을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자 가을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가을이 남으면
가을이 남으면
가을에 헤어진 사람들을 아파하자
내 아픔의 수첩 속엔
봄에 헤어진 사람도
여름에 헤어진 사람도
겨울에 헤어진 사람도
있지만
가을이면 가을엔 헤어진 사람을
아파하자 가을이기 때문에
그리고도 또 가을이 남으면
가을엔
가을에 그리워했던 사람을 그리워하자
내 그리움의 수첩 속엔
봄에 그리운 사람도
여름에 그리운 사람도
겨울에 그리운 사람도
있지만
가을이면 가을에 그리워했던 사람을
그리워하자 가을이기 때문에

가을은
회색 벌판에서 올리는
추억의 거대한
봉화,
차가운 향기 속에 따스한 연기
맴돌아
투명한 냉기 속에 따스한 인간의
온기 한 점
남기는
잿빛 회색의 쓸쓸한 추상화

가을이면
가을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자
내 사랑의 수첩 속엔
봄을 사는 사람도
여름을 사는 사람도
겨울에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가을이면 가을속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다 축복해 주자 가을은 모두가 문득
추운 계절이기 때문에



- 김승희 시 ‘연미사‘
시집:미완성을 위한 연가/나남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소복소복 흰 종이 위에
넋을 묻고 울어야 합니다.

황혼이 무서운 곡조로
저벅저벅 자살미사를 집전하는
우리의 불길한 도회의 지붕 밑을 지나
나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면죄부를 잔뜩 사는
탐욕스런 노파처럼
나는 흰 노트를 무섭도록 많이 삽니다.

간호부-수녀-어머니-
흰 노트는 피에 젖은 나의 정수리를
자기의 가슴으로 자애롭게 껴안고
하얀 붕대로 환부를 감아주듯
조심조심 물어봅니다.
고독이 두렵지 않다면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고통스러운가 라고.

세상에는 너무나 무능하여
성스럽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능한 순정으로
무능한 순정으로
흰 노트는 나를 위해
정말 몸을 바칩니다.

외로운 날엔
흰 노트를 사러 갑니다.
미칠 듯한 순정으로
미칠 듯한 순정으로
또박또박 흰 종이 위에
나는 또 내 슬픔의 새끼들을 수북히 낳아야 합니다.


- 김승희 시 ‘흰 노트를 사러 가며‘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내가 죽어 있을 동안이라도
더욱더욱 자라야 한다고,
환상이란 상심이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이라도
몰래몰래 자라야 한다고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묻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도괴된 복도 속에 통조림 깡통이 하나 파묻혀 있다,
미를 헤치고 통조림 깡통을 들여다보면 인스턴트
평화라고 뚜껑에 대문자로 적히어 있다,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나,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 된 너,
평화는 불사신과 같이 방부처리되어 있어서 당신이 통
조림 깡통을 땄을 때는 화두처럼 목 없는 닭 한 마리
평화롭게 온 세상 그지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으니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환상이란천벌 같은 거지만
화분 속에는 사막식물이라는
선인장 화초가 심겨져 있고
화초인지 아닌지
그 선인장은 백년 동안에 한 번만
꽃피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
선인장 몸 위엔
갈퀴쇠 같은 물음표만 녹색으로 가시 돋쳐
왜? 왜? 왜? 라고
눈동자를 찌를 듯이 거울면으로
육박한다,


난수표 같은 절망은 자금회전이 안 됩니다,이곳에선
희망만이 현금유통되고 있어요, 희망을 환불하려고 거
울창구 앞으로 다가서면 희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돈푼인지, 거대한 절망의 허물 수 없는 어음에 비한
다면 희망이란 얼마나 소소한 푼돈인지,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물을 준다, 이 생에선 그 꽃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주고, 절망에 죽
음을 보탠 그 몸짓으로밖에 나는 그 선인장 꽃을 가꿀
줄을 모르니


- 김승희 시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직, 얼굴 위에서
미처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일방적인 해고통고와도 같이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 아, 안녕......하고
말을 맺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다,
우린 좀더 사랑했어야 하고
우린 좀더 진지한 고통을
나누어야 했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우린 좀더 불을 통과하는 뜨거운
길들을 함께
다녀보았어야 했다

언젠가 하얀 문이
그렇게 닫혀지고 말겠지,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항력적인 - 하얀-
단절이-우리의-
얼굴 위에 수면마스크처럼
조용히 드리워지고,
비단끈으로 된 하얀 망사처럼
보슬보슬한 음악이
엘리베이터 천정 위에서
세뇌라도 하듯이, 자근자근 소근소근
속삭여대겠지,
잊어버려, 이젠 다 끝장이 났어,
잊어버리라고, 낄, 낄, 낄......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언제나 마지막 문은
그렇게 닫혀지고 마는 법,
언제나 지고 있는 노름패처럼
열쇠도 없다,
열쇠도 없이
그렇게 우리 홀로 승천의 문 안에 갇혀져야 하는가,
그렇게 홀로 갇혀
멍청히 승천의 길로 올라가야 하는가......



- 김승희 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시집:미완성을 위한 연가.나남.1987.





11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한점 화엄같이 전화기를 껴안고
목숨은 그냥 두고 전화기를 그보다 더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색 불이 붙은 것도 모른 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 빛 불타오르는 화염에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한 잎 화엄 잎사귀에 매달려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이 베어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척추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불꽃이 머리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느끼며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자는
불타는 머리카락 난폭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펄럭거리는 화염이 얼굴을 와락 베어먹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일생을, 그 한 마디,
사랑한다는
그 말속에
묻으며
여자는
그 한마디에
결혼식과 장례식과 묘지명을
순식간에 다 쓰고















- 김승희 시 ’눈부신 유언 한 채‘




식탁이 밥을 차린다
밥이 나를 먹는다
칫솔이 나를 양치질한다
거울이 나를 잡는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이 되고
쎄미나 룸이 되고
흡혈귀의 키스가 되고
극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거울이 된다
캘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니나리찌가 나를 뿌린다
CNN이 나를 시청한다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
신발이 나를 신는다
길이 나를 걸어간다
신용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신용카드가 나를 분실신고 한다
시계가 나를 몰아 간다 저속 기어로 혹은 고속 기어로
내 몸은 갈 데까지 가 보자고 한다
비타민 외판원을 나는 거절한다
낮에는 진통제를 먹고
밤에는 수면제를 먹으면 된다
부두에 서 있고 싶다
다시 부두에...
씨티은행 지점장이 한강변에 음독자살을 하고
시력이 나쁜 나는 그 기사를 읽기 위해
신문지를 얼굴 가까이에 댄다
신문지가 얼굴을 와락 잡아당겨
내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신문이 된다
몸에서 활자가 벗겨지지 않는다


- 김승희 시 ‘식탁이 밥을 차린다‘




** 김승희 : 1952년 3월 1일 광주.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경력사항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어바인교 한국학과 전임강사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수상내역
2021. 제36회 만해문학상
2021. 제21회 고산문학대상 현대시 부문
2003. 제2회 고정희상
1992. 제5회 소월시문학상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된 이래 시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면서 치밀한 구성과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창작과비평사 1997)과 시집으로 『태양 미사』(1979), 『왼손을 위한 협주곡』(1983), 『미완성을 위한 연가』(1987), 『달걀 속의 생(生)』(1989),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1991),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1995), 산문집으로 『33세의 팡세』(1985), 『성냥 한 개피의 사랑』(1986), 『바람아 멈춰라 내리고 싶다』(1989) 등이 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30대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교과서와 함께 김승희시인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나 `33세의 팡세' 등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가슴에 안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참 많았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어지러웠던 시대 탓일까. 언제나 바람부는 황야에 회오리치는 절벽에 서있는듯한 시인의, 피가 튀는듯한 시와 아름답고 감수성어린 산문은 얼마나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던가. 그리고 또 있다. 도무지 부드러운 말은 한마디도 안할 것 같이 꼭 다문 입술과 무엇인가를 끝없이 응시하는 듯한 날카롭지만 깊게 빛나는 눈, 이마를 덮은 까만 단발머리를 한 시인의 모습은 그대로 절대고독의 표상처럼 여겨질만치 강렬했다. 십수년을 넘어서도 그 서늘한 눈빛 그대로 이 가슴에 남아있을만치.

시인 김승희씨(47.서강대교수)의 이름 앞에는 늘 많은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태양의 극점에서 불꽃처럼 시어를 연소시키는 불의 연인', `언어의 테러리스트'에서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성' `초현실주의 무당'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는 자신의 문학적 탐색과정을 `광기의 마녀적 탕진'이라 이르기도 했으니까 그의 제어할 길 없는 감수성의 분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만 하다.

3년반 미국서 강의후 귀국

그래서, 3년6개월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와 어바인 캠퍼스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다 얼마전 귀국한 그를 만나기 위해 서강대 다산관을 찾아 헤매면서도 오랫동안 그의 타오르는듯한 눈빛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참 다정스러웠다. 사진에서의 차가운 이미지는 간데없이(그 빛나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친절하고 부드럽고 늘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래서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아아, 그 `마녀적 광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글쎄요. 그것은 야성적이었죠. 야성적이라함은 현 상태의 제도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문화 사회 정치적인 체계,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힘에 반대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야성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기존의 체제에 대항하고 새로운 말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있어야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 3년반 미국에 있는동안 야성에 대한 갈증이 많이 해소 되었어요. 예전엔 이렇게 책상에 앉아있지도 못했는걸요. 바람처럼 늑대처럼 광야를 달리고 싶어서 어느 자리에나 진득하게 앉아있지를 못했어요. 뭐라고 할까. 폐쇄공포증 같은 것, 여기는 좁은 자리다는 느낌, 감금의 장소라는 느낌이 늘 있었거든요. 미대륙을 시속 100마일로 달려도 보고 원없이 여행을 해서인지 야성이 많이 안정되었어요.”

73년 등단해 시집 `태양미사'(1979) `왼손을 위한 협주곡'(1983) `미완성을 위한 연가'(1987) `달걀 속의 생(生)'(1989)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1991)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995)과 산문집으로 `33세의 팡세'(1985) `성냥 한 개피의 사랑'(1986) `바람아 멈춰라 내리고 싶다'(1989) 등을 낸 그가 불현듯 소설가로 데뷔한 것은 지난 94년. 시인으로 화려한 명성을 누린 그가 익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산타페로 가는 사람'을 응모해 당선되면서부터이다. 그뒤 95년 미국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 동아시어과에서 3년6개월동안 한국문학과 한국어 강독을 가르치면서 시인적 직관을 통해 한국사회의 성차별, 미국 체류 중 목도한 인종차별, 해외입양아 문제등 다양한 삶의 양상을 그린 중단편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과 장편소설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를 펴냈다. 이를테면 모두 미국 체류 중에 거둔 성과라고 해도 될까.




김승희 시인.



Ps) 학생시절 처음으로 여고 문학제 시판넬에서 김승희 시인의 시를 처음 보았다.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벨지움의 들판에서/나는 예술의 말(馬)을 타고/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그림은 손을 들어/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찢고 또 찢고/울고 있었고//나는 당황한 현대의 이마를 바로잡으며/캔버스에/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나의 의학상식으로서는/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그림은 거칠어서도 안되고/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되었다//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귀엽게, 귀엽게/나무피리를 깎고/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은잎삭/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화폭 아래에는/반드시 강이 흘러야 하고/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중략〉 피어난 몇송이 꽃대를 꺾어/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들에게로 간다/그리고 강이 되어/스며들어/친구가 그리는 그림/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그림속의 물'


그때의 깊은 충격이 여지껏 그녀의 시를 사랑하게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