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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생활 속에 핀 꽃’ - 나 희덕 시.

어딘가, 익숙한 눈매,,








17년 전 매미 수십억 마리가 이 숲에 묻혔다
그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해다

17년의 어둠을
스무 날의 울음과 바꾸려고
매미들은 일제히 깨어나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앉을 뿐 멀리 날 수도 없어
울음을 무거운 날개로 삼는 수밖에 없다

저 먹구름 같은 울음이
사랑의 노래라니

땅속에 묻히기 위해 기어오르는 목숨이라니

벌써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매미도 있다
하늘에는 울음소리 자욱하고
땅에는 부서진 날개들이 수북이 쌓여간다

매미들이 돌아왔다

울음 가득한 방문자들 앞에서
인간의 음악은 멈추고
숲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온 음악제가 문을 닫았다

현(絃)도 건반도 기다려주고 있다
매미들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갈 때까지



- 나희덕 시 ‘매미에 대한 예의‘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





우리는 썩어 가는 참나무 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 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
우리는 서서히 썩어 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나
그 고통을 순간에 멈추게 하는구나
오,버섯이여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


- 나 희덕 시 ‘음지의 꽃’
* 뿌리에게, 창비, 1991




대동여지도는 아니더라도
네 마음의 지도 한 장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격랑의 높이를
등고선 몇 개로 대신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
수없이 밟았지만 끝내 밟을 수 없는 땅의 이름들과
오래 울음 우는 네 여울목과
잎새 뒤 은밀하게 익어가는 사과 한 알의 과수원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둥근 늪지와
마음의 갈피마다 숨겨져 있는 몇 개의 길을

혹은 네 마음의 기상도 한 장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어디서 낮게 불어오는지
네 슬픔과 기쁨은 어느 골짜기에서 만나는지
순한 양떼구름 몰고 황혼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네 눈동자에 드리운 장마전선은 언제나 걷히려는지
아마도 나는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끌로 새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
그 속에서 자주 길 잃어버리는 일
내가 그린 그림 밖으로 걸어나갈 수 없다는 일


- 나희덕 시 ’대동여지도는 아니더라도‘
[그곳은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22.





종합병원 복도를 오래 서성거리다 보면
누구나 울음의 감별사가 된다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
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
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울음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 것,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걸어갈 것

마른 시냇물처럼 오래 흘러온
이 울음의 야적장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달지 않는다


- 나희덕 시 ‘이 복도에서는’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2.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 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머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묵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에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 나희덕 시 ’ 심장을 켜는 사람‘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쌓고
또 쌓고
쌓는지도 모르고
쌓고
쌓는 것의 허망함을 알면서
쌓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로
쌓고
이것도 먹고 사는 일이라고 말하며
쌓고
부끄럽다 얼굴 붉히면서도
쌓고
때로는 공허함이 두려워서
쌓고
지우지 못해 끊지 못해
쌓고
바닥도 끝도 없이
쌓고
또 쌓다가

어느날
내가 쌓은 모래성이 밀물을 불러왔다


- 나희덕 시 ‘밀물이 내 속으로‘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22(2002).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헤어진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척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헤어진 척하다가 결국 헤어진 사람들도 있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무심코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결혼에서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법원에 접수된 서류와
그가 마지막으로 열고 나간 문의 침묵 사이에는
꽤 긴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길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못 본 척 스쳐가는 몇 초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고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순간이었지만
아릿한 슬픔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고

종이 위의 결별과
길 위의 결별 사이에는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이 들어차 있는지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변명
때늦은 사과의 말
예의란 헤어진 뒤에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손에서 으깨진 나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찢긴 날개에 대해서는
진액과 인편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에 대해서는
그날의 나비와 오후의 햇빛에 대해서는


- 나 희덕 시 ‘이별의 시점‘
[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





가을엔 나비조차 낫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다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앞이 환해진다
아,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의 옷이 한결 가볍겠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 나 희덕 시 ‘사과밭을 지나며‘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2001)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 나 희덕 시 ‘ 꽃바구니‘
_《야생사과》(창비, 2009)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고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나희덕 시 ‘ 기회주의자’

*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문학의 숲, 2012, 96쪽

* 2022 시와 편견 여름호





그는 나무로 무엇이든 만든다
나무의 결과 무늬, 그 속에 깃든 형상에 따라

그가 만든 숟가락들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멋진 숟가락이 될 수 있다고
곧으면 곧은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부서지고 불 탄 흔적이 있어도 버리지 않는다

손끝으로 집어야 할 만큼 짧은 숟가락도 있고
너무 길어서 다른 이에게만 떠먹일 수 있는 숟가락도 있다

작고 오목한 면만 있으면 숟가락이 된다
입에 들어갈 무언가를 한 술 담을 수만 있다면

물이든 밥알이든 푸성귀든 국물이든 고기 건더기든
목숨을 위해 무엇이든 실어나르는 도구

밥그릇을 빼앗고 숟가락을 분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버려진 나무로 숟가락을 깎는 일이었다

숟가락 싸움 밥그릇 싸움 앞에서 그는
묵묵히 숟가락을 만들었다
스테인레스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로 된 숟가락을

작은 나무토막, 심지어 가지나 껍질까지도
숟가락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숟가락도 만들고
조개껍데기를 이어붙인 조개숟가락도 만들면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순한 숟가락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무기라고
한 술 한 술 누군가 떠먹이며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그가 만든 어떤 숟가락은 작은 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숟가락으로는 무엇을 먹을까 먹일 수 있을까


- 나 희덕 시 ‘ 이 숟가락으로는‘
*시와편견 22년 여름호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애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여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 나희덕 시 ‘흐르다‘
[기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





웅덩이를 지나다
그만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발을 헛딛는 순간
갇힌 물에서 날갯소리 들려왔다

내리는 비에
웅덩이는 깊어져가고
푸석거리는 몸이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눅눅함도 축복인 양 걸어다녔다

해가 나자
비를 머금은 잎들 반짝거렸다 그 속으로
바지의 얼룩을 끌고 가면서
마를수록 선명해지는 상처 하나 끌고 가면서
다시 푸석거리는 소리

구석에 앉아 마른 얼룩을 비비면
흙먼지였던 당신
그제야 내게서 날아올랐다
기억은 웅덩이처럼 작아져갔다


- 나 희덕 사 ‘웅덩이’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22(2004).




너는 혀가 아프구나,
어디선가 아득히 정신을 놓을 때
자기도 모르게 깨문 것이 혀였다니
아, 너의 말이 많이 아프구나

무의식중에라도 하고 싶었던,
그러나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가버린,
그 말을 이제야 듣게 되는구나
고단한 날이면 내 혀에도 혓바늘처럼 돋던 그 말이
오늘은 화살로 돌아와 박히는구나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음을 지나야
얼마나 뼈저린 비참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혀의 뿌리와 맞닿은 목젖에서는
작고 검고 둥글고 고요한 목구멍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이 말이 아니다

독백도 대화도 될 수 없는 것
비명이나 신음, 또는 주문이나 기도에 가까운 것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거리는 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아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이생에서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러니 네 혀가 돌아오더라도
끝내 그 아픈 말은 들려주지 말기를

그래도 슬퍼하지 말기를,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별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 나 희덕 시 ‘상처 입은 혀‘
*그녀에게, 예경, 2015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밖은 고요해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감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삼키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 나 희덕 시 ‘새는 날아가고‘
*그녀에게, 예경, 2015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 나 희덕 시 ‘방을 얻다‘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 북카라반, 2020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때 낀 낡은 씽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물소리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을 흔들어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간다

똑, 똑, 똑, 똑, 똑, 똑……
빈혈의 시간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 나 희덕 시 ‘물방울들’
[야생사과],창비, 2009.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 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에 압정에 박혀
팽팽하고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뀌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가던 바늘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자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아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시 ‘오래된 수틀’ 모두






아버지, 당신의 틀니가
결국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

스물여덟개의 이빨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캐스터네츠

그러나 무언가 씹을 때 들려오는 음악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요

이제 당신은 자유로워지셨군요
헌 입천장과 잇몸을 짓누르던 재갈로부터
입속에 절벅거리던 침으로부터
누대에 걸쳐 이어져온 저작(咀嚼)의 노동으로부터
윗니와 아랫니로 직조한 삶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어느날 당신이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컵 속의 물에 잠긴 틀니는
제 소명을 다한 듯 고요해졌습니다

한자루의 초가 다 탄 뒤에
한 사람의 생이 다 지나간 뒤에
마침내 살과 밀랍이 녹아내린 자리에

빈 눈동자처럼 남아 있는
틀니와 촛대

당신을 가만히 내려놓은 틀니,
그 피 흘리지 않는 잇몸과 닳지 않는 이빨들은 말합니다

살아 있는 자,
씹고 씹고 또 씹어야 한다 씹어 삼켜야만 한다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 나 희덕 시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올빼미가 토해낸 팰릿에는
소화 안된 털과 뼈들이 뭉쳐 있다지

밤에 먹어치운 먹이 중에는
분해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을 테니까
철사나 전선처럼 질긴 것들도 있었을 테니까

오랫동안 뭉쳐진 기억들은 점점
희고 길어진다

이미 나뭇가지의 일부가 된 마른 고치처럼

나비가 날아간 후에도
꽃이 시든 후에도
올빼미도, 그도,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에도, 저렇게,

낡은 이불 홑청 사이로 삐져나온
희고 긴 솜뭉치처럼


- 나 희덕 시 ‘남겨진 것들’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네,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며 빵 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는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길을 잃은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 나 희덕 시 ‘마지막 산책‘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대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이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나 희덕 시 ’ 파일명 서정시*‘
* Deckname <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 시집『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 11. 15.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 나 희덕 시 ‘야생사과’
*야생사과, 창비, 2009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여름인데.


- 나 희덕 시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





한 개의 청바지는 열두 조각으로 만들어진다
또는 열다섯 조각 열일곱 조각

안팎이 다르게 직조된 靑처럼
세계는 흑백의 명암을 선명하게 지니고 있어

질기디질긴 그 세계는
일부러 찢어지거나 해지게 만드는 공정이 필요해

한 개의 청바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에 푸른 물이 들어야 하는지,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신이 만든 청바지 속에 들어가보지 못했지

그들의 자리는 열두 조각 중 하나,
또는 열다섯 조각 중 하나, 열일곱 조각 중 하나

명랑한 파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삶을 박고 있을 뿐
미싱 위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며 떠다니고 있을 뿐

푸른 혓바닥처럼 쌓여 있는 피륙들
조각과 조각이 등을 대고 만나는 봉제선들
주머니마다 말발굽처럼 박히는 스티치들
우연처럼 나 있는 흠집이나 구멍들
뜨겁게 돌아가는 검은 선풍기들, 검은 눈들
방독면을 쓰고 염색약을 뿌리는 사람들
탈색에 쓰이는 작은 돌멩이들
세탁기에서 나와 쭈글쭈글 말라가는 청바지들

다리미실을 지나 한 점 주름 없어지는 세계
마침내 라벨을 달고 포장을 마친
명랑하 파랑


- 나 희덕 시 ‘명랑한 파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 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 희덕 시 ‘못위의 잠’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 .





십년 후의 나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히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엔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살의 여자가
서른다섯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마리 짐승이 된 것 같아요, 라고
또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에게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 나 희덕 시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2001)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어먹고
빈 밥그릇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잎 한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좋으니
오늘은 하루살이떼처럼 앙앙거리며 먹자.
언젠가 오랜 되새김질 끝에
네가 먹고 자란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너도 네 몸으로 밥상을 차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는
저 노을빛을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이 바위에 둘러앉아 먹는 밥을
잊지 말아라, 그 기억만이 네 허기를 달래줄 것이기에.



- 나 희덕 시 ‘소풍’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나 희덕 시 ‘빗방울, 빗방울‘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2.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고 말았습니다
무릉 속의 폐허를,
사라진 이파리들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흙을 마악 뚫고 나온 눈동자가 나를 본 것은
겨울을 건너온 그 창끝에
나는 통증도 없이 눈멀었지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봄에 갔던 길을 가을에 다시 가고 말았습니다
길의 그림자가, 그때는 잘 보이지 않던
흙 속의 풍경이 보였습니다
무디어진 시간 속에 깊이 처박힌 잎들은 말합니다
나를 밟고 가라, 밟고 가라고
내 눈은 깨어나 무거워진 잎들을 밟고 갑니다
더 이상 나부끼지 않으므로
더 이상 무겁지 않은 生, 차라리
다시 눈멀었더라면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비한 현호색은 진 지 오래고
그 塊莖괴경 속에 숨기고 있는 毒독까지 다 보였습니다
그걸 캐다가 옮겨 심지는 않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더라도 편지하지 마십시오
그 빛나던 이파리들은 이미 제 것이 아닙니다


- 나 희덕 시 ‘흙 속의 풍경‘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2.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릴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나 희덕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이따금 첫 물질을 나갔을 때 생각이 나. 처음엔 너무 무서워 태왁만 꽉 붙잡고 있었지.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나를 밀어넣었어. 그런데 바닷물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이상한 해방감마저 느껴졌지. 푸른 피를 흘리는 거대한 짐승 속에서 내 피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 같다고 할까. 그날부터 바다의 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았지. 휘이- 휘이- 휘이- 휘이- 숨비고 숨비고 숨비면서 건너는 한 生.



둥근 수경을 통해 본 바다는 둥글지 않아. 잘게 부서진 파도는 유리조각처럼 날카롭지. 투명하지만 차갑고 단단한 물결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이 있듯 물결에 부딪쳐 죽는 고기들도 있지.



어제의 피로가 잠수복 속에 아직 남아 있어. 오늘의 피로가 어제의 피로와 만나 피워내는 냄새. 탄산가스. 만성두통. 약간의 구역질. 근육마비. 어깨에 박힌 돌멩이 두 개. 망사리에 가득한 조개들. 돌멩이처럼 흔한, 돌멩이처럼 무거운 조개들. 조개는 조개를 낳고 조개는 조개를 낳고...... 조개를 캐는 동안 몸은 석회질에 점점 가까워지지. 어제의 피로는 오늘의 피로를 낳고 오늘의 피로는 내일의 피로를 낳고...... 그래도 익사할 수 없는 것은 어깨에 박힌 두 날개 때문이야.



매일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지. 검은 물갈퀴는 어둠을 가르고 어제보다 더 멀리 내려갔지. 우리가 죽음의 아가리라고 부르는 그곳까지. 싸이렌들이 빛 속에서 나풀거리는 곳, 몇번이나 넘고 싶었던 그 문턱에서 가까스로 돌아와 휘파람을 불어. 휘이- 휘이- 휘이- 휘이- 내 속에 살고 있는 물새 한 마리.



- 나 희덕 시 ‘숨비소리’
* [야생사과] 창비, 2009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 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 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 나희덕 / <심장을 켜는 사람>
*2014 제14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 계절 펄럭이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 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또는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오늘도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 나 희덕 시 ‘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2004.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 고맙다. ‥‥‥


- 나 희덕 시 ‘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2.




마음이 하수구처럼 꾸룩거릴 때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그곳에 가야지

나를 씻어줄 강물 있는 곳
물줄기도 즈이들끼리 만나는 그곳

어느날 내 발목을 끌러 마실 간다
양평장날에 왔던 아낙들
봉다리 몇개씩 들고 올라타자
버스는 강을 따라 시원스럽게 달린다

플라스틱 도시락, 설탕 한 포, 북어포,
그런 걸 사려고 강 따라 머리 날리며
그들은 마실을 나왔나
양수리에도 있을 그런 것들을

나는 못견뎌 양수리로 가는데
그 양수리에는 어떤 못견딤이 있어
이 버스 안, 조는 얼굴로 만나는가

급정거할 때마다
내 안에 출렁거리던 물결
창틀에 부딪혀 쏟아질 듯하고

양수리, 마실 나온 마음들이 스치는 곳
삶보다는 강물이 길게 흐르는 , 그곳


- 나 희덕 시 ‘내가 마실 갈 때‘
[그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송이가 허리를 휘이청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끝에도
온기는 남아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 나 희덕 시 ‘흔들리는 것들‘





분필은 잘 부러진다, 또는 잘 부서진다

청록의 칠판 위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파발마처럼 달리는
분필 한 자루

그것이 죽음의 소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분필을 낭비했다

죽은 이들의 잿가루를 모아서 만든
거대한 분필.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분필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필 속에 뒤엉켜 있는 목소리들

그 후로 칠판에 분필을 대면
어떤 목소리가 끼어들고
어떤 손이 완강하게 가로막고
어떤 손이 낯선 분절음을 휘갈기게 한다

선생 노릇 심여 년,
화장(火葬)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손가락에 묻은 분필 가루를 씻어내는 동안
나는 하루하루 조개에 가까워져간다

분필은 잘 부서진다, 또는 부서져 쌓인다
칠판 위에 곧 스러질 궤적을 그리며


- 나 희덕 시 ‘거대한 분필*‘
* 쑨 위엔과 펑유, <하나 또는 모두>,
2004년 광주비엔날레전.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 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 나 희덕 시 ‘다시, 다시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 나 희덕 시 ‘뿌리로부터‘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 (2014.1)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 나 희덕 시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 나 희덕 시 ’臥溫에서‘




주춧돌을 어디에 놓을까
이쯤에 집을 앉히 는 게 좋겠군
지붕은 무엇으로 얹을까
벽은 아이보리색이 무난하겠지
저 회화나무가 잘 보이게
남쪽으로 커다란 창을 내야겠어
동백숲으로 이어진 뒤뜰에는 쪽문을 내야지
여기엔 자그마한 연못을 팔 거야
곡괭이를 어디 두었더라
돌담에는 마삭줄과 능소화를 올려야지
앞마당에는 무슨 꽃들을 심을까
대문에서 현관까지 자갈을 깔면 어떨까
소리만 들어도 누가 오는지 알수 있을 테니까
저 은행나무 그늘에는
나무 의자를 하나 놓아야지
그래도 식탁은 둥글고 큼지막한 게 좋겠어
벌써 문 밖에 누가 찾아온 모양이군

오늘도 집을 짓는다
내 것이 아닌 그 땅위에, 또는 허공에

생각은 돌담을 넘어
집터 주위를 다람쥐처럼 드나든다
집을 이렇게 앉혀보고 저렇게 앉혀보고
수없이 벽돌을 쌓았다 허물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그 집에 살아보았다

그러나 내것이 아닌 그 땅에는
이미 다른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 나희덕 시 '내 것이 아닌 그 땅위에' 모두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나 희덕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어두워 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 시 '연두에 울다' 모두





멀리 보이는 흰 바위섬,
가마우찌떼가 겨울을 나는 섬이라 한다
가까이 가보니 새들의 분뇨로 뒤덮여 있다

수많은 바위섬을 두고
그 바위에만 날아와 앉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마우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 사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다
포식자들의 눈과 발톱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떼를 지어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이 바위를 희게 만들었다

절벽 위에서 서로를 견디며
분뇨 위에서 뒹굴고 싸우고 구애하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지상의 집들 또한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지 않은가

가파른 절벽 위에 뒤엉킨 채
말라붙은 기억, 화석처럼 찍힌 발톱자국,
일렁이는 파도에도 씻기지 않는
그 상처를 덮으려 다시 돌아올 가마우찌떼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힘은
파도 위의 북극성처럼 빛나는 저 분뇨자국이다.



  - 나희덕 시 '북극성처럼 빛나는' 모두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 할 수 없어 여, 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 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 나희덕 시 '여, 라는 말' 모두




내 친구 미선이는 언어치료사다
얼마 전 그녀가 틈틈이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 삼킴 장애의 평가와 치료』

희덕아, 삼켜야만 하는 것,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도 울컥
올라오는 것......여러가지지만
그래도 삼킬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미선.

입 속에서 뒤척이다가
간신히 삼켜져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것,
기회만 있으면 울컥 밀고 올라와
고통스러운 기억의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삼킬 수 없는 말, 삼킬 수 없는 밥, 삼킬 수 없는 침,
삼킬 수 없는 물, 삼킬 수 없는 가시, 삼킬 수 없는 사랑,
삼킬 수 없는 분노, 삼킬 수 없는 어떤 슬픔,
이런 것들로 흥건한 입 속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게 된 우리는
삼킴 장애의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미선아, 삼킬 수 없는 것들은
삼킬 수 없을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희덕.



- 나 희덕 시 ‘삼킬 수 없는 것들‘




어디서 물 끓는 소리 들린다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손을 내저어보지만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물이 잦아든 주전자가 달아오른다
쇠 타는 냄새
플라스틱 손잡이 녹는 냄새
녹은 프라스틱이 다시 엉기는 냄새
급기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는데
물 끓는 소리 계속 들린다
어서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비등점 위의 날들, 비는 내리지 않고, 마른 웅덩이에
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개구리 울음소리, 누구의 목이
이리도 말라 물기란 물기는 다 거두어 가는가. 일어나,
일어나, 불타는 혀가 너를 삼키기 전에. 소리쳐보아도
이내 되돌아와 불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아무것도 모
른 채 잠이 든 마음을 업고 연기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 나희덕 시 '갈증' 모두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구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팔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눈가를 훔쳐주다가
나는 문득 이 눈부신 햇살을 버리고 싶다.



  - 나희덕 시 '저녁을 위하여' 모두





너에게도 이런 얼굴 있지 않을까


  승천하지 못한 빗물, 검게 얼룩진 바닥 위로 기어가
는 곰팡이와 이끼, 먼지를 겹입어 더이상 투명하지 않은
유리 조각, 낡은 타이어 두어 개, 녹슨 안테나, 뒤엉킨
전기줄

  날아오를 수도 달릴 수도 없는
  무엇을 비출 수도 키울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소도구들 속에서 중얼거려보는
  쓸쓸한 무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보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또하나의 얼굴
  또하나의 옥상

  수없이 너의 곁을 지나쳤지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너를 본다
  나의 옥상에서 너의 옥상을 본다
  너무 오래 웅크린 소도구들 속에서
  한 가지 흔들리는 것도 본다

  날아온 한 줌 흙 속의 강아지풀
  하늘로 하늘하늘거리고
  강아지풀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네 얼굴을
  나는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나희덕 시 '또하나의 옥상'모두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고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 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 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는 말이 없다


- 나 희덕 시 ‘마른 물고기처럼‘

(*) 莊子의 '大宗師'에서 빌어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
네가 마음에 지핀 듯
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
밝은 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와서
쐐기풀 한 짐 내려놓고 사라진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삶을 짜 깁는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
네 속의 폭풍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봄 볕이 아른거리는 뜰에 쪼그려 앉아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
오늘은 비명없이도 너와 지낼수 있을 것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을 것인가


제 죽음에 기대어 피어날 꽃처럼, 봄뜰에서.



  - 나희덕 시 '고통에게 1' 모두




집이 가까워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쏳아지기 시작했다
깨어보면 늘 종점이였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고목으로 사라져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 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드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 나희덕 시 '종점 하나 전' 모두






마음이 궁벽한 곳으로 나를 내몰아
산속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달리다보면 손은 수시로 뿔로 변하고
발에는 단단한 발굽이 돋았다
발굽 아래 무엇이 깨어나가는지도 모른 채
밤길을 달리다 문득 멈추어선 것은
그 눈동자 앞이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의 눈빛,
길을 잃어버리기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놀라 주춤거리다가
도로위에 쓰러진 노루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저 어리디어린 노루는
산속에 두고 온 스무살의 나인지도,
언젠가 낳아 함부로 버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헤트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굽으로
불행의 속도를 추월할 수는 없다 해도
어서 일어나 남은 길을 건너라
저 울창한 달래와 머루 덩굴 속으로 사라져라
누구도 너를 찾아낼 수 없도록.



  - 나희덕 시 '노루' 모두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았다
두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 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 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없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볕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꼬기는 아이들과 헤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꼬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대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나희덕 시 '섶섬이 보이는 방'모두





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
태백 금대산 어느 시냇가에 앉아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남한강의 발원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휘장 너머 하나님의 옷자락이 보일까봐
눈을 질끈 감곤 했던 것처럼
보아서는 안될 것 같은
어떤 힘이 내 발을 묶었다

끝내 가지 않아야
세상의 물이란 물, 그
발원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에,
흐리고 사나운 물을 만나도
그 첫 순결함을 믿을 수 있을것 같기에,
간다 해도 그 물줄기 어디론가 숨어
내 눈에 보여지지 않을 것 같기에,
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아우라지 쯤에서
나는 강물을 먼저 보내고
보이지 않는 발원을 향해 중얼거릴 것이다

만나지 못한 것들이 가슴을 샘솟게 하나니
금대산 검용소,
가지 않아서 끝내 멀어진 길이여
아직 강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물줄기여.


   -나희덕 시 '발원을 향해'모두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마르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속의 눈동자들은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실은
남아 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사진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사진을 보며 거실에 들어서는 날들,
그 고요 속에서
겨울 열매처럼 뒤늦게 익어가는 것도 있으니
평화는 그의 사진과 함께 늙어간다
모든 파열음을 흡수한 사각의 진공 속에서
그는 아직 살고 있는가
마른 잠자리처럼 액자 속에 채집된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그러나
파도소리 같은 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진속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듯 웃고 있지만
액자 위에는 어느새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볕이 환하게 드는 아침에는 미움도
연민도 아닌 손으로 사진을 딱기도 한다
먼지가 덮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걸레가 딱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 나희덕 시 '그의 사진' 모두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 나온 실은
슬슬슬슬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두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예요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 나희덕 시 '분홍신을 신고' 모두





다친 발목을 끌고 향일암 가는 길
그는 여기 없고
그의 부재가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절, 뚝, 절, 뚝,
아픈 왼발을 지탱하느라
오른발이 더 시큰거리는 것 같고
어둔 숲 그늘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흘러나오고
흐르는 땀은 그냥 흘러내리게 두고
왼발이 앞서면 오른발이 뒤로,
오른발이 앞서면 왼발이 뒤로 가는 어긋남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음을 알고
해를 향해 엎드릴 만한 암자 마당에는
동백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그 푸른 열매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안개젖은 수평선만 바라보다가
절, 뚝, 절, 뚝,
내려오는 길 붉은 흙언덕에서
새끼 염소가 울고
저녁이 온다고 울고
흰 발자국처럼 산딸나무 꽃이 피고.



  -나희덕 시 '절, 뚝, 절, 뚝,' 모두






1974년 6월 5일 不見.
1974년 6월 8일 不見.
1974년 6월 9일 不見.
1974년 6월 11일 不見.
1974년 6월 15일 不見.
1974년 6월 18일 不見.
1974년 6월 22일 不見.


포경선의 어둠을 이렇게 기록한 이가 있다

한줄의 기록에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선과 안개

1974년 6월 24일 밍크 3구 드디어 發見.


한줄의 기록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비린내와 핏물

不見과 發見 사이에 닻을 내린
어선의 불빛으로 밤바다는 더 깊어지고
항구로 오래 돌아가지 못한 이의
낡은 남방이 벽에 걸려있다


빛바랜 항해일지에는
見자의 마지막 획이 길게 들려있다.



  - 나희덕 시 '不見 과 發見 사이' 모두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힘껏 잠가도
물때 낀 낡은 싱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아, 저 물방울들은
나랑 살아주러 온 모양이다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래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 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속의 나를 흔들어 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
역류하는 슬픔으로 잊은 채 잠이 들곤 한다


똑, 똑, 똑, 똑, 똑, 똑.....
빈혈의 시간 속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나희덕 시 '저 물방울들은'모두




저, 저, 저 아래서 눈이 올라온다
공중에 난 발자욱들을 지우며
용서 받을 발자국들이 몇씩은 있을 것이여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눈발 날리는 소리를 그렇게 간절히도 듣던 귀가 있었다

창문을 열자 허공에서 오래 서성거리던 눈송이 몇점
더운 손등위에 깜박거리다 스러진다
눈석임물처럼 잠시 맺혔다 흘러내리는 게 목숨이여서
오늘밤 싸늘하게 피가 식는 입술이 있겠지
어느 마당가에서는 둥근 그릇에 희디흰 눈을 받겠지
그 그릇이 봉긋하게 차오르면
또 한 아기가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겠지
아득한 산란, 터져나온 포자들이 날아오르는 밤이면
허름허름 길 떠나는 발자국도 있어

괜, 찮, 다, ....
괜, 찮, 다, ....
괜, 찮, 다, ....
괜, 찮, 다, ....


눈은 대체 어느 먼 골짜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하염없이 날아오르나 날아오르며 곤두박질치나
저, 저, 저 아래 골짜기는 깊고 어두워
눈은 제가 누굴 용서한 줄도 모르고 밤새 내려 앉는다.



  -나희덕 시 ‘눈은 그가 떠난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 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 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잔해 속에서 발굴될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길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30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박거리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알게 되다니


- 나 희덕 시 ‘종이감옥’
* 2017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나희덕: 시인대학교수
1966년 2월 8일, 충남 논산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뿌리에게' 등단
2019.03.~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사회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2022.12. 제30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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