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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일상속의 ‘무지개‘를 쫒아,, - 최 정례 시.

삶은 한바탕, 춤인 것을,,









꽝꽝나무야
꽝꽝나무 어린 가지야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날 여보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어린 가지야
꽝꽝나무야
나에게 물어줄 수 있겠니?
여보, 밥 먹었어?
엄마, 밥 먹었어? 라고
그럼 나 대답할 수 있겠다
꽝꽝나무야
나 밥 먹었다
국에 밥 말아서
김치하고 잘 먹었다


- 최 정례 시 ‘밥 먹었냐고‘
[햇빛 속의 호랑이],세계사, 1998.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한 짝은 엎어져 딴생각을 한다

별들의 뒤에서 어둠을 지키다
번쩍 스쳐 지나는 번개처럼

축제의 유리잔 부딪치다
가느다란 실금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짐을 싸고 나면
병이 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가기 싫은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고야 만다.
고요하게 자기 눈 속에 난폭함을
숨겨두고

내일은 결혼식인데 하필 오늘
결혼하기 싫은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 최 정례 시 ‘내일은 결혼식‘
[빛그물], 창비, 2020.




멀리서
천둥 같은 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빛만 번쩍이는 게
그런 게

풀잎 같은 게
갑자기 돋아나
깊은 겨울이라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린 게
길가에 새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네가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낮은 처마들아
손들어
경례를 붙이고

안녕


- 최 정례 시 ‘안녕’
[붉은 밭],창비, 2019(2001).





산천동 간절히 가고 싶었지만 못 갔어요
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는 길인데
연초록의 어린순을 내민 가로수들이
길바닥에 그림자를 눕혀놓고 있었어요
나무 어린 그림자 밟고 지나가는데
내 속에 그림자도 막무가내로 누워버리겠다는 거예요
산천동 꽃그늘에 덮인 산동네는
얼마나 처연한 빛을 띠고 있었을까요
나도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워 헛소리를 할 수 있다면

그런데 늑대의 털을 걸쳐 입은 내 그림자 벌떡 일어나더니
어리고 생생한 잎을 먹어치우고
그것들 헤치고 달렸어요
달리는 버스 지붕
길가에 조그만 상자까지도 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모르는 척 마구 밟고 갔어요
영혼이라는 게 있을라구요
상자 같은게
무심코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은 게
빌딩 꼭대기에 약간만 석양이 남아
그 위를 붉은 구름이 떠돌고
아이는 계속 열이 올랐어요
그림자 점점 자라 한 저녁을 덮어갔어요


- 최 정례 시 ‘봄 그림자‘
[붉은 밭],창비, 2019(2001).





고구마나 미역 줄거리는 아니고
흘러가는 사연의
인정과 사정의 그 줄거리

생각은 떠돌고
상상은 어디 붙잡힐 수 없어
휘말리다
무성해진다

그게 사실이야?
설마 그럴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 맥락은 그게 아니었다구
끌러다니는 줄거리들

선생님은 국어 시간에
줄거리를 요약해보라 했고
우린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공유할 수 있는 줄거리라는 게
참고서의 정답과 같아서

잔가지를 쳐내야 줄거리를 뻗지만
잔가지가 자꾸 줄거리를 변화시켜서
주제는 변덕, 후퇴, 탈진을 거쳐
줄거리는 정말 할 말이 많아진다

불법을 저질렀어
고도의 꼼수였다구
그건 강간이었지
연애가 아니야
내가 볼 땐 그래
당신은 당신 입장
나는 내 입장

각자의 상황 논리 때문에
각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정의는 억압으로
규제는 반항으로
리얼리티는 더 이상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면서

신문은 종이를 잉크로 가득 채우고
망상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줄거리는 그러니까. 에, 일종의,
자연인 것 같지만 자연은 아니고
복잡해지면서 미끄러진다
표류한다
어둠 속에서
암반을 박차고 거슬러 오른다
흘러내린다
도대체 잡히지 않는다


- 최 정례 시 ‘줄거리를 말해봐 ‘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난 다리가 아파서 앉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이 여길 왜 차
지하고 있는 거야? 이 아줌마는 심장이 아프대요. 심장은 안 앉아도 돼, 다리 아픈 사람이 앉아야지. 저도 나이는 꽤 먹었다구요. 염색을 해서 그렇지, 민증 깔까요? 젊은 사람도 아프면 앉아야지 노인만 아프라는 법 있나. 할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 아줌마 편들어 참견이야? 참견이 아니라 맞는 말이잖아, 늙었다고 꼭 앉으란 법은 없지. 저기 서 계신 할머니는 일흔다섯이라는데 배낭 메고 등산 갔다 오시잖아. 할아버진 등산 안 다니고 왜 여기 앉았어? 앗 여기 어디지? 당산에서 내려야 하는데 지나쳤네. 당신이 말 시키는 바람에 지나쳤잖아. 아니, 자기가 알아서 내려야지 왜 남 탓을 해. 지나쳤지만 괜찮아, 가양역에 내려 딸네 집에 가면 되니까. 아니, 다 늦은 저녁에 왜 딸네 집엘 가. 자식들 구찮게 하지 마. 내가 딸네를 가건 아들네를 가건 왜 참견이야. 다저녁때 자식들한테 가면 밥 차려주기도 귀찮지, 남자 노인들은 눈치가 없다니까.

어제 무지막지 재미없는 영화를 보았는데 이 노인들 앞에 서게 된 것은 그 영화와는 상관없는 우연일 것이다. 끝 장면에 가면 뭔가 반전이라도 있을까 해서 졸면서 끝까지 보았지만 재미없는 영화는 끝도 역시 재미가 없다. 생면 부지의 낡은 인생들이 자리 하나 놓고 티격태격하다가 같은 역에서 우르르 내려버리는 노약석 그이들의 끝 장면.



- 최 정례 시 ‘자리‘
[빛그물],창비, 2020.




홈런이다
관중은 환호했고
화면은 그중 하나가 일어나
두 손을 뽑아 올려
공을 받아내는 장면을 비췄다

홈런은 그렇게 사라진다

잠깐 출렁이다 관중의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여운을 남기고

꿈이 슬픈 이유는
홈런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홈런을 기다리며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네가 나타나 재생 변주되는 꿈
문득 나타나 화려한 손을 흔들거나
다시는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누추한 꼴을
적나라하게 펼쳐놓는다

꿈은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홈런은 날아가 사라지는 것이고
한번은 두번으로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 최 정례 시 ‘홈런은 사라진다‘
[빛그물], 창비, 2020.




시간은 무장무장 흘러버렸고
당신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망설이다 묻어둔 그 말
물고기의 말이 되었고
강아지의 말이 되었고

잎사귀 틈에 홍방울새
칡덩굴 속에 자주 꽃
그것들 그 말들
비집고 비집고 돋아난 것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 말 모든 나라에 속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고만 싶어

그개 수년 만에 나타나 불쑥
입 밖에 낸다면
당신 그 소리 느닷없이 알아들을까

홍방울새 울음소리
빨갛게 맺는
열매로만 알아듣는 것처럼

언젠가 들은 소리라고
이마를 찌푸리고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엉기고 엉겨버린 것들
알아볼 수 있을까

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서
모래 폭풍 속으로 달려나가서
바위 구멍 속에 퍼부어두었던 말들

대숲이 되어 수런거리는데
순간에 빈 바람을 부르는데
어디로 데려가 달래주나
어디로 어떻게 불러보나


- 최 정례 시 ‘당나귀의 숲‘
[붉은 밭],창비, 2019.(2001).




마음이 몸에 있지 않다면
마음 따로 몸 따로 사는 거라면
몸이 마음과 만나는 곳은
입술, 입술쯤일 것 같다

마음의 입구는 입술
마음에 없는 말을
입술이 혼자 들썩일 때
그건 마음이 모르는 마음의 심연을
몸이 먼저 알고 중얼거리는 것

아픈 몸이 마음을 부른다
통증을 건네보자고
마음이 몸을 만나
슬픔을 담아두려 하나
그럴 수가 없다
입술이 열린다


- 최 정례 시 ‘입술‘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3.




나는 나 자신을 떠나지 못한다
소금이 바다를 떠나듯이
쇠종에서 종소리가 떠나듯이
그렇게 못한다

당신은 오래전에 잠들었고
등 뒤에서
나는 몸을 구부리고
벌거벗은 돌멩이가 되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구름들이
밤새 우리 지붕 위를 흘러간 적이 있으나

당신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고른 숨을 내쉬고
이제 나는 잔인함을 받아들여
벙어리 자명종이다

놓여날 길 없는 차가운 밤
종 속에 갇힌 종소리들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안개들

당신은 잠결에 혹
손을 뻗어 중얼거리지만
당신이 잡은 건 게임판이거나
축구 경기의 채널

우리가 함께 갈 곳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가더라도 각각
다른 장소인 그런 곳


- 최 정례 시 ‘두 사람의 잠‘
[붉은 밭], 창비, 2019.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상관 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 최 정례 시 ‘우주의 어느 일요일‘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9.




양말을 빨면 꼭 한 짝은 사라진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장롱 서랍도, 침대 밑도 아닌 그 너머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양말짝도 도둑처럼 날마다 진화하는가
문틀이 어긋나는 집을 떠나
허방의 나라를 발명하려고

꿈속의 한구석을 오려내고
몸을 숨기는 것들
눈 뜬 구슬처럼 사라지는 것들

화장터 굴뚝 끝에서 연기로 흩어진 이가
이것이 나다, 나야라고
말해줄 리는 없다

꿈의 계곡 자갈돌 옆에
반짝이는 구슬이 있었다
주우면 그 구슬 아래 그 아래
다 줍지 못했는데 반짝이며 굴러갔다

무엇 때문인지 눈이 내렸고
무엇 때문인지 그가 왔다 갔다

운동화 끈 하나 제대로 못 매니?
신발 끈을 묶어주던 손
아득한 계곡 속에 낯익은 손이
사라진 구슬들을 굴리고 있었다

생시처럼 왔다 갔다
한밤중에 깨어나
생각해보니 그렇다
눈인지 흰 꽃잎인지 흩날렸다.


- 최 정례 시‘도둑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진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불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 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 최 정례 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라면을 끓인다 혼자 낮에 냄비 가득 물을 붓고 냄비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끓는 물에 라면을 분질러 넣는다 달걀을 풀어 젓고 파까지 썰어 넣으며 이왕이면 화려한 라면을 먹자고 혼자 말해 본다 어제는 사표를 쓰고 그래 튀어나가 보자 심장으로 10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라면을 끓인다 라면 끓이는 것은 잘해 보고 싶은 모양이지? 물은 알맞게 부었나 가늠하는 품이 우습군 우스워 꼭 그렇게 자알들 살아보겠다고 아둥거려야겠냐? 라면이 중얼거리듯 부글부글 끓는다 팔십구점 일 메가 헬스 오미희의 가요광장을 들으며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즈쯔르르 즈쯔르르 즈쯔르르르바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를 들으며 라면을 먹는다 한 가닥 두 가닥 세다가 젓가락을 휘휘 저어 짧게 끊어진 마지막 가닥까지 애써찾다가 국물을 후루룩 들이마신다 혼자 낮에 알 수 없는 허기에 라면을 먹는 것이 너 혼자뿐이겠냐? 끓는 라면은 냄비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뱃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았냐? 라면아, 너는 안간힘을 썼구나 그래 너는 안간힘을 썼구나 오늘 너로 배를 채우고 누군가의 거대한 뱃속으로 가라앉자, 버려지자, 어떠냐? 라면 국물아, 내 뱃속 풍경은

  
- 최 정례 시 ‘라면을 먹는다‘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민음사, 1994.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
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
마침내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

한 나무의 아름다움은
다른 나무의 아름다움과 너무 비슷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푸른 흔들림
너는 잠시
누구의 그림자니?


- 최 정례 시 ‘ 숲’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2002.




* 황병기의 「연 날리기」를 듣다



나는 깜빡 물고기
물가에 누워 있었다

하늘에는 커다란 가오리연
팽팽하게 당겨졌다 놓여났다
지느러미가 꼬리가 간지러웠다
연은 하늘 여기저기 놀고
눈을 눈을 닫고 싶었으나
눈속을 파고들었다
몸은 엎어지며 잦혀지며 둥둥 떠 흘러다녔다

하늘에는 커다란 가오리연
물새의 부리가 되어 다가오기를
내 눈을 파먹기를
그래 하늘 끝에 놓아주기를
반짝이는 비늘을 모래톱에 하나씩 떨어뜨리며
기다렸다

가오리 가오리연
먼 바다 끝에서 달려온 새의 힘찬 날갯짓
몸은 스러질 것
햇빛은 찬란하고 바람은 모래 언덕에 와 무조건 쓰러지고
나는 모래톱에 반쯤 묻혔다 떠올랏다 뒤집히며
조금씩 살점을 떼어놓았다


- 최 정례 시 ‘나는 깜빡 물고기‘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 1994.




말발굽, 말발굽이 내게로 왔다
천정의 백열등을 바라보다가 백열등 속 필라멘트, 작은 말발굽을 바라보다가

아니 오백 년 오천 년 전의 어느 저녁부터 말발굽들이 내 눈속으로 자그락자그락 걸어 들어온 것을 내가 모른 것이다

왜 내몸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막을 그렸는지 죽을 물새의 몸을 빌려 허공을 헤매었는지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 사막의 모래 폭풍 소리를 듣는다 짙푸른 호수가 넘실넘실 파도 치며 떠 있음을 본다

새벽이면 밤새 내게로 온 말들이 하늘 마을 대장간에서 발굽에 징을 박으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의 모든 헛된 것에 대한 갈증으로 지상의 꽃들은 피고 지는 것일까

갈 길 멀어 아직도 내 눈은 끝도 없이 말발굽을 삼키는데 내 발가락 한없이 쓸쓸한 줄 모르고 꽃들은 자꾸 그렇게 피고 지는 것일까


- 최 정례 시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민음사, 1994.




그놈들이 왔다
강아지만하다가
조약돌만해졌다가
다시 팥알만큼 작아진
염소 새끼들이 쳐들어왔다
흑옥 같은 눈동자
유리창에 와 매달렸다
움메하고 불렀다
검은 내를 이루었다
담배 가게 지붕 위서
쓸쓸한 어깨 사이로
패인 길바닥으로
지하절 선로 옆으로
웅크리고 몰려다녔다
곤두박질치는 놈
엉덩방아 찧는 놈
세상 첫 발이라고
단정히 내려놓는 놈
아침부터 밤중까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놈들이 몰려오고
유리창에 매달리고
겨울이 왔다



- 최 정례 시 ‘겨울비‘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민음사, 1994.




고양이가 자라서 호랑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미 열매 속에
교태스런 꽃잎과 사나운 가시를 감추었듯이
고양이 속에는 호랑이가 있다
작게 말아 구긴 꽃잎같이 오므린 빨간 혀 속에
현기증 나는 노란 눈알 속에

달빛은 충실하게 수세기를 흘러내렸을 것이고

고양이는 은빛 잠 속에서
이빨을 갈고 발톱을 뜯으며
짐승 속의 피와 야성을
쓰다듬고 쓰다듬었을 것이고

자기 본래의 어두운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처럼
고양이,
눈 속에 살구빛 호랑이 눈일을 굴리고 있다
독수리가 앉았다 날아가버린 한 그루 살구나무처럼


- 최 정례 시 ‘호랑이는 고양이과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여자는 빨래를 넌다
삶아 빨았지만 그닥 하얗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햇빛이 동쪽 창에서 서쪽 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자는 서쪽으로 옮겨 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
서쪽 창의 햇빛도 곧 빠져나갈 것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봄이 있었다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어쨌든 네가 입게 된 옷이야
벗어버릴 수는 없잖아 예의를 지켜
얼어붙었던 것들은 녹으면서
엉겨 매달렸던 것들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형이 다니는 피아노 교습 학원차를
타고 싶어서 쫓아갔다가 동생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얘기
그가 라디오에 나와 연주하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멀리 산이보였었는데
이 집은 창에 가득 잿빛 아파트뿐이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은 간곡한 필연인가
우연이 길에서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 했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르렀겠지
잃어버린 봄, 최초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때인 것 같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 오른다
우년과 필연이 서로 꼬리를 치며 꼬드기고 있다
문득 서쪽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다


- 최 정례 시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20115.




나의 밤이 너에겐 낮이고
너의 낮이 나에겐 밤이라

우리 사이엔 거대한 태평양이
누워서 파도친다

끝도 없이 캄캄한 해안가로
난폭하고 순결한 물결이
무슨 뜻을 품고 굽이쳐 오는 것만 같은데
사실 무슨 뜻이 있겠는가

내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너를 향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 것과 같다

잠시 다른 밤 다른 낮을 살고 있는
남의 나라에서

내 나라를 향해 한껏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서 밀려오는데

셀 수도 없는 네가 거기 떠올랐다 가라앚는다
파도에 굴러다니는 태초부터의 자갈돌처럼
생각의 까마귀 떼라
얼굴도 몸통도 어깻죽지도 두 팔도 무너지면서


- 최 정례 시 ‘생각의 까마귀 떼라‘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것일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 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 전 사람들 단장을 짚고 안경을 쓰고
줄줄이 서 있던 일족의 흑백사진
한 잎 배를 타고 칠흑의 밤을 노 저어 가던 그 집


그 집 벽 위 액자에도 저런 빛깔의 과일이 한쪽 떠 있었던 것만 같다
먹어본 듯하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주르륵 지붕 위로 미끄러져 내리던


100년도 전에 그 집 사람들 미끄러져 가면서
남자가 입덧 중인 여자에게
열매를 꺼내 한 쪽씩 입속에 넣어주고
아기들에게도 쪼개주고
둘러앉아 한쪽 눈을 찌그리며 터뜨려 먹고 있는데


그때 밀감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신 살구빛의 그것이 먹고 싶어
어미의 갈비뼈 밑으로 기어들어간 그 기억 때문일까


깜깜한 밤하늘 뚫고 신 살구빛의 새초롬한 달
신물 터져나오면 한쪽 눈이 찌그러지다 환해지는데


그 집 액자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밤배 탄 사람들
아직도 기린처럼
그 열매 끌어내려 터뜨려 먹으며 가고 있는지
잔뜩 구부리고 초승달 미끄러져 내린다


- 최 정례 시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 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줄뿐인 내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재빨리 내장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 빼앗고 해삼 반올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 구별할 수가 없다. 어젯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 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떻게 내 주소를 알게 됐을까 풀어보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은 눈 비비며 같은 구덩이에 산다. 그것들 소포 꾸러미처럼 가끔 날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당신들 내게 그렇게 호의적일 리 없지, 내가 내 속을 긁어내 환상의 꾸러미를 만들건 말건, 내장 긁어내 보였다 다시 삼키건 말건. 어쨌거나 해삼, 어느 여름날 새끼줄에 묶어 데러갔다가 흔적 없이 녹아내린 적 있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은 해삼인지 나인지.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러나 다시 내장 빼앗기고 반으로 잘려 던져지는 해삼의 밤이다.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찍는 밤이다.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


- 최 정례 시 ‘해삼내장젖갈‘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2015.




그곳에 가지 말라고들 한다
빠지지 말라고도 한다
그러나 결국은 가게 된다
망설이다 결국은
깜깜한 구멍을 기어서 기어서
부득불 간다
그곳은
집은 무너지고
집의 그림자만 누워 있다
강물은 이미 흘러가버렸고
산도 절도 밥도 시도
숨어서 울게 된다
그림자만 퍼먹게 된다
그림자가 되어
쥐처럼 기어다닌다

어쩌다 빠져나온다 해도
그다음엔
농사를 지을 수도
광대가 될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다
비굴하게나마 살아갈 수도 없다


- 최 정례 시 ‘늪과 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지금껏 이것들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던 것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지만 닿지 못했던 것
이것들 어떡하나

그는 시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 육체 속에 숙박하고 있는 이 말들은
터무니없이 귀찮게 구는 이것들은


그는 물결 따라 흐르다 발목에 와 걸리적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걷어내듯이
혀를 차겠지
다시 한 번
나를 수치의 화염에 휩싸이게 하겠지
엎치락뒤치락 둔갑하는 그림자처럼
터벅터벅 뒤쫓아 걷는 사람들도 있겠지
황하의 뱃사공, 라스베이거스의 곡예사,
늙은 피카소의 젊은 애인들처럼

그래 그래
이것은 있었다
빚보증 섰다가 파산한 삼촌의 울화병처럼
숨어다니며 구시렁대는 금치산자의 한숨처럼

대책 없이 무거워져서
떨어져 내릴 비구름의 형상으로

뭐라고 시작해야 할까
그에게 그에게 너에게

무수한 별들이 높은 데서 폭발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은 이렇게 초라했었다 전전긍긍했었다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네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 말은
가닿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리라

이 생각의 불, 불, 불은
흘러가던 붉은 구름 한 점처럼
저녁 빌딩 유리창에 걸려서
있었다 덧없이


- 최 정례 시 ‘있었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돼지가 지붕을 타고 떠내려갔어요
붉은 흙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려 디딜 곳을 찾는데
내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살던 옛집으로 당신이 찾아왔어요
그 집 떠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난 그 집에 살고 있었어요
꿈이라는 것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지요

빗속에서 미등을 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물에 잠겨 떠내려갔어요
남의 일, 남의 집 일처럼
한 달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어요

스토커는 버림 받는 것이 두려워요
스토커는 매달릴 것을 찾아 붙잡아야 해요
내가, 당신이, 우리들 스토커가
홍수에 떠밀려 가며 꿀꿀거렸어요

어떤 차들은 문득 지붕 위에도
넙죽 올라가 앉아 있었고
홍수 지난 뒤 찬연한 햇빛 속에서
냄비와 이불, 옷가지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뒤엉켜 있었어요

그처럼 적나라하게
허드레옷을 입고 있는 내게 다가와
당신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는데
거긴 무너진 옛집이었어요

금새 알아챘지요, 꿈이라는 것
스토커는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스토커는 남의 집 환한 불빛만 쳐다봐요

돼지가 지붕을 타고 떠내려갔어요
오래전 얘기지요
제발 부탁인데
지금 어디야? 그런 것 묻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갔으니

다음 생엔 당신이 시를 써요
당신이 떠내려가며 꿀꿀거려요
그 집은 팔아버렸고 주소도 사라졌어요


- 최 정례 시 ‘홍수 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오늘 너의 말은
모래언덕의 능선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그 실루엣 뒤에 뒤에는
뒤척이는 바다가 보이고
희망을 분수처럼 내뿜는 고래도 있었다

너의 목소리 너무나 그럴듯해서
내 혀를 빼주고 싶었다
팔다리를 떼어 내던지고 싶었다

오늘
누군가는 20억을 사기당했고
신종 바이러스는 온종일 창궐했고
길가 돌멩이들은 저희끼리 울퉁불퉁해졌다

오늘의 호르몬은 아무도 모르게 상승했지만
사회적 윤리적 교육적 미학적 어떤 이유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모른 척
삼보일배 오체투지로 기어 나갔고

오늘 나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가시 만발한 선인장 앞에서


- 최 정례 시 ‘선인장 앞에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자기 종족을 멀리 퍼뜨리기 위해 그러겠지
맛보고 못 잊겠으면 또 뿌려 심어달라고
그래봤자 인간들이 다 먹어치우고 마는데
딸기는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뒤로도
사랑스러워 딸기는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는 거지
총총한 씨앗 속에 숨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다 하다보면 딸기는 사라지고 마는데
딸기가 맛있다고 하하 웃는
당신 속에 또다른 당신이 숨어 있다
당신 속에 숨은 독재자, 주정꾼, 야구에 정신 팔아버린,
고집불통, 대책 없이 꽥 소리치는 당신의 아들딸
당신 속에 당신들 종합선물세트처럼 가질 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본다
흰 셔츠에 단정히 타이를 맨 당신이라는 당신
`괜찮아'라는 말이 숨겨놓은 뿌리 깊은 암세포
그런 식의 말에 숨어 있는 변덕과 완고한 이념들
그런 식으로 숨겨놓은 `사랑해'라는 말의 기운은
감기 기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국 한그릇이면 해결될
혹은 섹스 한번이며 해결될*
사랑한다는 말은
또다른 말을 숨겨야 겨우겨우 당신에게로 가니까
그러니까


* Jeffery McDaniel<The Benjamin Franklin of Monogamy>에서 빌려 변주함.


- 최 정례 시 ‘딸기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 걸까‘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2015.




떡갈나무 붉은 이파리의 짝사랑은 담벼락이다
떡갈나무 그림자 벽에 너울거린다

자신이 찾는 것이
자신이 만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노을 속에 담벼락은
창백하고 딱딱하고

자꾸 달아나려는 담벼락에
떡갈나무 기침을 쏟아놓는다
가슴병을 허리뼈를 밀어넣는다.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안고
그와 하는 놀이

담벼락은 자기 속에 감춘 것을 모른다
뜨거워진 것도 모른다

떡갈나무는 찾느라고
미끄러지고 엎어지는데

정신없이
땅거미가 밀려온다


- 최 정례 시 ‘벽과의 춤을‘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지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 최 정례 시 ‘3분 동안‘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2001.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썬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 최 정례 시 ‘개천은 용의 홈타운‘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2015.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하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 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박정대의 시 한 구절을 빌어

- 최 정례 시 ‘레바논 감정‘
-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 2006)




어디 갔다 왔어?
네가 물으면
나는 꼭 어디 먼 데 갔다 온 거 같다
부엌에서 물 먹고 왔을 뿐인데
간장 사러 가게에 갔었을 뿐인데

지난여름, 허공인 줄 알고
유리창을 들이받던 실잠자리
들어오려고 들어오려고
성냥골 같은 머리통으로
수없이 그짓을 되풀이하던
투명하고 가느다랗고 가물가물하던

혹시 누구 혼백이 아닌가 싶던
그 실잠자리 생각을 하게 된다


- 최 정혜 시 ‘ 어디 먼 데’




어쩌다가
처녀도 잉태하여 아이를 낳지

어쩌다가
우리는 죄도 없이 벼락을 맞지
첫눈에 반하여 번갯불도 튀지
누가 이 배고픔을 만들어놓았는지

누가 내 속에 분자와 원자
생화학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
끓는 감정을 쓰라린 모멸감을 만들어놓았는지

구름이 변종 자기 복제자를 만들듯
그리움도 평생 자기 복제를 하면서
맹목적으로 불가항력으로 헤엄쳐 가지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그 너머까지
어디선가 만난 듯한 낯익은 세포에게로
유도미사일처럼
그리움의 꽁무니에 따라붙지

끈질기게 배 한 척이 노 저어 가듯이
아빠의 정자가 기를 쓰고 엄마의 난자에 도달하듯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듯이

그렇게
내 몸의 10의 15승의 세포 중
이상하고 야릇한 세포 한 무리가
말미잘처럼 해파리처럼 수축하고 뻗어가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지


- 최 정례 시 ‘누가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 ‘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한겨울 속에 여름, 한여름 속에 겨울
한 뿌리 속에 꽃과 잎

그것이 꽃이건 말거나
피거나 말거나

너느 아주 멀리멀리서
허물어졌다가 솟아나는 왕국에서
눈보라 치다가 갑자기 고요해지는구나

활짝핀 다음에야 나도 진다
지기 위해 만개했었다

목적도 없는 왕
네 안의 눈보라 속에서
쉬었다가 다시 피어나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첩첩의 꽃이라 하는 순간
끝, 종을 치는구나.


  - 최정례 시 '첩첩의 꽃' 모두




그렇게도 부드럽게 목덜미에 그렇게도 다정하게 귓불에
그러다가 갑자기 낚아채듯 날렵하게
햇빛이 발꿈치를
햇빛이 발꿈치를 쫓아와 물어뜯어

몸을 피해도 쫓아오고
캄캄한 방에 갇혔는데도
햇빛이
하백의 딸 유화의 허벅지로
어찔어찔하게

햇빛과 자고 하백의 딸
닷 되들이만 한 알을 낳아
그 알을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의 깃털이 덮어주어
으앙하고 한 아이가 알에서 걸어 나왔듯
너 깜깜절벽 쾅쾅 웅덩이
적막강산에 엎드려 만 번 절해라

그때처럼 잉잉거리게
햇빛이 벌 떼처럼 달겨들어
혼자 있는 겨울 유리창
으앙하고 또 한 아이 걸어 나오게


- 최 정례 시 ‘겨울 유리창‘
* 시집, 레바논 감정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가집의 국수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수발을 빤다

오래 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 최 정혜 시‘칼과 칸나꽃‘
* 시집, 레바논 감정




어머니가 꼼짝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오줌과 똥을 치우느라 엎드려 있는데
병원 밖 멀리 기차가 배추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느닷없이 그 짐승이 거기를 가로질러 갑니다

그 짐승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무뚝뚝하기도 하고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햇빛 무서운 대낮에도 마주친 적 있습니다
아이가 잊고 간 도시락 갖다주러 가다가
반짝이는 잎 그물 사이로
농담처럼
그 짐승이 휙 지나는 겁니다
털 오라기 하나 떨구지 않고
길모퉁이 만개한 제비꽃 속으로

두 귀를 펼친 코끼리처럼
잎 그물 속에 출렁이다가
딱정벌레 오리나무 잎 갉아먹는 소리 속으로

어느 날인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된 그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던 것도 보았습니다

내미는 손 잡혀버릴 것만 같아
손 내밀지 못하고
묶어서 자루에 넣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지난 유월 오빠가 집 앞 계단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왜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가 잡아 지고 왔던 자루
그는 우리에게 아이스케키를 사다 준 것이었는데
자루 속에는 젖은 얼룩과 막대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 최 정례 시 ‘슬픔의 자루‘
* 레바논 감정




거꾸로 꽂혀 서 있었던 이제 남이 된 내 시집을 뒤적거리는 밤. 식어버린 관계가 되어 난처해진, 피하려다 마주쳐서 읽게 되는 낯 뜨거워지는 밤.

오늘 밤은 그래, 수동적으로 남의 손에 의해 아주 조금 숨을 한번 쉬어본 거다. 이젠 남의 힘을 빌려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거다.

쓸데가 전혀 없는 물건이 되기 위해. 배반으로 달려가 변해버리는 말이 되기 위해.

화염은 작아지다 꺼져버리고 마침내는 깜깜해지지.

잊혀지기 위해. 썩는 살이 되기 위해, 바이러스의 침노로부터 잠시 마비되기 위해. 우선 항생제를 한 알 삼키고.

한없이 멀어져 간 거기, 닿고 싶어 하는 이 그리움의 헤르페스로부터 저항하기 위헤 웬수같이, 항생제를 또 한 알.


- 최 정례 시 ‘자기 시집 읽는 밤‘
* 레바논 감정




휘늘어졌구나, 흥
靑牛를 비껴 타고 綠水를 홀로 건너
천태산 깊은 골에 불로초를 캐러 가듯
새순 돋는 버드나무가
흥,
초록빛 혀를 내뿜으며

푸른 비 푸른 소
허공의 강을 건네주고

청산도 녹수도 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 간에 저절로
휘늘어져서

한시절 경국지색이
가는 허리 긴 치마 늘어뜨리고
전국을 휩쓰는 대하드라마의
마마, 불로초를 드시옵소서처럼
결국 기울어뜨리려고

쓸데없이
누구 또 넘어뜨리여고
흥, 봄이 와서

천태산 깊은 골에 불로초를 캐러 가듯


- 최 정혜 시 ‘경국지색’
* 레바논 감정




네가 마지막 선물이라고 준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건네준
Art를 기술이라고 번역한 책
몸살을 앓으면서 읽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그럴까, 그럴까?
미소짓는 기술, 걷는 기술
허리 비틀며 눈흘기는 기술이 아니고
혼자 피었다 혼자 쓰러지면서
어느새 벌판에 이르는 기술

하늘을 나는 새나 바닥을 기는 쥐같은 것들은
어디서 어떻게 늙어 자기 몸을 눕히는지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
찌푸린 한 구름을
너와 나의 머리가 함께 이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
너를 지우고 나를 지우면서
쥐구멍을 뒤져 늙은 몸을 눕힌 쥐를 만날 때까지
가보려고 했다

씨름 선수가  등배지기의 기술을 익히듯이
새끼새가 벌레를 받아먹고 퍼덕이다가
어떻게 절벽 아래로 내리 꽂히는지
나에게 읽히고 읽혔었다

삼키고 토하고 삼키다가
언제부터 내버려 두었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발자국들
어룽대며 변해가는 페이지들 위에서
먼지에 덮여 있었다



- 최 정례 시 ‘사랑의 기술‘




그는 내 이름을 끊으려 했다고
끊겠다고 했어요

그가 공사장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해머로 내리치는 걸 봤어요
드릴로 구멍을 파고 불칼로 쇠를 잘랐어요
그는 느닷없이 소리 지르고 쌍욕을 해댔어요
그러다가도
날아가던 작은 새를 보고
그것은 참새가 아니라 방울새라고 했어요

나는 그게 방울새인 줄 처음 알았어요


- 최 정혜 시 ‘아라베스크’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2006) 中에서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본처들은 급습해
첩의 머리끄뎅이를 끌고 간다

상투적 수법이다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퇴근해 돌아오는 사람을
집 앞 계단을 세 칸 남겨놓고
갑자기 심장을 멈추게 해 끌고 가 버린다
오빠가 그렇게 죽었다

전화를 받고
허둥대다가
스타킹을 신는
그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유예하자고
고작 그걸 아이디어라고
스타킹 위에 또 스타킹을 신고
끌려 가고 있었다


- 최 정례 시 ‘스타킹을 신는동안‘
*200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개 있다
빠리바게뜨,엠마
김창근베이커리,신라당,뚜레주르

빠리바게뜨에서는 쿠폰을 주고
엠마는 간판이 크고
김창근베이커리는 유통기한
다 된 빵을 덤을 준다
신라당은 오래되서
뚜레주르는 친절이 지나쳐서

그래서
나는 빠리바게뜨에 가고
나도 모르게 엠마에도 간다
미장원 냄새가 싫어서 빠르게 지나치면
김창근베이커리가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었는데
하면서 신라당을 가고
무심코 뚜레주르도 가게 된다

밥 먹기 싫어서 빵을 사고
애들한테도
간단하게 빵 먹어라 한다

우리 동네엔 교회가 여섯이다
형님은 고3 딸 때문에 새벽교회를 다니고
윤희 엄마는 병들어 복음교회를 가고
은영이는 성가대 지휘자라서 주말엔 없다
넌 뭘 믿고 교회에 안 가냐고
겸손하라고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라며
내 귀에 테이프를 꽂아놓는다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깃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그렇다
살 수 밖에 없다


- 최 정례 시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
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울쩍이면서
여기는 불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익을 만들자구

플리즈 리릴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나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 달란 말이야


- 최 정례 시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호텔 캘리포니아
한동안 그 노래에 갇혀 흥얼거렸지
콜리타꽃 향기, 희미한 불빛, 내 머리를 만져주듯
한 여자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도 울려 왔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대전역쯤의 플랫폼인 줄 알았는가
호텔 캘리포니아인 줄 알았는가
장마 뒤 길바닥 고인 물에 올챙이

햇빛을 총알처럼 되쏘는 그 속을
미친듯 휘젓고 다니다가
"배추요, 무요, 양파요"
행상의 바퀴가 고인 물 튀기며 지나갈 때
잠시 혼절한 그 때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구름 뒤에 천둥소리 아득하게 떨어지고
어떤 춤은 기억되고 어떤 춤은 잊혀지는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너
혼자서 듣고 있지
"어서 오세요. 당신은 이곳의 포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지만 결코 떠나지 못할 걸요"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배추요, 무우요, 양파요오"
그 소리 잊지 못할 걸요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버리도록


- 최 정례 시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나뭇가지 한 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 가지 백 가지가 뻗어가는 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한 가지쯤은 따라갈 것도 같았다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얼마나 견고한 어둠인지
그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말을 하므로
돌멩이가 나를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길이 길인 줄도 모르고 가고 있었다


- 최 정례 시 ‘돌멩이가 나를 쥐고‘
*햇빛 속에 호랑이 / 세계사




** 최 정례: 1955년, 경기 화성시, 사망 2021년 1월 16일 (향년 66세)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데뷔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수상

2015. 제8회 오장환문학상
2012. 제14회 백석문학상
2006. 제52회 현대문학상
2003. 제10회 이수문학상
1999. 김달진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