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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위트’ & **’시니컬’ - 신 미균 시.

“ 환하지만 때로 어두워지는 삶 ”



*wit(위트): 명사, 말이나 글을 즐겁고 재치 있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능력.

**cynical(시니칼): 1. 형용사 냉소적인
2. 형용사 부정적인(중요하거나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3. 형용사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들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 신미균 시 ‘폭탄 돌리기’모두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무가 잎사귀를
부르르 떠는 것은

그동안 들었던
새들의 소리를
털어내는 것이다

틈만 나면
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죽겠다 못살겠다 싫다
하소연 하는 것들을

묵묵히 들어주고
감싸주다 보면

나무도 어느 날은
진저리를 치고 싶을 것이다

시누이 많은 집
맏며느리처럼


- 신 미균 시 ‘ 사시나무 ‘
  * 시와소금, 2023 겨울호




냄비 속에는
퉁퉁 불은 하늘
냄비 밖에는
조용한 뒷마당

수제비와 나는
국물 속을 떠다니고
뒷마당에는
나비 한 마리
느릿느릿
엉겅퀴를 지나
백일홍을 지나
자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있고

밖에서 잠근 문이
딸깍,
열릴 때까지
퍼먹어도 퍼먹어도
도로 한 냄비가 되는
하루


- 신 미균 시 ‘안녕, 수제비‘
* 웃기는 짬뽕, 푸른사상, 2015





바위가 쑥부쟁이 하나를
꽉, 물고 있다

물린 쑥부쟁이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구부정하다

바람이 애처로워
바위를 밀쳐 보지만
꿈쩍도 안 한다

바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쑥부쟁이는 그래도
고마워서
바람이 언덕을 넘어갈 때까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 신 미균 시 ‘ 업‘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벚나무 아래
아흔하나 어머니
앉아 계시네

바람 불면
벚꽃잎이
튀밥처럼 쏟아지네

이제는 가야된다고
인사드리면
밥 먹고 가라고
벚꽃을 잔뜩
주머니에 넣어주시네

늦기 전에
어서 가라고
가라는 시늉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내 옷을 꽉 잡고
놓지 않으시네


- 신 미균 시 ‘말랑말랑한 멜랑콜리‘
  * 시사사 2022년 겨울호




한 손에 꽈배기를 든 노인이
상가 계단에 앉아 있다

짧은 머리에 새 운동화 새 옷을
입고 있다

바람이 불고
벚나무 꽃잎들이 흩날렸다

몸을 비비 꼬던 노인이
꽈배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설탕가루 같은 벚꽃 잎들이
또 흩날렸다

밤이 되자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꽈배기를 다 먹은 노인이
빈손으로 앉아있다

꽃잎을 다 떨어뜨린 벚나무가
빈손으로 서 있다


- 신 미균 시 ‘나들이 ‘
  * 시와문화, 2021년 겨울호




철탑 위에 까치 한 마리 있는 그림자
운동장을 지나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쓰러지는 철탑을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자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가 누구를 잡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담쟁이가 벽을 잡고 있는지
벽이 담쟁이를 잡고 있는지
나무가 땅을 잡고 있는지
땅이 나무를 잡고 있는지
내가 세상을 잡고 있는지
세상이 나를 잡고 있는지

철탑이 까치를 잡고 있든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든
그림자는 운동장을 지나갑니다


- 신 미균 시 ‘까치와 철탑‘
   * 시와편견, 2022 가을호




검은댕기해오라기가
물살에 몸을 감추고
수중보에 오르려는 은어를
몰래 잡아먹고 있다
은어는 그것도 모르고
거친 물살을 거스르며
악착같이 강 상류를 향해
올라간다
물살이 아무리 거세도
물총새와 백로와 할미새가
잡아먹으려 아무리 위협해도
강 상류로 향하는
은어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심지어 투망에 걸려
수족관에 갇혀 있으면서도
상류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은어를 보며
은어가 그렇게 악착같이 가려고 했던
강의 상류를 생각해 본다
그곳에 가면 정말 상류사회의 우아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류로 올라가 본다


- 신 미균 시 ‘ 에스컬레이터‘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문이 열리고 뻐꾸기가 튀어 나왔다

  깜빡 잠이 들려고 하던 S가 벌떡 일어나 뻐꾸기를 잡으려는데 뻐꾸기는 얼른 집 속으로 들어갔다 뻐꾸기가 다시 나오려면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아니 더 기다릴
필요는 없다 지금이라도 뻐꾸기 집 문을 열고 그 속에서 눈도 깜짝하지 않는 뻐꾸기를 꺼내 부숴뜨리면 된다 S는 어떻게할까를 망설인다 그러면서 벽에 스르르 기대앉아
버린다 일단 앉았다는 것은 기다리면서 생각해보겠다는 S의 오래된 습관이다 지금까지 저 뻐꾸기가 무사한 것도 S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다 불도 켜지 않은 밤의 캄캄함이
S의 감정을 조금누그러뜨렸다 S는 잠잠해졌다 얼마쯤 지나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또 뻐꾸기가 뻐꾹하고튀어나왔다 S가 순간 벌떡 일어나서 뻐꾸기의 목을 잡아챘다
뻐꾸기가 찍 늘어나면서 스프링이 딸려 나오고 태엽까지 딸려 나왔다 S는 뻐꾸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빈손을 털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동시에 수많은 문이 열리고 뻐꾸기들이 튀어나와 S를 쪼아댄다 S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손을 휘젓는다 뻐꾸기가 쪼는 S의 머리에서 스프링이 뽑혀 나온다
S는 고슴도치처럼 또는 성게처럼 동그래져서 방안을 굴러다닌다 뻐꾸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많아져서 그 스프링들을 뽑아버린다 S가 뽑혀져 방안에 누워있다



- 신 미균 시 ‘누가 죽었을까요‘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면
손을 떠난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공도 그 중에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공은 잠시동안이지만
인력을 거부할 줄 안다
돌이나 책처럼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튀어 오름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한 번 떨어진 물체는
대부분 그 자신이 부서지거나
금이가서 상처를 입게 되지만
공은 내색하지 않는다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대로 주저 앉아야 하는 심정을
속을 비우고 공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지금 어떤 물체 하나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


- 신 미균 시 ‘ 공 ‘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우리는
발이 푹푹 빠지는
시커먼 갯벌 위를
기고
뛰고
뒹굴면서도
즐거웠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썰물에 휩쓸리면서도
좋았다

낚시 바늘에
옆구리가 꿰어
지느러미가 떨어져나가고
살 껍질이 벗겨져도
상관없었다

못생긴 것들이
꼴값을 한다고
혀를 끌끌 차도 우리 둘은 행복했다


- 신 미균 시 ‘짱뚱어 사랑‘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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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미균 시 ‘ 치매’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앞바다의 청산도에는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밭들이
해안까지 이어져 있다
밭은 지금 보리가 익어 누렇다
이 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무릎 정도까지만 돌을 쌓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는다
그런 뒤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는다
그렇게 한 삼년을 두어
뼈만 남은 뒤 묻는다
썩지 않은 성한 몸으로 선산에 들면
조상이 노해
풍랑을 일으켜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데려 간다는
믿음에서 생긴 풍습이다

들 것 위에 누운 사람 위로
말라버린 토마토케첩 가루가
날아갔다


- 신 미균 시 ‘ 맨홀과 토마토케첩 8‘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구급차 소리가 맨홀 앞에 멈추어 섰다
구급차는 낙타 같기도 하고 표범 같기도 하다
호기심이 많아 늘 두리번거리고
남보다 앞서 가려고 한다
한 사람이 구급차 뒤로 물러섰다
맨홀 속을 들여다보던 다른 사람도
구급차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을 따라온 검은 색안경 낀 사람도
구급차 뒤로 물러섰다
자전거를 탄 사람도
구급차 뒤로 물러섰다

그때 나는 팔 쪽으로 계속
미끄러져 내리는 토마토케첩의
간지러운 촉감을 느끼고 있었다


- 신 미균 시 ‘맨홀과 토마토케첩 3‘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맨홀 앞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 사람이 맨홀 속을 들여다보자
모자를 쓴 사람이 걸어왔다
그 사람이 맨홀 속을 들여다보자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내렸다
그 사람이 맨홀 속을 들여다보자
뛰어가던 사람도 멈추어 섰다
그 사람이 맨홀 속을 들여다보자
자전거를 탄 사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이 맨홀 속을 들여다보자
맨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맨홀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핫도그를
한 입에 베어 물려고 했는데
토마토케첩이
계속 손목을 지나 팔 쪽으로
흘러내렸다


- 신 미균 시 ‘맨홀과 토마토케첩 2‘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풀잎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
손을 베었다

나는 종이에도 잘 베이고
작은 상자나 책받침
플라스틱 모서리에도 잘 베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에도
잘 베이고
창 밖에 내리는 어둠에도
잘 베인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베이고
아득한 절벽과 비탈길에도
잘 베인다

빗물이 닿으면
베인 곳은
더욱 더
쓰라려진다


- 신 미균 시 ‘ 비 ‘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토끼가 산비탈을 급하게 뛰어내려오다
뒷발이 길어
굴러버린다
굴참나무 밑둥과 떡갈나무 사이를 지나
나뭇잎들에 범벅이 되어
동그랗게 구른다
꽹가리와 솥뚜껑과 막대기를 든
마을 청년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함께 굴러 내려온다

굴러가던 토끼는 지금까지 굴러가던 힘으로
계속 굴러간다
산 바깥으로
자신 바깥으로
앞 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자기가 토끼가 아니라 공인 것처럼

토끼는 구르고 굴러 마침내
절벽 아래로 튕겨져 나간다
낙엽들 몇도
마을 청년들의 소리도
절벽 아래로 튕겨져 나간다

토끼가 굴러간 하늘은
아무 흔적도 없이 휑하다


- 신 미균 시 ‘산토끼, 토끼야‘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하루종일
땅바닥만 보고 걸어다녔는데
녹슨 못 조각 하나 줍지 못했다

고향으로 가야겠다


- 신 미균 시 ‘서울’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큰오빠 집도 괜찮고
작은오빠 집도 괜찮고
시골에서 방 하나 얻어 혼자 살아도 괜찮고
양로원도 괜찮고
아무래도 괜찮다

네모난 물건을 싸면
네모가 되고
쭈글쭈글한 물건을 싸면
쭈글쭈글하게 되는
자식들이 접으면 접는 대로
구기면 구기는 대로
그대로 있는
여든도 넘으신 어머니

얇아진 가슴 찢어지지나
마십시오


- 신 미균 시 ‘창호지‘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달이 떴군
스산하게 바람도 부는 군
오늘밤엔 누구의 간을 빼 먹을까
안 되면 쓸개라도 좀
아 저기 만만해 보이는
꽁지머리가 하나 오는 군
꼬락서니를 보니 없어 보여
걔는 안 되겠고
저기 저 베르사체 안경
구두는 발리에다
호피무늬 바지라
진짤까
설마 짜가는 아니겠지
요즘 하도 속 빈 것들이 많아서
알 수가 있어야지
하여튼 일단 겉모습은 화려해 보이니까
눈치 못 채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음, 술 냄새도 제법인 것 보니 좀 마셨군
정신을 못 차리는 어리석은 것
부축해 주는 척 하다가 슬쩍

이게 뭐야
설마가 오늘 밤 늑대 죽이네
그러길래 인간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니까
정말 간도 쓸개도 없는 것들도
많다니까


- 신 미균 시 ‘늑대 가죽 재킷‘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떨어진 타일의 귀퉁이를
강력한 순간 접착제로 붙이려다
손이 덜컥 붙어버렸다
그 손을 떼려고
발로 타일이 붙은 벽을 밀다
발도 덜컥 붙어버렸다
손과 발을 떼려고
온몸으로 타일이 붙은 벽을 밀다
온몸이 벽에 덜컥 붙어버렸다
이제 어떡하지


입은 안 붙었구나


- 신 미균 시 ‘결혼’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1층밥을 먹는다
2층 싸운다
3층 공부한다
4층 임종한다
5층 집들이한다
6층 TV 본다
7층 사랑하고 있다
8층 화장실에 있다
9층 술 마신다
10층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
11층 울고 있다
12층 노래한다
13층 아무도 없다
14층 아파서 누워 있다
15층 잔다

초콜릿을 덮어 씌워 놓아도
속맛은 다 다르다


- 신 미균 시 ‘초콜릿 케이크‘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머리에 무스를 바르는 것은
생활이 자꾸 풀이 죽기 때문이다

나는 기진맥진한 키다리 붓꽃에게도
하늘매발톱꽃과 바위구절초에게도
무쓰를 발라주었다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에게도
불 켜지 않은 방에도 무쓰를 발라 주었다
오징어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닭 튀김에도
무쓰를 발라주고
쐐기풀에만 알을 낳는 공작나비에게도
삼베와 합성수지 심지어는 에나멜 칠한
강아지 인형에게도 무쓰를 발라주었다

억지로라도
오늘 하루를 뻣뻣하게
일으켜 세웠다


- 신 미균 시 ‘낭떠러지‘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36개월 할부로 들여놓은 장롱 앞에
24개월 할부로 컴퓨터를 들여놓고
그 옆에 18개월 할부로 냉장고를 사고
그 옆에 12개월 할부로 책상과 의자를 사고
6개월 할부로  텔레비전과 오디오
3개월 할부로 옷 구두 전화기 식료품을 사서
월셋방에 누워 있으려니까
바람도 할부로 쉬엄쉬엄 들어온다
그렇다면 내 목숨은
몇 개월 짜리 할부일까


- 신 미균 시 ‘ 할부인생’





아침이 되면
나는 가면을 손질한다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광기 어린 주술사의 가면은
머리에 꽂힌 꿩의 깃털에
가볍게 스프레이를 뿌려주고
이탈리아 고귀한 백작 부인의 가면은
눈 주변 마스카라에 특히
신경을 쓴다 눈을 위로 치뜨거나
비스듬하게 내리뜨는 시늉도 해 보고
우아하게 미소 짓는 시늉도 해 본다
야채 장사에게 이 가면을 쓰면 너무 무리야
미술관이나 고급 백화점에 갈 때 써야지
가면도 격에 맞아야 하니까
나는 망토 달린 옷을 입은 듯 어깨를 펴고
고개를 뒤로 젖혀 본다
파푸아뉴기니의 정령 가면은
좀 무섭게 생겼으니까
채무자에게 갈 때 쓰고
인디오의 짐승 가면은 밤늦게
귀가할 때 써야겠다

나는 아침마다
가면 뒤에 나를 감추고
필요할 때마다 다른 가면을 꺼내
재빨리 바꿔 쓰는 연습을 한다


- 신 미균 시 ‘푸른 모빌‘




마당 가득 널어놓은
풀 먹인 옥양목 이불 홑청을 걷어내자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동생과 나는 걷어놓은 홑청 위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고
할머니는 때묻으면 안 된다고 야단치시며
구겨져 있던 홑청에 물을 뿜는다
한입 가득 물을 머금고 있다
푸우 하고 뿜으면
마루 위에 희미하게
무지개가 어리고
우린 무지개를 잡으려고
뛰어다니고
할머니는 홑청을 접어
꼭꼭 밟기 시작한다
아주 꼭꼭
정성 들여서 꼭꼭

어린 시절을 꼭꼭 밟으면
세월의 주름이 펴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부스스 일어나
다듬이질하고 이불 꿰매고 계실까

이불 홑청만큼 넉넉하게
온몸을 감싸주시던
할머니



- 신 미균 시 ‘옥양목 이불 홑청‘





간단히 입고 벗을 수가 있다
일상적인 일을 하거나
조깅 에어로빅을 할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입고만 있어도 땀이 난다
가볍고 튼튼하다
모자가 달려 있어
여차하면 떼어서
남에게 뒤집어 씌울 수가 있다
우주인의 멋과 색깔도 느낄 수 있다
한번 입기 시작하면
계속 입고 싶어진다

남녀공용
프리사이즈다


- 신 미균 시 ‘거짓말‘
* 세계일보, 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





외딴 풀밭 위에
나무 빨래판 하나
누워있습니다

우툴두툴한 돌기가
다 사라져 밋밋합니다
귀퉁이도 많이 닳아
군데군데 떨어져나갔습니다

더 이상 물속에서 퉁퉁 붇거나
방망이로 두들겨 맞을 일은 없습니다

폭신폭신한 풀이
편안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
빨래판 끝에 앉아
살살 춤을 춥니다

햇볕은 따뜻하고
하늘은 푸릅니다


- 신 미균 시 ‘해피 엔드 1‘
* 문학청춘 21년 겨울호/ 시인시대 2022년 봄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가
오랜만에
잠깐 눈을 뜨셨다

식구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희미하게 웃으신다

환한 대낮이었다

갑자기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으시며
들릴 듯 말 듯
숨소리로 말씀하신다

어여, 불 꺼
전깃세 많이 나와


-신 미균 시 ‘습관‘
* 열린시학 여름호, 2021




멋대로 살겠다고
집 나갔던 언니가 모처럼 들어 왔습니다

막무가내로 돈 달라고 망치로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엄마의 가슴이 석고처럼
부드러워서
못이 쑥쑥 잘 들어갔는데
이제는 콘크리트 벽이 되었나 봅니다.
못이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못대가리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도 들립니다.
언니가 못을 박다 자기 손을 내리쳤나 봅니다.
아프다고 펄펄 뛰는 소리도 들립니다.
콘크리트에 박힌 못은 빼기 힘듭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집니다.
그렇다고 밥만 축내는 내가 달려들어
언니를 말리기도 힘듭니다.
엄마의 가슴에 바람이 부딪히나 봅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립니다.  
잠시 후, 전기드릴 소리가 납니다.
망치로 안 되니까 더 강력한 걸 가져왔나 봅니다.
전기드릴  때문에 집이 흔들립니다.

참지 못한 내가
전원 스위치를 내립니다.

갑자기, 나를 발견한 엄마와 언니가 달려들어
대못 나사못 콘크리트못
닥치는 대로 나에게 박아 대기 시작합니다.

내 가슴은 합판처럼 얇아서  
각종 못이 쉽게 잘 박힙니다.
엄마와 언니는 있는 대로 못을 박더니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밥값이라도 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내일 아침 엄마는 빨간약
언니는 반창고를 들고 몰래 오다가
내 방 앞에서 마주칠 게 뻔합니다.

구멍 뚫린 가슴에서
웃음이 실실 새어나옵니다.


- 신 미균 시 ‘꽃 청춘 이모티콘‘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덜 구워진 어둠을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비 오는 유리창과 날짜 지난 신문을 갈아
찍어 먹는 소스를 만들고
으깬 하품을 동그랗게 말아
접시를 장식한다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는
팔걸이의자와
동그런 의자와
흔들의자를
식탁에 둘러앉힌다

잠시 후 동그란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구석으로 치운다
팔걸이의자도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방으로 옮긴다
흔들의자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밖에 내다 놓는다
그런데 또 잠시 후

뭔가 허전한 것 같아 흔들의자를
동그란 의자를 팔걸이의자를 가져다
식탁에 둘러앉힌다
변덕을 부려도 투덜대지 않는 의자들 때문에
기분이 괜찮아진다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

어둠에 칼을 대자
육즙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최대한 얇게 썰어 천천히 먹는다
점점 길게 늘어나기만 하는

어둠을


- 신 미균 시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기차를 놓쳤다

방금 전 떠났다는데
흔적도 없다

건너편 나무들과 의자들과
표지판들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나를

찔레꽃과 딸기꽃과 제비꽃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나를

낮달과 전깃줄과 말뚝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나를

바람 한 줄기 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 신 미균 시 ‘색즉시공‘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기린이 피었습니다
나무보다 높게
꽃처럼 피었습니다

위에는 뭐가 있을까
더 위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목을 쭉 빼고
위만 쳐다보니
자꾸자꾸 키가 커졌습니다

키가 너무 크다보니
발가락이 간지러워도
긁을 수가 없습니다


- 신 미균 시 ‘ 기린’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반짝이 하트 문양이
붙어 있는
파리채로
죽어라 도망 다니는
파리 한 마리를
내리친다

미안해
널 몹시
사랑해서야


- 신 미균 시 ‘스토커 1’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새끼 고양이 배고플까 봐
그런다면서
입을 억지로 벌리고
자기가 먹던
땅콩버터를 먹인다

재미있게 놀아준다고
고양이 목을 잡고
뱅뱅 돌린다

축 늘어진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자꾸 뽀뽀를 한다

추울까 봐
자기 모자 속에 넣어
꼭꼭 싸매 준다

싸맨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간다고
가방 속에 넣는다


- 신 미균 시 ‘스토커2’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바짝 마른 아버지를 뜯어먹고 있는데
둘째가 같이 좀 뜯어야겠다고
달려듭니다
할 수 없이
둘째에게 지느러미 쪽을
뜯어 주려는데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막내도 달려옵니다
셋이서 정신없이 뜯다 보니
순식간에
껍질과 뼈와 지느러미만
남았습니다

막내는 이것을 끓여서
국물까지 우려먹자 하고
둘째는 시간이 없다고
대충 쪼개서 나누자 하고
둘이 서로 고집을 부리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떨어져 버린
말라붙은 눈알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 신 미균 시 ‘좀비들’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그것의 입구에 계단이 있다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다
계단을 잡아당긴다
끌려오지 않는다
다리가 아파 온다
그것의 손에도 계단이 있고
눈에도 계단이 있다
계단에 앉았다 일어난다
내가 왜 계단을 오르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자꾸만 작아진다
계단은 올라가기 아니면
내려가기뿐이다
개떡 같은 계단이라고
투덜거려 본다
내려가려고 하니 더 힘이 든다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계단에
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계단에
비가 온다


- 신 미균 시 ‘상류사회’




지하철 앞 칸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건너온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무릎 위에
전단지 하나 놓고 간다

전단지가 떨어질까 봐
숨소리도 죽인다

손만 슬쩍 스쳐도
발라당,
죽은 체
나동그라지는
노린재 한 마리

구걸하는 사람이 지나가자
툭툭 털고 다시 살아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하철을 내린다


- 신 미균 시 ‘매미목 노린재과‘




그가, 느닷없이
바늘이 돋아난 혀로
내 머리를 찌른다
머리가 놀라 단번에
뚝, 떨어진다

다이아몬드로 코팅된 혀는
내 심장을
얇게 채 썰어 놓고
지글지글 끓는 혀로는
숨통을
옆구리를
손가락을
지져댄다

내가 죽은 듯 움직이지 않으면
화끈하게 사랑한다는 혀가
나의 입술과 눈 사이를
자근자근 다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젤리같이 말랑말랑해진 혀가
여기저기 핥아대기 시작한다

정신 차린 머리가 슬금슬금
목 위로 올라가
총공격을 하려 하면

어느새, 창문 밖으로 펄럭펄럭
날아가 버리는



- 신 미균 시 ‘펄럭이는 혀 ‘




한여름
베란다 유리창이 다 닫혀 있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거다

편지꽂이에 편지가
그대로 꽂혀 있으면
아직 아무도 안 들어온 거다

현관문에 피자집 광고지가
그대로 붙어 있으면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거다

그래도 혹시나
벨을 눌러 본다
기척이 없다

혼자서 현관문을 딸깍, 열면
집 안에 있던 냄새들이
와락, 안긴다

냄새만 있어도
따뜻하다


- 신 미균 시 ‘가족 ’




저녁 무렵
토끼 한 마리
얼어붙은
눈 위를 살살 걷는데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

토끼가 깜짝 놀라
멈춰 선다

누가 따라오나

주위를 둘러봐도
구르는 마른 덤불 하나 없고
조용하자
토끼가 또 움직인다

뽀드득!
무서워진 토끼가
꼼짝도 못 하고
동그란 눈이
더 커져
숨만 할딱거린다

모르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무서운 거다


- 신 미균 시 ‘모노드라마‘





아무도 없는 겨울 바닷가
모래밭에 난 발자국들을
파도가
하나씩 하나씩
만져 보고 있다

이건 물새 발자국
이건 사람 발자국

손 한번 잡아 보지도 못했는데
그냥 갔네

팔을 뻗을 때마다
잡을 것 없는
하늘이 열렸다 닫힌다

외로운 파도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꾸만 모래 속으로
눈물을
감추고 있다


- 신 미균 시 ’뜨거운 수프를 후후 부는사이‘



침 삼키는 소리가
초침보다 앞서간다
침을 삼키다가
초침으로 이를 쑤시다가
초침을 잡고 스트레칭을 한다
달빛이 창 아래에서
창 위로 솟구친다
초침을 뽑아 달빛을 찔러 대며
초침보다 빨리 충혈되고
초침보다 빨리 목마르고
초침보다 빨리 피 흘린다

땡땡땡
자정이 지나면, 어느새
천장의 사방연속무늬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그러면 종종거리는 초침들이
푸드득푸드득 새들 흉내를 내며
날아가다가
사방연속무늬 그물에 걸려
날개들이 부러지다가
분수처럼 솟구쳐
천장에 달라붙는다

매일 밤
사방연속무늬 시작과 끝을
찾아 헤매다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 신 미균 시 ‘불면’




좁은 골목
어기적어기적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가

임시 번호판도 떼지 않은
새까만 외제 차의 옆구리를
쓰윽
긁으며 지나간다

차 주인이
울그락불그락
펄펄 뛰며
고함을 지른다

할머니가 느릿느릿
허리를 펴고
뒤돌아서

무표정하게
차 주인 어깨 너머

본다
새를
본다


- 신 미균 시 ‘비장의 무기‘




네모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도 천장도 목욕탕 타일도 네모입니다
싱크대 문짝도 냉장고 문짝도 네모입니다

아버지가 네모난 티브이를 켜놓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햇빛도 네모난 베란다를 통과해서 얌전하게
바닥에 네모나게 누워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네모가 스르르 잘려 나가다가
다시 슬그머니 배를 깔고 마루에 눕습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주춤주춤
네모가 잘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밤낮 티브이만 틀어 놓고 자면 무슨 수가 생기느냐
먹은 밥상은 왜 치우지 않았느냐
엄마는 네모난 도마를 꺼내 호박을 동그랗게 썰며
세상 좀 둥글둥글하게 살지
뭣 때문에 그렇게 모가 나서
회사마다 잘리느냐고
도마를 탕탕 두드려 댑니다

네모난 구석방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각이 진 네모로 보입니다

엄마가 눈을 흘기며
방금 만든 동그란 호박전을
갖다 드립니다


- 신 미균 시 ‘은밀한 스케치‘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돌아오지 않는 엄마 대신
크래커를 부순다
건건찝질한 크래커
별로 비싸지도 않은 크래커
밥 대신 하루 종일 먹으라고
두고 간 크래커
부술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부수던 크래커
손가락으로 부수다가
발가락으로 문대다가
온몸으로 뒹굴다 보면
가루가 되는 크래커

검은 깨인 줄 알고 함께 먹었던
개미들


- 신 미균 시 ‘크래커‘
* 웃는 나무, 서정시학, 2007





생각이 삐그덕 움직이자
쇠못 하나가 겨드랑이에서
쑥 빠져 나옵니다
망치로
빠져나온 쇠못을 박아 넣자
등받이가 왼쪽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어렸을 때 동생과 그 위에서
마구 뛰고 싸우고 던지고
온갖 까탈을 부려도
묵묵히 다 받아준 의자
언제고 필요하면
아무 생각없이 털썩 앉곤 했는데

기울어진 의자를 바라보니
어깨가 시큰거리며
풍 맞아 기우뚱해진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오래 됐다고

망치로 이리저리 내리치다
안 되면 버리려고 하다니

이번엔 아무리 돈이 들어도
의자를 제대로
고쳐야겠습니다


- 신 미균 시 ‘오래된 의자‘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 시작, 2003




내가 뱉은 공기를
네가 마시고
네가 뱉은 공기를
그가 마시고
그가 뱉은 공기를
가위꼬리딱새가 마시고
가위꼬리딱새가 뱉은 공기를
푸른점박이비단능구렁이가 마시고
푸른점박이비단능구렁이가 뱉은 공기를
껄떼기가 마시고
껄떼기가 뱉은 공기를
모쟁이가 마시고
모쟁이가 뱉은 공기를

마시면 안 됨

아무도 마시지 않았던 공기를
마셔야 함


- 신 미균 시 ‘전염성이 강한 병에 대한 처방전‘





역삼동 오피스텔 안에 있는 피라미드
이집트의 쿠푸왕의 것도 멘카우레왕의 것도 아닌
서울에 있는 피라미드
친구 따라 그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통로를 찾지 못해
어둡고 답답하고 숨이 막혀 죽을 뻔 했다
파라오에게 가진 재산 다 날리고
간신히 빠져나와
달랑,
짐가방 하나 싸들고
고향집 담 밑에서

집 밖에 얼굴을 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집 밖에 있는 얼굴이
안되겠다고
그만 돌아가자고
집 안으로 들어간 팔 다리를
자꾸만 불러낸다
집 안으로 들어간 팔 다리가
아무도 모르게
뒤꼍을 한 바퀴 돌아
서둘러 나오는데

마루기둥에 붙어있는
삼각형으로 깨진 면도거울 붙잡고
참매미 한 마리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 신 미균 시 ‘피라미드 in 서울 ‘
  * [웃기는 짬뽕]  중에서




그래, 나는 간도 쓸개도 없다

네 마음에 들게 네 맘대로
팔 비틀어 뽑고
다리 꺾어도
끽, 소리도 내지 못한다

느닷없이 목 잘라
얼굴이 없어져도
상체와 하체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려
떼어낸 다음
따로따로 들고 다녀도
눈도 깜짝하지 못한다

간도 쓸개도 없으니

그래, 속 썩을 일 없어
좋다


- 신 미균 시 ‘마네킹‘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복도는 뭘 할까? 아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할일이 없다 복도가 되어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길고 긴 복도 끝에서 끝까지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이어붙인 마디를 밟으며 펄쩍펄쩍 뛰는 게임을 하다가 지치고 힘들어 누워버린 거다 누우니 도무지 할 일이 없나
보다 그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놀이를 하다가 배가 고픈지 알루미늄 창틀과 자루달린 하늘을 줄줄 끌고 와 더듬더듬 먹을 것을 만든다

  이리저리 남의 교실만 기웃대다 쫓겨난 구름은 복도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유리창과 문손잡이와 모서리의 거미줄을 바라만 보고 있다

  복도는 저 혼자 죽지 못한다
  혼자 목도 조르지 못하고
  혼자 면도칼도 잡지 못하고
  혼자 약도 못 먹는다
  밖에 나간 적이 없으니
  자동차에 치일 염려도 없다
  벼락에 맞을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앗, 아직도
  하수도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계셨다, 복도

  쉿, 조용히 해
  뛰다 또 혼날라


- 신 미균 시 ‘평면의 재구성‘





** 신 미균: 1955 서울 출생
서울교육대학 졸업
1996년  월간『현대시』로 등단
2003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5년 [웃기는 짬뽕] 세종나눔도서 선정
시집으로 [맨홀과 토마토케첩][웃는나무][웃기는 짬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