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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그대’ 가까이,,‘존재의 부재‘’ - 이 성복 시

차갑지만,, 따슷하다.








1

바람에 시달리는 갈대 등속은
저희끼리 정강이를 부딪칩니다
분질러진 다리로 서 있는 갈대들도 있엇습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정강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립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3

나무 줄기 거죽이 자꾸 갈라지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집니다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밥 먹고 옷 입는 일 외에는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멀쩡한 나무를 두드리니잔 가지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한 글자만 허락해주십시오
저희에겐 한 글자만 허락해 주십시오진흙창에 박힌 신발을 마른 풀에 비비며
저희는 돌아갈 일을 생각합니다

4

그대 계신 곳을 멀리
뒤돌아가다가
겨울 나무들이 선 곳에
나도 섰습니다

그대 비밀을 안다면
나도 그대의 비밀이 될까요
눈송이 입자처럼 고운 비밀이
내게도 있었던가요

지금은 멎어버린 샘 가의
돌무더기처럼
나는 버려져 있습니다

간간이 비 뿌리거나
바람 스치면
그대 이름 되뇌어보면서
5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해질녘이면 동네 뒷산을 헤벴습니다

신화나 예감 같은 것,
그런 것에나 쫓겨다니면서
지치면 겨울 나무들이 줄지어
섲 곳에 나도 섰습니다한쪽 어깨가 바람에 깊이 패이도록
마른 나무들의 호흡을 받았습니다.



- 이 성복 시 ‘그대 가까이(1~5)‘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간이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이 성복 시 ‘서시(序詩) ‘
  *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음이월의 밤들은 저마다
꽃핀 동백 가지 입에 물었다
종일 흐리다 환한 밤에는
진눈깨비 다녀가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운 다음날 아침엔
사랑이 지나갔다, 발자국도 없이


- 이 성복 시 ‘33 음이월의 밤‘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시 ‘남해금산’모두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
시간(時間)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 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 속인 듯 아득히 기적(汽笛)이 울고
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우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이성복 시 ‘모래내 1978’모두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이 성복 시‘ 極地에서‘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오늘도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테이블이 빈 병에 둘러싸일수록 마음에는 틈이 생긴다
식도로 들어가던 술 한 잔은 마음으로 향한다

술은 대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이토록 무거웠던 내 진심을 떠오르게 만들다니

온몸에 들어차는 소주 덕에 솔직함은 이미 입안에 떠있다
그 솔직함이 익숙지 않은 나는 이내 구역질로
진심을 화장실에 내뱉어버린다

너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은
오늘도 쓰라린 화학작용으로 마음속에 다시 차오른다
그런 연유도 모르고 난 해장만하고 있구나


- 이 성복 시 ‘소주’
[2019 신춘문예와 무관한 시집}


                                                                       




한 여름 푹푹 찌는 찜통 같은 날 팥죽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선풍기 바람을 쐬어 본 사람은 안다,
그건 바람이 아니라 끈끈한 불덩어리임을

최고속으로 돌려도 모자라 온통 벗어젖히고,
날개 바싹 당겨놓고 온몸과 머리가 멍멍하도록
바람을 맞으면, 맞을수록 하루 버티기가 장난이 아님을

바람 한 점 없는 창밖을 내다보면 기우는 벽에
금이 가듯 소름 쭉쭉 끼치고, 열기와 질식의 접점에서
활활 달아오르는 몸과 두터운 아마포처럼 감기는 바람은
어묵처럼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처럼 불어 대지만 바람이 아닌 불덩어리와
바람이 아닌 줄 알면서 막무가내로 달려붙는 몸은
느닷없이 퓨즈가 나가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전에는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뜨거운 대가리를 뒤로 한 채
선풍기는 돌아간다, 사정없이 돌아간다


- 이 성복 시 ‘선풍기’
[어둠의 시], 열화당, 2014.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이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을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 이 성복 시 ‘빛에게‘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오늘 아침 내 앞에 놓인 생은 소 여물통 같다 이제는
쓸모없이 툇마루에 놓인 그것은 거의 고단한 기억이나
다름없다 미세 먼지가 그림자처럼  내려 앉고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그곳에 일찍이 나의 양식과 노고와 눈물과
회한이 었었다 거기서 목백일홍의 화사한 꿈을 꾸기도 했지만,
꿈은 이제 죽은 목백일홍의 꿈으로만
남아 있다 거기서 문득 성층권에서 귀환한 아내가
아프다거나, 오래 안 신던 신발이 집을 나간다거나.....
그럴지라도 천 년도 더 묵은 노환의 아버지는 나와 내
아이들을 몰라보신다 아득하다는 것은, 까마득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냥 텅 빈 것이
아니라 놋주발에 담긴 물처럼 그 속까지 환히 비치는
생, 그 속에서 참매미가 애타도록 울고 나는 驚氣경기하는
아이처럼 부르르 떨며 일어난다 그럴 때 나의 생은 나를
키웠을지도 모를 새엄마처럼 낯설다 그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문득문득 내가 깨어나는 것은
허물어지는 생의 경혈마다 이따금 가느다란 침 같은
것이 꽂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수술해야 할 그 자리는
눈 까뒤집고 바라보면 돼지의 분홍 음부처럼 곱다, 고와라,
아, 거기 한번 손가락에 침 묻혀 간질어볼까? 고단한
섹스에 은박지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은 마냥 아름답다


- 이 성복 시 ‘나의 아름다운 생‘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39


흰 풀죽 쑤어
천지에 처바르면
이 괴로움 다할까
내가 내 생을
사랑할 수 없으니
척추 없는 슬픔일랑
예서 놀지 마라
초록 물결 찰랑이는
사량 근해,
햇빛은 머리맡에
손바닥 포개고
아주 잠들었는데
난 아무 말도 않으리라
사탕 입에 문 아이처럼
옹알이만 하리라
일렁이는 쪽배처럼
칭얼대기만 하리라


- 이 성복 시 ‘아무 말도 않으리라‘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이 성복 시 ‘꽃피는 시절‘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1990.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 두는데
그 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생 로랑이나
랑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녹동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셨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때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 앓던 우리 장인 일 년을
못 끌고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 입고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옛날
수건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 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태워 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 하나가 제 태어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끓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이 성복 시 ‘소멸에 대하여 1‘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이 성복 시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96.





1

누가 먹다 버린 복숭아 속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둣발 갖다 대니 금세 기울어졌다
비 온 뒤 아카시아 군락
우듬지 아래 희고 붉은 버섯,
머리 하나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줄기가
힘없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물기 많은 복숭아 속살을 닮아
내 구둣발은 너를 건드렸으니,
언젠가 花樣年華화양연화의 장만옥을 닮은 사람
오늘 젖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 또 너를 만났구나


   2

일 년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는다
지금 그들 사이의 시간은
섬세한 신경망처럼 이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양 끝에는
꺼먼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다
이제 그는 두부를 건져낸
양철통의 멀건 국물처럼
그녀를 기억해야 한다
오는 봄에도 바람은
갓 피어난 보리 모종처럼
유순할 테지만, 장작개비
빠져나간 휑한 부엌처럼
한여름을 견뎌야 한다
비 온 다음 날의 하늘처럼
그녀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는다


- 이 성복 시 ‘비온 뒤‘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있수?
그거 차마 못 봐요, 미쳐요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 이 성복 시 ‘차라리 댓잎이라면‘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어떤 영혼들은,,‘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
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
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
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
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
다 ’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
거나 언짢은 기색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 이 성복 시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아침 나무들 등 뒤로
변색한 잎새들이 공중에 멎어 있고,
손마디 사이사이 너도 작은 물방울 달고
젖은 길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가슴벽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조금씩 튿어지고,
웬 실성한 여인의 오랜 슬픔 같은 것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려 나올 때,

너 어디 있었니, 너 어디 있었어,
이 몹쓸 것,
어디 가 있었어. 이 몹쓸 것아!
웬 미친 여인이 너를 보고 통곡할 것 같은 날에

가던 길 멈추고 너는
낮은 하늘을 바라다본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몰라,
어쩌면,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을까?



- 이 성복 시 ‘어쩌면 그런 일이‘
[어둠 속의 시], 열화당, 2014





뉘우침,
뉘우침의 푸른
바다 같은 아름다움
햇빛이 들어온다
펼쳐질 일들의 꿈 같음
꿈의 물보라 같음
나머지는 꿈으로 떠 있는 것
꿈으로 부딪치는 것
부딪치면서 혀를 밀어 넣고
다시 뼈내는 일의
푸른 바다 같은 아름다움
아하, 햇빛이 머릿속
땟국물 위에
적敵의 얼굴을 비춘다


- 이 성복 시 ‘뉘우침’
[어둠 속의 시], 열화당, 2014





결혼한 지 한참 뒤에도, 아니 쉰 넘어서도
비누를 쓰다가 얇아지면 버릴 수도 없어,
부서진 것들 뭉쳐 비누질 하다가, 그것들
바스라져 세면대 배수구가 막히기도 하고,,
그러면 손가락 쑤셔 파내기도 했지만, 이제
닭아빠진 비누를 새 비누에 부쳐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의 발명 중에 이보다 신기한 것은
없었으리라 알뜰하기야 이보다 더한 살림살이도
없지 않았겠지만, 비누가 맛본 소멸보다 더한
소멸은 없었으니, 無餘涅槃무여열반도 이보다 더 찌끼
없었으리라 또한 지금까지 내 삶에서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수행은 없었으니, 원한도 회한도 없이
있지도 않은 無무를 없애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지독하게 장난스럽기로는 천지신명보다
설마 내가 더했겠는가 환갑을 코 앞에 둔 내가
작은 비누조각처럼 내 아들의 등때기 위에서 나날이
사라져간다 한들, 암 두꺼비 등을 타고 할딱거리며
교미하는 멍청한 수놈과 무엇이 얼마만큼 다를까



- 이 성복 시 ’소멸에 대하여 2 ‘





불어오게 두어라
이 바람도,
이 바람의 바람기도

지금 네 입술에
내 입술이 닿으면
옥잠화가 꽃을 꺼낼까

하지만 우리
이렇게만 가자,
잡은 손에서 송사리떼가 잠들 때까지

보아라,
우리 손이 저녁을 건너간다
발 헛디딘 노을이 비명을 질러도

보아라,
네 손이 내 손을 업고 간다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집 찾아 간다

오늘이 어제라도 좋은 날,
걸으며 꾸는 꿈은
壽衣수의처럼 찢어진다


- 이 성복 시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 7‘




1
스승이 떠난 뒤 백 년이 흐르고
어떤 밤에는 강둑을 걸었다
강은 멀고 멀었다
달은 따라오지 않고
나도 달을 따라가지 않았다
달에 오르는 계단은 보이지 않고
내 날개엔 아직 솜털이 돋지 않았다
봄밤에 강둑에서 날갯짓 하면
달은 보지 마라!
스승의 말씀 귀에 쟁쟁하고
내 날개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강은 번번이 몸을 뒤챘다
달빛에 몸져눕는 물결이
은비늘처럼 과옫
달은 보지 않기로 했다


2
봄밤에 돌기도 구멍이 없는 강이
구렁이처럼 울었다
우는 강에게 젖을 줄 수 없어,
강의 이마에 오줌을 누었다
쉰을 훨씬 넘긴 내 몸에서
흐린 물이 흘러나왔다
백 년 전 스승의 이마에도
뜨거운 물방울이 튀겼을 것이다
멀리 달의 이마는 젖지 않았다
나는 달의 한가운데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 모가지에 섹스가 느껴졌고,
백 년 전 스승이 달아오른
밭솥처럼 비명을 질렀다
내 연애를 감시하던 스승이
먼저 射精해버리신 것이었다
강둑의 풀들이 진저리 쳤다


3
그곳이 강이 끝나는 자리라는 것을
콘크리트 제방에 부딪치고서야
알게 되었다 강은 나를 두고 흘러갔고
나는 강둑을 내려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아직도 달에 계시는 스승이
차창 사이로 언뜻언뜻 나를 보기도 했다
스승이 떠난 뒤 백 년이 흐른 봄밤이었다



- 이 성복 시 ‘봄밤‘
* 래여애반다라




오늘 어느 잡지에서
선생이란 자기 말과 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뭐 그런 구절을 발견하고

그만 하면 나도 참 좋은 선생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초겨울 늦은 오후 바람 부는 창가에서
돌아가신 장모님 스웨터로
시린 무릎을 감싸며, 나는또 생각한다

지금 내 생은 서리 내린 야산
무밭에 겅중겅중 솟은 순무 같구나

그거 한번 뽑으려면
동네 사람 다 달라붙어야 하고,

그게 쑥 뽑혀 나가면
동네 사람들 죄다 엉덩방아 찧으며
멀쩡하게 생긴 게 사람 잡는다고 투덜거리는,

속속들이 바람 든 순무 같구나
이제 내 어리석음은


- 이 성복 시 ‘ 선생 1‘




잘 놀다 가라고 입에 발린 말이라도
했으면 좀 덜 아팠을까 쨍쨍한 하늘에
흰 구름 스쳐가는 것이 마냥 아득하다
싶어도 한숨 곤히 자고 나면 잊힐 줄
알았는데, 미워 한껏 눈 흘기면 순한
눈 껌벅이며 미안해도 할 수 없다는 듯
품안으로 기어들어 밤새 헛소리한다
이처럼 하루 이틀 생짜배기 몸이 아픈
것은 언젠가 내가 저를 몰라봤다는 것,
이젠 저를 달래기도 신물이 나, 덮던
이불 걷어차고 정색을 해도 어쩌든지
한 열흘 쉬어 가겠다는 것, 내 젖은
등에 기대 져 온 길만 바라보며 중얼
거린다: 꽃 피는 오월에도 눈이 오려나?


- 이 성복 시 ‘ 그녀에게’
[래여래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죽은 이도>


내가 담장 너머로 `복분식 아줌마, 잔치 국수 하나 해주세요' 그러면 `삼십 분 있다가 와요' 하기도 하고 `오늘 바빠서 안 돼요' 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횡단보도 두 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식당에 아구탕 먹으러 간다.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 보다 ,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알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


- 이 성복 시 ‘잔치 국수 하나 해주세요‘
[달의 이마에는 없는 물결무늬 자국], 문학과지성사, 2012.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 이 성복 시 ‘서해’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1990.







또 비가 오고 잠 없는 肉身은 집을 나선다
또 비가 오고 죽은 물고기는 하늘에서 떨어진다
또 실성한 몸은 여물지 않은 복숭아 속에서 중얼거리고
날벌레들이 서로 몸을 더듬는다
또 우는 아이의 턱이 목에서 빠져 나가고
슬픔이 괴로움을 만나 흐린 물이 된다


부패와 분노가 만나 불이 되고
사내와 계집이 만나 땀이 되어도
못 만난 것들은 뿔뿔이 江을 따라 간다
한 번 죽은 누이는 거듭 죽는다


빨리 오너라 비 오는 밤 通禁을 깨고
빨리 오너라 後金의 아내여 와서
톱밥과 발톱을 섞어 떡을 만들라
앉은뱅이와 곱추를 불러 동요를 부르게 하라
늙은 王과 송충이를 교미시켜 병든 아들을 얻게 하라
빨리 오너라 비 오는 밤 횃대에 올라 순한 닭들과 더불어 노래하라


- 이 성복 시 ‘또 비가 오고‘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 이 성복 시 ‘입술‘






어떻게 꽃은 잎과 뒤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 보라, 비린내 나는 내 살과
단내 나는 내 삶과 그런 것들 속에서
내숭 떠는 저 초록의 눈길을
내가 어떻게 받아 내야 할지, 이 엄청난
배반, 초록 식물들이 배반하는 황톳길
생각해 보라, 어떻게 황톳길 위로
붉은 네 머리 댕기 같은 붉은 꽃이 나타나는지!
침 한 번 삼키듯이, 헛기침하듯이
그리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을 난 기억하지 못한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마라



- 이 성복 시 ‘비가 3‘
* 시처럼 살고 싶다(문경화 엮음, 시공사,2003) ㅡ<비 오는 날> 어울리는 시 중에서.





1
오늘 외로워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映畵영화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속에서 한 편 映畵영화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愛人애인,
나는 퀭한 地下道지하도에서 뜬눈을 세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東方博士동방박사들은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天國천국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慾情욕정에 떠는 늙은 자궁으로 돌아가야 하고
忿怒분노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主(주)여


- 이 성복 시 ‘出埃及출애급‘
[정든 유곽에서],문학과지성사, 1996.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 이 성복 시 ‘마음은 헤아릴 수 없어‘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 이 성복: 시인, 작가, 1952년 6월 4일,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읍 오대리(현 상주시 오대동)에서 아버지 이한구(李漢求)와 어머니 송정남(宋丁男) 사이의 5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하여 1978년 졸업하였다. 1982년에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199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대구광역시 소재 계명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9년 문예창작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명예교수.

1977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시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2년 제2회 김수영문학상, 1990년 제4회 소월시문학상, 2004년 제12회 대산문학상, 2007년 제53회 현대문학상, 2014년 제11회 이육사시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에는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1980년대에 나온 시집 중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방향을 결정지은 시집으로 꼽힌다. 다만 과작 성향이 짙어서 시집 숫자는 많지 않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10년 단위로 시집을 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