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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섬진강, 물길 따라 피고 진 ‘꽃과 사랑’ - 김 용택 시.

비가오고, 꽃이 지네,,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김 용택 시 ‘구절초 꽃’
*나무, 창작과비평사, 2002




아내는 나를 시골 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득 발자국을
꼭꼭 찍어본다. 이 마당에서 벌거벗고 뛰어 놀던
내 형제들과 이웃 아이들의 벌거벗은 웃음 웃음소리 대신
어머니는 해마다 발 디딜 곳 없이 마당 가득 화려한
채송화꽃을 피워놓는다.
정말 환하다. 달빛은 환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나무만을 따로따로 달빛 아래 세운다.
달빛은 모든 것들을 떼어놓고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그렇게 보여준다. 물만 흐를 줄 안다. 발밑에서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까만 채송화씨들이 세상을 걷느라 두꺼워진 내 발바닥
깊은 속살을 찌른다.
씨만이 세상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들을 거둔다.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이 간단명료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거짓 없는 사랑은 현실이다.

이 세상 모든 살구멍이 열리고 뼈마디가 허물어져내리는 사랑을
나는 안다.
시를 써야지.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일하는 사람들이 꽃이 된다.
고된 노동으로 이룬 따뜻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자고 싶다.
어머니의 깊은 잠만이 나를 깨울 꽃이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깔려 잠을 자던 내가 창호지 문지방에서
꼬물거리는 겨울 벌레 소리에도

눈을 뜬다.
낡은 내 몸
어디에
새로
뚫릴
귀와

눈이 있었는가. 나는 깨끗하게 죽을 것이다.
내 죽었다가,
수백 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던
내 청춘의 오래된 이 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달빛으로 죽는다.
저 황량한 거리,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모든 거짓 사랑과 예술 속에서 미련 없이 걸어나와
누구도 닿지 않는 먼 잠을 자리.
저 물소리 끝까지 따라가 잠자는 겨울 채송화씨,
그 끝에서 나는 자고 깨어
그리운 우리집 마당에 채송화꽃으로 오리.

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거짓뿐이니. 너를 따라온 모든
낡은 길들을 거두어라.


- 김 용택 시 ‘겨울, 채송화씨‘
*계간 문학동네-1999년 봄




아파트 창틀을 넘어온 햇살이 좋았다.
햇살이 찾아오면 먼지들이 피어났다.
나 없이도 지들끼리
잘 놀다 가는 작은 뒷방,
베고니아를 키웠다.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고, 쓴 시를 고쳐놓고 나갔다 와서
다시 고치고

베고니아, 아무도 못 본
그 외로움에
나는 물을 주었다.


- 김 용택 시 ‘베고니아’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어리석음이 얼마나 달을 둥글게 하고 밝게 하는지 안다. 서편에 가서 지는 달이 깨끗하다. 누구를 만나 실컷 울고 사랑을 얻어온 얼굴이다.

나의 아침 길은 고요하다. 길의 고요 속으로 걸어가는 곳에 하지감자꽃이 먼저 들어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새하얀 꽃이다. 이이가 울음을 받아준 그이인가.

호반새가 돌아왔다. 작년에 울던 곳에서 운다. 가까이 가서 보았다. 내가 보는데도 울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운다. 짙은 주홍색이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라고 또 말할 만하다. 의외로 부리가 뭉툭하게 길고 끝이 갑자기 두렵게 뾰쪽해진다. 밤나무숲으로 날아갔다. 가서 또 운다. 몸과 부리에 비해 꼬리가 짧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것 같다. 지금 그쪽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차이콥스키의 <농부의 노래>란 음악을 들었다. '기쁜 농부'라는 해설자의 말이 나를 기분좋게 하였다. 아버지가 생각보다 잘 자라고 있는 강 건너 벼를 보러 가실 때 아침 이슬들이 쏟아지는 저 음악처럼 발걸음이 기쁠 때도 있었으리라.


- 김 용택 시 ‘기쁜 농부의 노래‘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1.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이 손등을 지나갑니다
이 바람이 지금 봄바람 맞지요? 라고
문자를 보낼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
당신에게 줄 이 바람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이 말이 그 말 맞네요
차를 타고 가다 어느 마을에 살구꽃이 피어 있으면
차에서 내려 살구꽃을 바라보다 가게요
산 위에는 아직 별이 지지 않았습니다
이맘때 나는 저 별을 보며 신을 신는답니다
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손에 닿겠지요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다음 토요일
만나면 당신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이 바람이 그 바람 맞네요, 하며
날 보고 웃겠지요


- 김 용택 시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 2023.




진달래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 김 용택 시 ‘봄날은 간다‘
*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2006




집에서 놉니다.
노니, 좋습니다.
아파트 정원에 산딸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희고 고운 꽃잎들이 초록의 나뭇잎 위에
십자 모양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피었습니다.
초여름꽃은 흰꽃들이 많답니다.
이팝나무 꽃, 층층나무 꽃,
때죽나무 꽃.
때죽나무 꽃은 대롱대롱 매달려 피지요.
꽃술 끝이 노란 그 꽃들도 희고 곱답니다.
꽃이 질 때 그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면
내 몸에 실린 짐들을 하나둘 몸 밖으로 던지는 꿈을 꿉니다.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으면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눈이 감기면 내 몸은 빈 배가 되어
어느 먼 곳으로 기우뚱기우뚱 떠갑니다.
한없이, 한이 없이, 좋습니다.
순수한 바다, 먼 수평선 너머로 나는 나를 놓고 깜박 꺼져서.

그래요.
그렇게 당신의 발뒤꿈치에 가만히 가닿고 싶은
나는
한 조각
빈 배지요.


- 김 용택 시 ‘나는 조각배‘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창비, 2013




속 날개가
날려요
눈 감았지요
어디서 본 듯
처음이네요
나는 먼 데서 왔어요
안아주세요
입 맞추어주세요
눈 떠 나를 봐요
나를 바라봐요
숨이 멎을 것 같아요
나는
속 날개를 접고
두 눈이 감겼답니다

- 김 용택 시 ‘詩를 드려요‘
[나비가 숨은 어린 나무], 문학과지성사, 2021.




오늘은 뭐 하나요 고운 하늘 아래에서 당신은 어느 하늘로 서 있나요
나뭇잎은 다 피었습니다 무슨 꽃을 보나요
바람을 보고 해를 불러서 어디로 발길을 옮기나요
몇 가닥 머릿결이 이마로 내려와 해그늘을 만드네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옵니다
새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멀리 열려요
나는 그 하늘을 따라 그대에게 갔답니다
고요를 흔드는 바람같이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 잎 새로 나는 건너서, 가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든 햇살이 내 얼굴을 어른거리면
나뭇가지들을 가져다가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주고 구름이 지나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냉정과 우아를 알지만, 말하자면 사실, 바람은 디딜 발이 없어서 소리가 안 난답니다
비밀을 버린 당신 손에 한들한들 끈 가는 샌들이 들려 있네요
알고 있겠지만, 발뒤꿈치도 땅에 닿았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나무는 살구나무랍니다
뭐, 꽃이 그리 중한가요


- 김 용택 시 ’당신이 서 있는 그 나무는 살구나무랍니다‘
* [나비가 숨은 어린 나무], 문학과지성사, 2021.




오늘 아침부터 눈이 내려
당신이 더 보고 싶은 날입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눈처럼 불어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눈송이들은
빈 나뭇가지에 가만히 얹히고
돌멩이 위에 살며시 가 앉고
땅에도 가만가만 가서 내립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가 닿고 싶어요

아침부터 눈이 와
내리는 눈송이들을 따라가보며
당신이 더 그리운 날
그리움처럼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들을 보며
뭔가, 무슨 말인가 더 정다운 말을
드리고 싶은데
자꾸 불어나는 눈 때문에
그 말이 자꾸 막힙니다.


- 김 용택 시 ‘무슨 말인가 더 드릴 말이 있어요‘
[강 같은 세월],창작과비평사, 1995.




어느날이었다. 나는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라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 김 용택 시 ‘오래 한 생각‘
<창작과비평>2016년 봄  창간 50주년 기념호




바람 속을 뒤적이느라
손등이 까맣게 탔네요.
봄이 얼마나 더딘지,
또 얼마나 순식간인지,
거기 서 있지 말아요.
사랑은 다니던 길로
오지 않는 답니다.
생각은 이따가 하고
살며시 눈을 떠 날 봐요.
오! 밬처럼 두렵고 깊은 눈,
고개 숙인 수줍음이
사랑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사랑은 늘 한잎 목마른
수면과 수심 반반
바람이 지나는 그 사이이지요
사랑의 반을 넘어설 때
끝은 타고 속은 젖을 때
살랑살랑
애타게 한 잎 더 늘었지요.
잎은 생각보다 먼저 피지만
생각은 잎을 잡지 못한답니다.
달콤하게 깍지 낀 손을 놓고
갔다가 영영 못 올지도 모르는
목마른 물가로 밀려온 잔주름 같은
실버들 그 한잎.

- 김 용택 시 ‘실버들 그 한잎‘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작은 물고기들이 등을 내놓고 헤엄을 친다.
보리밭에서는 보리가 자라고 밀밭에서는 밀이 자라는 동안
산을 내려온 저 감미로운 바람의 발길들,
달빛 아래 누운 여인의 몸을 지난다.
달콤한 키스같이 전체가 물들어오는, 이 어지러운 유혹의 입술,
오! 그랬어.
스무살 무렵이었지.
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 끝에
서 있었어.
어둠에 파묻힌 내 발목을 강물이 파갔어.
비가 오고, 내 몸을 허물어가는 빗줄기들이 강물을 건너갔어. 그 흰 발목들,
바람이 불며 눈을 감고 바람의 끝을 찾았지.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단내 나는 바람!
나는 울었어. 외로웠다니까. 너를 부르면 내 전부가 딸려갔어.
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렸어.
그리움을 누르면 피어나던 어둠 속에 뜨거운 꽃잎들,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를 괴롭혔어. 집요했어.
바위 뒤 순한 물결 속에 부드러운 뼈를 가진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달빛으로 등을 말리고
물살를 일으키며 그렇게 산등성을 달려내려 왔어.
그러던, 그러던 그 어느날
오동꽃이 피던 마지막 그 찬란한 봄날,
가벼운 시장기에 시달리던 그 어느 아름다운 봄날,
잔고기떼가 그렇게 산등성에 반짝이던 날
산수유 새잎처럼 날카로운 혀끝이 하늘과 땅을 가르며
시가 내게로 왔어. 닭이 울고
알 수 없는, 저 깊은 산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던
강물을 끌고 나오며
날 불렀어.
환한 목소리,
삶과 죽음의 키스같이
다디단 그 봄밤의 파멸,
내 발등을 밝혀주던 그 검은 눈동자들,
내겐 귀가 있었어.
내겐 눈이 있었다니까. 내 마음이 그걸 안 거야.
떨렸어.
내 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숨은 것들을 다 찾아 폭파시키던
그 환한 목소리,
산과 강이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그 사이로 꾀꼬리가 노랗게 솟아오른거야.
전율하던 그 하얀 공포,
치명적인 치욕, 무서운 현실
오! 시,
시였어.


- 김 용택 시 ‘달콤한 입술‘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창비, 2013.




한밤중에 일어나
세상사 생각할 수록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움
아무리 돌아눕다 돌아눕다 도로 일어나
앉아봐도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움
불 네 번 끄고
다섯번째 벌떡 일어나
세상사 요모조모 뜯어놓아도
세상은 다각적으로 미치겠음. 미치겠음
소쩍새 움 먼 데서, 먼 데서 아주아주 먼 데서 움
너 이놈, 이놈 이 천벌을 받을 개보다도 못한 놈
불 끔
이하 생략

- 김 용택 시 ‘세상‘
[누이야 날이 저문다], 열림원, 1999.




가을은 부산하다.
모든 것이 바스락거린다.
소식이 뜸할지 모른다.
내가 보고 싶고 궁금하거든
바람이는 풀잎을 보라.
노을 붉은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떼들 중에서
제일 끝에 나는 새가 나다.

소식은
그렇게 살아 있는 문자로 전한다.
새들이 물가에 내려 서성이다가
날아올라 네 눈썹 끝으로
걸어가며 울 것이다.

애타는 것들은 그렇게
가을 이슬처럼 끝으로 몰리고
무게를 버리고
온몸을 물들인다.

보아라!
새들이 바삐 걸어간 모래톱,
조금은 아픈
깊게 파인 발톱자국
모래들이 허물어진다.

그게 네 맨살에 박힌
나의 문자다.


- 김 용택 시 ‘조금은 아픈‘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길을 걷다가

문득
그대 향기 스칩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꽃도
그대도 없습니다

혼자

웃습니다


- 김 용택 시 ‘향기’
[나무], 창작과비평사,  2002.




시를 쓰다가
연필을 놓으면
물소리가 찾아오고
불을 끄면
새벽 달빛이 찾아온다
내가 떠나면
꽃잎을 잎에 문 새가
저 산을 넘어와
울 것이다

- 김 용택 시 ‘시를 쓰다가‘



가을비 오고
지하철 5호선 보라색기차 난방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뜻함이 편안한데 오히려
  쓸쓸해집니다.

  비
  그치고
  해 난다
  환한 해 아래 편지를 읽다가
  편지 들고 한참을 서서


  거참, 나도 되게 쓸쓸하네.


- 김 용택 시 ‘서울 편지‘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김 용택 시 ‘봄비 2‘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
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
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
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
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 김 용택 시 ‘그리운 꽃편지 1‘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 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그대 눈물인 줄만 알았지
  내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훨훨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 김 용택 시 ‘나비는 청산 가네 ‘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 김 용택 시 ‘봄비 1’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 아품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품은 컸으나
참된 아품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 김용택 시 '사랑' 모두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김 용택 시 ‘사람들은 왜 모를까’




잎을 내리며, 온몸이 출렁거리는 봄이 오겠지.
한 잎 몸을 숨기고 가만히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새끼손가락 끝으로 너는 너를 가만히 건드려본다.
네가 일으킨 몇겹 물결은 저 건너 강기슭에 닿아 사라지고
네 모습은 네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너를 본다.
너는 너를 보느냐.
저 깊고 깊은 강물 속에 아른거리는 봄을 너는 잡으려느냐.
온몸이 출렁이는 봄이 오겠지.
흔들리지 않고는 못 배길 숨 막히는 봄이, 네 몸 끝까지 타고 오르겠지.
손을 다오.
빛 좋은 봄날은
바람도 좋다.
한손 끝에 닿는
네 허리살을 헤치고
한 잎 한 잎
또 한 잎
새눈은 튼다.

- 김 용택 시 ‘한잎’
* (수양버들) 창작과 비평사.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겨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이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기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김 용택 시 ‘섬진강 11’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95.




운동장을 거닐다가 땅바닥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쭈그려앉았습니다.
3mm나 될까, 연둣빛 투명한 아기벌레였습니다. 여치인지
방아깨비인지, 얼마나 여리고 작고 그 빛이 순정하던지.
너는 어디서 왔니?
너는 어디서 왔어?
물어봅니다.
나는 너무 크고 벌레는 너무 작아
도저히 눈 맞출 수 없어
나의 말이 그 벌레에게 닿지 않아 그의 답을 듣지 못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려
벌레를 따라갑니다.
바람이 붑니다.
내 눈이
푸르게 물들어오는
이 저녁.

- 김 용택 시 ‘3mm의 산문‘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든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 내시어요
나는 힘 없지만
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 김 용택 시 ‘별 하나’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도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 김 용택 시 ‘그대, 거침없는 사랑‘
* 그대, 거침없는 사랑 / 푸른숲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김 용택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그대, 거침없는 사랑 /푸른 숲]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 김 용택 시 ‘푸른나무 1‘
[강 같은 세월 / 창작과비평사]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눈을 감습니다 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참을 수 없이 떨리는 이 까닭 없는 분노 아아, 생살에 떨어지는 이 뜨거운 꽃잎들.


- 김 용택 시 ‘이 꽃잎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 김 용택 시 ‘참 좋은 당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김 용택 시 ‘그랬다지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어봐요
따순 가슴에 피 뛰어요
따순 피로 살아 뛰어요
감춘 가슴들을 풀어 헤치고
맨가슴을 땅바닥에 비벼봐요
들려요 당신의 맑은 피 흘러
땅 울리는 소리
이 가슴이 고동쳐요
눈을 비비며 눈을 떠봐요
그 맑은 오월의 첫새벽 두 눈동자를 보세요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오래 꽃 펴 있어요
풀내나는 숨결
들꽃 피운 고운 눈동자
돌아 누우면 맞닿을
당신의 흙가슴
온몸 더운 피 흘러요


이대로는
이대로는
정말 이대로는
당신 그리워 못살겠어요
한번만, 한번만
반도 복판에 북을 쳐요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북을, 북을 쳐요
저 하늘이
한 하늘로 터지도록


- 김 용택 시 ‘이 가슴이 터지도록‘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쁘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젊어졌으리.


- 김 용택 시 ‘섬진강 3‘





하루종일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이 하루
내 눈과 내 귀는
오직 당신이 오실 그 길로 열어졌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오실 그 길에
새로 핀 단풍잎 하나만 살랑여도
내 가슴 뛰고
단풍나무 잎새로 당신 모습이
찾아졌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그 긴 기다림의 고요는
운동장을 지나는
물새 발작 소리까지 다 들렸습니다
기다려도 그대 오지 않는
이 하루의 고요가 점점
적막으로 변하여
해 저문 내 길이 지워졌습니다

- 김 용택 시 ‘당신을 기다리는 이 하루‘




1996년의 겨울

직행버스는 그냥 지나가고
군내버스만 쉬는
칠보 정류장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며 땅에 떨어져 녹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위에 잔돌들은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검버섯 핀 손등들처럼 차디차게 얼음을 뒤집어쓴다
그 위에도 눈은 내린다

주름진 얼굴 같은 양철지붕 아래
손 대면 양철 녹처럼 부스스 떨어질 것만 같은 얼굴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송이들을 건너다보며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린다
차를 기다려도 차는 저 산모퉁이를 돌아오지 않고
이따금 눈보라만 하얗게 몰아쳐온다

때묻은 수건으로 머리와 귀를 싸매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
시꺼먼 실장갑 낀 손으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이
큰물에 떼밀리고 떼밀려 떠내려온 해묵은 지푸라기들처럼
기약없이 차를 기다리다 지쳐
주름진 얼굴들이 하얗게 부서지는가
손과 얼굴이 조금씩조금씩 눈송이가 되어
풀풀풀 흩날릴 것만 같은데
기다리는 차는 오지 않고 눈만, 칠보에 눈만 온다
"어이,추워,날씨가 사람잡것네 사람잡아,차가 안 올
랑개비여"
차부 안으로 들어서며 온몸으로 눈을 털며 둘러보지만
연탄 난로 하나 없는 낮은 처마 밑
발 시린 땅바닥까지
눈송이들이 날아와 시린 땅에 내려앉기가 바쁘게 사라진다

눈이 내린다
칠보에 저렇게 오는 눈을 어쩌랴
이제 이 차부에서는 그 무엇을 기다릴 것도
더 떠나보낼 것도 더는 없고 어느덧 어둠만 스며든다
어둠만 흔적없이 찾아와 뽀얀 전등불들을 하나둘 밝힌다
그 불빛 안으로 눈송이들이 우우 쫓겨 몰려왔다가
우우 하얗게 쫓겨난다
차창에 불빛도 없이 직행버스가 한대 체인 소리를 내며
어두워져오는 눈길을 달려간다
차는 끝내 오지 않을 모양이다
눈송이들은 어 눈 위에 떨어지고
눈송이들이 차디찬 손등에도 떨어져 눈물이 되어 다시
언다

할머니 한분이 마지막으로 보퉁이를 끌어안고
어둡고 낮은 하늘 끝으로 눈이 되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이 세상은 눈뿐인데
어쩌랴 저렇게 칠보에 오는 눈을
칠보가 어쩌랴


- 김 용택 시 ‘칠보에 오는 눈‘
* [시집 그여자네 집]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 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 번 피는 꽃입니다


- 김 용택 시 ‘들국화’




해는 높고
하늘이 푸르른 날
소와 쟁기와 사람이 논을 고르고
사람들이 맨발로 논에 들어가
하루종일 모를 낸다
왼손에 쥐어진
파란 못잎을 보았느냐
캄캄한 흙 속에 들어갔다 나온
아름다운 오른손을 보았느냐
그 모들이
바람을 타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파랗게
몸을 굽히며 오래오래 자라더니
흰 쌀이 되어 우리 발 아래 쏟아져
길을 비추고
흰 밥이 되어
우리 어둔 눈이 열린다
흰 밥이 어둥 입으로 들어갈 때 생각하라
사람이 이 땅에 할 짓이 무엇이더냐


- 김 용택 시 ‘흰밥’




구름 한점 없는 가을날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피아골 골짜
기에서 흘러오는 도랑물 건너 왼쪽에 아주 작은 대숲 마을
이 하나 산 중턱에 있습니다 혹 그 마을을 눈여겨 보신 적
이 있는지요 그 마을을 보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 중
에, 정말 오만가지 생각들 중에 아, 저기 저 마을에다가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 한 여자를 감추어두고 살았으면 '거
을매나 좋을꼬' 하는 생각이 바람 없는 날 저녁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혹 댁도 그런 생
각을 해보셨는지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혹' 이지만 말입니다
나도 이따금 저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쓸쓸하고
도 달콤한, 그러나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나 혼자 할 때가
다 있답니다 아내가 이글을 보면 틀림없이 느긋한 얼굴로
"그래요 그러면 잘해보세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마을에 지금 가을이 한창이고 지금은 산그늘이 간이
다 서늘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저 마을로 올라가는 이 세상
에서 내가 본 길 중에서 가장 신비한 꼬불꼬불한 외길에도
산그늘이 내리면서 희미하게 길이 묻히려 합니다 그 가늘
디가는 길 왼쪽에는 지금 산비탈을 따라 작은 논다랑지 벼
들이 노란 병아리처럼 층층이 마을을 따라 올라가며 물이
들었습니다 노란색 주에서 나는 저 벼 익어가는 노란 색을
제일 좋아합니다 초가을이면 저 노란 벼들을 보면 이루 헤
아릴 수 없는 오만가지 생각들 중에서 나는 한가지 생각도
건지지 못하고 벼가 다 넘어지도록 설레기만 한다 맙니다
만, 그나저나 옛날에 저 흰 실밥 같은 외길에서 새로 시집
온 새색시가 외간 남자와 딱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서로
비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그 실
밥 같은 외길에도 숨쉴 곳은 있습니다 그 외길 중간쯤에는
감나무가 한그루 있는데요 그 감나무 밑에는 용케도 커다
란 바윘덩이가 하나 있어 그 바윘덩이 옆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까지 발걸음을 잘 맞추었겠거니, 거기에
다가 사람들은 숨을 쉬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내 생각입니


경제도 어려운데 이런 생각이 그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생각인지요

여기까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는 지 우리 어
머님이 이불 꿰매다 검은 머리에 얹어둔 실밥 같은 외길이
가물가물 깜박깜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잘데
기없는 내 생각도 여기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려 합니다 그
러나 발걸음이 요량대로 잘못 맞추어졌을 때는 어떻게 하
였을까 당최 생각이 안 나눙만요 또 다만입니다만 그러 때
딱 마주서서는 어떤 남정네는 해 넘어가는 지리산 그 어떤
산날망을 킁킁하며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 어떤 새색시는
눈을 내리깔고는 그 가늘디가는 길바닥을 내려보며 안절
부절 몸 둘 데를 몰라 했는지 모르지요 아무튼 해는 져서
어두우니 그들을 그냥 거기다가 세워두고 나는 갈랑만요
내가 가는 길이야 얼마든지 비낄 수 있는 길이니까요 허지
만 가기 전에 그 감나무 아래 아주 좁은 공터에다가 크게
숨이나 한번 푹 쉬고 갈라요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 초꺼듬 왼쪽 도랑물 건너 산 중
턱에 있는 아주 작은 대숲 마을을 보셨는지요 보셨다면은
그 마을이 소생에게 이런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게 한 마
을이구나 하며 그냥 흘긋 스치십시요
거길 누구랑 갔냐구요

이 세상에서 절대 그냥 비낄 수 없는 사람이랑 같이 갔
구만요


-김 용택 시 ‘쓰잘데기 없는 내 생각‘
[시집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김 용택 시 ‘그 여자네 집‘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 김 용택 시 ‘콩, 너는 죽었다’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 피어 새롭습니다
작년에 꽃 피었을 때 서럽더니
올해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이 피어나니
다시 또 서럽고 눈물 납니다
이렇게 거기 그 자리 피어나는 꽃
눈물로 서서
바라보는 것은
꽃 피는 그 자리 거기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없이 꽃 핀들
지금 이 꽃은 꽃이 아니라
서러움과 눈물입니다
작년에 피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년에도 꽃 피면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꽃 피어 만발할 테니
거기 그 자리 꽃 피면

언젠가 당신 거기 서서
꽃처럼 웃을 날 보겠지요

꽃같이 웃을 날 있겠지요.


- 김 용택 시 ‘꽃처럼 웃을날 있겠지요‘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 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그락딸그락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귀도 뒤에다가 다 열어
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쩔 때 노란 산국 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홍
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 등뒤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나를 기다리던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 김용택 시 ‘ 애인‘
<제12회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 김 용택 시‘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오늘도 집에 가다
나는 네 뿌리에 앉아
서늘한 네 몸에
더운 내 몸을 기댄다
토끼풀꽃 애기똥풀꽃이 지더니
들판은 푸르고
엉컹퀴꽃 망초꽃이 피었구나
좋다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앉아
저 꽃 저 들을 보니 오늘은
참 좋다

이 세상을 살아오다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허무를 느낄 때가 있었듯이
내 청춘도 까닭없이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냥 외로웠다
이유 없이 슬펐다
까닭없이 죽고싶었다
그러던
오늘 같은 어느날
텅 빈 네 그늘 아래 들어
서늘한 네 몸에
더운 내 몸을 기댔다
아,서늘하게 식어오던 내 청춘의 모서리에 풀꽃이
피고
눈 들어 너의 그 수많은 잎들을 나는 보았다
온몸에 바람이 불고
살아보라 살아보라 살아보라
나뭇잎들이 수없이 흔들렸다

살고 싶었다
지금도 피는 저 엉컹퀴와 망초꽃을
처음 보던 날이었다

오늘도 나는 혼자 집에 가다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네 뿌리에 앉는다
이 세상 어느 끝으로 뻗어
이 세상 어느 끝에 닿아있을 것만 같은
네 가지 가지에 눈을 주고
이 세상 어둠속을 하얗게 뻗어
어둠의 끝에 가 닿을 것만 같은
네 뿌리에 앉아
나는 내 눈과 내 몸을 식힌다


- 김 용택 시 ‘ 푸른나무 7’




그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시 ‘그강에 가고 싶다’



** 김 용택: 1948년 8월 26일. 1986년 제6회 김수영문학상,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 2002년 제11회 소충사선문화상, 2012년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

전라북도 임실 운암국민학교 졸업, 전라북도 순창중학교 졸업, 전라북도 순창농업고등학교 졸업. 前 전라북도 임실 덕치초등학교 교사, 前 전라북도작가협회 회장.

김용택(金龍澤, 1948~ )은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 때문에 멸실의 운명에 처한 농업 현장에 남아 그 실상을 증언하는 중요한 농민 시인이자 빼어난 서정 시인이다. 김용택 시의 밑자리는 그가 나고 자란 섬진강 언저리 임실 땅 진메 마을이다. 농경 사회의 인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곳 사람들이 보고 겪는 생활 현장의 풍부한 실감 때문에 시인의 상상력은 뻗어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제약된다. 그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피폐한 농촌의 비극적 실상을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내면 깊이 교감하며 길어내는 정서의 근원성 때문이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김용택은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