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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부처와 보살’ 사이에서 - 공광규 시.

생명은, 척박 할 수록 아름답다.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 공광규 시 '아름다운 회항' 모두





바위와 바위가 기댄 암문을 거쳐야
암자에 오를 수 있다
암문은 좁고 좁아서
몸집이 크거나 짐이 많은 사람은
통과 할 수가 없다
꼿꼿한 허리도 굽혀야 하고
머리를 푹 수그려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무릎걸음도 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게 올라가도
바위가 막아서고 사철나무가 막아서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야 한다
대웅전에서 해우소 가는 길도 그렇고
상관음전과 하관음전 가는 길도 그렇고
산신각 가는 길도 그렇다
비가 오면 우산을 접어야 한다
이건 분명 부처님의 기획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비를 맞으며 바위 문을 통과했다
빗방울이 나를 밟고 활엽수에게 건너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온 산이 뒤척이며
파도 소리 법음을 내고 있다.



- 공광규 시 '향일암 가는 길' 모두





음력 스무날
거제도에 가면 다른 섬 외도에 갈 수 있다
뱃삯은 망치해변에서 담아온 안개 한 가방
거스름 돈은 지세포 바람 한 줌
포말 갑판에 올라
풀잎 등대를 바라보라
녹슨 몸통에 소주를 주유하고
마음의 온도를 일 도 높이면
이내 기관이 가열하여 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리고
외도에 다녀와선 외도를 말하지 말라
달빛안개 안개부두 외도행 여객선은
말하는 순간 이미 사라졌으므로.


- 공광규 시 '외도' 모두




평생 할 줄 아는 것이
뱀 구멍과 마누라 거시기 파는 것이었다는
뱀통 메고 산기슭 떠돌다가 벼락 맞아 죽은 땅꾼의
버려진 산소에도 잡목이
정수리까지 박혀 쓸쓸하다.
친구도 친구 자식도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아 울먹해지는
이민 간 친구 빈집 마루에 가득한 흙먼지
병을 얻은 친구의 홀아버지는
읍내 큰아들 집에 구들을 지고 누워 있단다.
어머니가 걸어서 시집왔다는 고개는 파헤쳐지고
개울 건너
경순네 빨간 함석지붕은 헐려 보이지 않는다.
지초실 종기네 민구네 옛집도
눈이 흐려 분간할 수가 없다.
교회당 사모는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소문이 돌고
젊은 여자의 팔 할이 다방아가씨란다.
겉늙은 내 시골 동창과 살던 다방아가씨는 도망쳤고
방앗간집 며느리 셋도 다방아가씨였는데
농자금을 털어 모두 집을 나갔다고 한다.
소고개 넘어
잘생긴 스님 하나에 보살이 셋이나 되는
된장 고추장을 많이 담아 장독이 많은 새 절 법당에는
벌써 죽은 시골 동창 사진이
빙그레 웃고 있다.
꿀벌이 분주한 재당숙네 마당을 지나
오십 중반에 폐가 무너진 아버지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퉤퉤 가래침을 뱉으면
뒤꼍에 있던 닭들이 겅중겅중 달려와
가래침을 맛있게 주워 먹던 옛집.
마당에 파도처럼 쓰러진 망초꽃대를
마구 밟아보다가
무너진 측간 똥독을 들여다보다가
쥐똥과 새똥이 범벅된
썩은 마루에 앉아 옛날을 생각한다.
나도 돈돌배기에 누운 아버지 나이가 되려면
십 년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무능하고 어린 처자식들을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이 서러워져
억새 엉엉 우는 산소에 넙죽 절을 한다.


  - 공광규 시 '엉엉 울며 동네 한바퀴' 모두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내가 시시해졌다
부동산, 재태크, 조루증 상담
이런 광고들에 눈이 쏠린다

마음으로 하는 사랑
숨어서 하는 연애
남몰래 하던 외도
무덤까지 묻고 가기로한 은밀한 상처도
긴장이 풀렸다

아찔한 계룡산 능선이나
북한산 바위 절벽
거가 매달려 있는 소나무를 보고
이제는 위험하다는 생각보다
운명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니 나는
분명히 타락했다
이런,
마흔에 순결이 구겨지다니

절벽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절벽으로 올라가야 겠다.


- 공광규 시 ‘절벽’





오랫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 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 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돌아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 소리를 냅니다.


  - 공광규 시 '무량사 한 채' 모두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탄 것이다

이곳저곳 좁은 길을 거쳐
느릿느릿 기어가는 완행버스를 타고가며
남원추어탕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양주집 간판과
희망맥주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 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로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 공광규 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모두




늙은 어머니를 따라 늙어가는 나도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법성암 부처님께 절하러 갔다
납작 납작 절하는 어머니 모습이
부처님보다는 바닥을 더 잘 모시는 보살이다
평생 땅을 모시고 산 습관이었으리라
절을 마치고 구경 삼아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법당 연등과 작은 부처님 앞에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절 마당 석탑 기단에도
내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다니며 시주하던 절인데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아름다운 연등으로
작은 부처님으로
높은 석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 공광규 시 ‘법성암’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나는 팔이 시원해졌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나를 오랫동안 따라다닌다.
도심의 화분에 담긴 꽃과
도랑에 고인 오수를 지나오면서
구름 속에 심은 꽃
구름 속에 고인 강을 생각해 본다.


- 공광규 시 ‘그만 내려 놓으시요‘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고
문화일보 1996년 10월 21일자 32면에
'고객과 함께 하는 세계로 미래로 - 삼성'이
전면 이미지 광고를 냈다

흰머리 쭈그렁탱이 할머니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인간 막대기를 안고
세상을 슬프게 응시하고 있다

영풍문고판 『TOEIC 超학습법』 48쪽에 실린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로 번 재산을
기아의 아가리에 털어넣고서야 천사가 되다니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해져서야 아름다워지다니

평생을 거쳐 아무도 아무것도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은 나는
언제 나에게서 해탈하여
이 할머니처럼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 공광규 시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
- 『소주병』(실천문학, 2004)




백화점과 명품브랜드 상점에 둘러싸인
상해 남경서로
오래된 절이 주변 빌딩과 키를 같이하고 있다

붉은 대리석 회랑과 화강암 마당
주황색 나무기둥과 연이은 처마
기와지붕과 용마루에서 금장을 한 잉어와 코끼리가
뛰어놀고 있다
유리빌딩을 빠져나온 저녁 햇살이 반짝 잉어꼬리에서 튄다

저 잡아 둘 수 없는 반짝
풍경을 쨍강쨍강 나뭇잎처럼 매달고 서 있는 황금탑
가지가 무성한 고향의 느티나무를 닮아
꼭대기가 눈에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도 답이 안 나온다

사물은 떨어져서 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일까
나와 헤어진 사람은
멀리서 봤을 때 내가 멋있었다고 한 적이 있다

한 움큼 향을 쥐고 기도하는 사람들
평생 죄를 짓고 살지 않을 것 같다

옥으로 만든 불상을 모신 법당에서
귀때기 새파란 여자가 절을 올리고 있다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옥빛이다
저런 공손을 아는 나이 먹은 여자 하나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고 싶다

오늘은 종교에 귀의한 늙어가는 여자 동창생처럼
종교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품목으로 들어온다

공손이라는 것
발원이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강원도 신흥사였던가
작은 법당에서 절을 올리던 여인의 뒤태를 한참 생각하였다


- 공광규 시 ‘장안사 에서‘
* 월간< 太白> 2017.02.vol.138.




술주정하는 정치꾼 놈을
싸가지 없는 위원장 놈을 패려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주먹을 펴니
아무것도 없다
금간 손금 몇 개 어지러울 뿐이다

내 주먹을 빠져나간
저 모래 같은 것들

뻔한 대통령은 물러가라! 앞장 서 소리치지 못하고
노동자를 내쫓는 자본가를

약자를 능멸하는 강자를 내려치지 못하고
큰 것들에게 대들지 못하고
불덩이 한번 쥐지 못하고

저 미지근하고 사소한 것들에게 맞서
사사건건 주먹을 쥐고 사느라

손바닥에 잔금만 남은 것이다
손바닥을 아무리 살펴도 잔금을 따라 빠져나간
모래 같은 권력
모래 같은 돈
모래 같은 체면
모래 같은 모든 것들

저 모래 같은 것들에게 홀려서
주먹을 쥐고 살아서
오십이 넘도록 잔금만 쥐고 사는가보다


- 공광규 시 ‘주먹을 펴며‘
* 웹진 <시인광장> 2015년 2월호





나뭇잎 숟가락으로
허공을 퍼먹는 나무
무럭 무럭 자라는 나무
햇빛은 쌀밥
비는 술
바람은 음악
꽃은 연애
열매는 아이들
별은 잘 살고 있다는 금메달
눈은 따뜻한 양털 옷
그러다 그러다 베어지면
서있던 자리에 허공


손발로 일생을 퍼먹는 사람
시간의 톱날에 베어진 자리
허공


- 공광규 시 ‘허공’







구봉 금광에 다니던 아버지가
갱도에서 시커먼 돌에 흰 차돌이 박힌 금광석을 숨겨가지고 와서는
석유등잔불 아래 내놓고
이모네 식구와 우리 식구가 둘러앉아 구경을 한 적이 있다

등잔 심지를 올리고
간드레 불꽃을 더 밝게 하고
아무리 돌을 쳐다봐도 도대체 금이라곤 보이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치석처럼 낀 불순물을 손톱으로 긁어대며
호기심이 가득한 스무 개의 눈들을 바라보며
뭐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기억이 없다

어른의 눈은 침침해서 안 보이고 아이의 눈은 몰라서 안 보인다고 했던가?
아니다,
돌을 깨는 망치와 정련하는 기계가 없으면
금광석도 잡석이라고 한 것 같다

나도 너에게 부서지고 가열될 때만 금광석일 것이다



- 공광규 시 ‘금광석‘





푸어라는 어종이 인간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워크푸어, 하우스푸어……

어류학자가 붙인 이름은 아니다
자본이 던진 낚시 바늘을 깊숙이 삼킨 어종이다

버스통에 담겨 통조림으로 팔려가기도 하고
지하철통에 굴비로 엮여 실려가기도 한다

좀 살찌고 때깔이 좋은 푸어는
한두 마리씩 승용차통에 담겨 특판되기도 한다


- 공광규 시 ‘푸어‘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는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 공광규 시 ‘별 딱는 나무’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공광규 시 ‘담장을 허물다 ‘
*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천은사 팔상전을 등에 얹고 있는 축대
돌 틈 사이에 뱀이 허물을 남겼다

자신의 허물을 벗고 달아난 뱀

뱀은 돌 틈을 지나기가 고통스러웠는지
허물이 되어서도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뱀에 물려 단청으로 독이 오른 팔상전
가을 산이 피를 뚝뚝 흘린다

나는 고통이 두렵고 독이 없어
평생 허물을 입고 산다.


- 공광규 시 ‘허물’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돼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 공광규 시 ‘걸림돌’
<제 4회 윤동주문학상 대상작 중에서>




돈 벌러 가출하여
이놈 저놈한테 뜯어 먹히고
버림받은 우리 누이

이른 봄
병든 아버지 문안 인사하러 왔다가
차마 동네 어귀를 넘지 못하네

이놈 저놈한테 버려져
거친 물살에 떠내려가다가
바윗돌 움켜잡은 우리 누이

이른 봄
화장발 부끄러운 얼굴로
차마, 동네 어귀에서 환하네.


- 공광규 시 ‘개복숭아꽃‘





나의 먼 친척 할머니 한 분은
얼굴과 몸매가 아주아주 절세여서
지나던 여자들마저 되돌아보고 되돌아보고
남자들도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는데요

절세미인을 둔 할아버지는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어
할머니를 대문 안에 가두고는 대처 한 번 안 가고
동네 논밭으로만 빙빙 돌다 일찍 죽었다는데요

할아버지 사십구재를 한 고개 너머 작은 절
젊은 중 하나가 대문을 들락거리며 지분대자
할머니의 할머니가 남자 잡아먹는 년이라고 호되게 다그치자
세숫대야에 염산을 붓고는 그만 얼굴을...... .


- 공광규 시 ‘염산세수’





빗줄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현(絃)이어서
나뭇잎은 수만 개 건반이어서
바람은 손이 안 보이는 연주가여서
간판을 단 건물도 고양이도 웅크려 귀를 세웠는데
가끔 천공을 헤매며 흙 입술로 부는 휘파람 소리


화초들은 몸이 젖어서 아무 데나 쓰러지고
수목들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비바람을 종교처럼 모시며 휘어지는데
오늘은 나도 종교 같은 분에게 젖어 있는데
이 몸에 우주가 헌정하는 우현환상곡.


- 공광규 시 ‘雨絃환상곡‘
* 말똥 한 덩이




보슬보슬한 이팝나무 꽃송이를
보슬비가 보슬보슬 적시고 있습니다

읍내 미장원에서 보슬보슬한 파마를 하고 돌아온 어머니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하고
한숨짓던 노래가 보슬보슬 피어납니다

남모를 이별 슬픈 정거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머니는 보슬비 내리는 날
눈짓도 유언도 없이 혼자 늙어 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슬비가 내리는 날 슬픔은 유전되어
말 못 할 이별 슬픈 정거장이 있는 나를
젖은 버스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갑니다.


- 공광규 시 ‘ 오늘은 보슬비가 와서‘
* 말똥 한 덩이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 공광규 시 ‘거짓말’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으로 가면
도라지꽃이 물방울을 매달고서럽게 피어 있었다.


- 공광규 시 ‘ 애장터‘






한 스님은 외롭고 외로워서
문둥이와 살을 대고
움막에서 몇 년을 살았다 한다

월남전 다녀온 상경이 삼촌은
전쟁터에서 적보다
고요가 더 무서웠다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을
시골 빈집에 내려와 혼자 자면서
몸으로 알아듣는다

오늘밤
아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미친 연놈이라도.


- 공광규 시 ‘체온’





기운 나무 두 그루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다
맞댄 자리에 상처가 깊다

바람이 불 때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지
빠악빠악 소리를 낸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서로 살갗을 벗겨
뼈와 뼈를 맞댄다는 운명이.


- 공광규 시 ‘사랑’




오늘은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결혼은 삼겹살을 굽는 것이네
타지 않게 골고루 잘 익혀야 하는 것이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불꽃을 조절하고
알맞게 익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이네

결혼은 된장국을 끓이는 것이네
알맞은 양을 물에 풀고
양념을 넣고 자꾸자꾸 간을 보는 것이네
된장과 양념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네
그걸 몰라서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 공광규 시 ‘부부론’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수목정원 한쪽
바위에 기댄 소나무 허리에 흉터가 깊다
일생을 기대보려다 얻은 상처인 것이다

일곱 가지 보물로 지은 법당이 있고
한량없는 하늘 사람들이 산다는 도솔천
지장보살도 어쩌지 못하는 관계가 있나 보다

내원궁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진달래꽃과 생강나무꽃이 거리를 두고 환하다
당신과 나,적당한 거리가 도솔천이다.


-공광규 시 ‘적당한 거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 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공광규 시 ‘얼굴반찬’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굴욕의 나이를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끌어당기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걸레처럼 끌고 다니는 밤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에서
술에 젖은 몸이
악보도 연주자도 없이 운다.


- 공광규 시 ‘몸관악기’




부드러운 눈이
꼿꼿한 대나무를 모두 휘어놓았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찢어놓고
강철로 만든 차를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지붕들을
폭 덮어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개 한 마리 함부로 짖지 않고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따악!
앞산에서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 한 번

고요가 모두를 이긴
폭설 아침입니다.


- 공광규 시 ‘폭설 아침‘





많은 시간
가슴을 다친 나무로 살다가 지금은
흰 싸락눈으로 날리고 있다

몸이 이렇게 타고 부서져 가벼워지기까지
칠십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이

한 삽도 안 되는 뼛가루를 만드는 데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니
어머니는 지루했을 것이다

묵은 밭 억새가 울면서
동네를 지나는 고압선이 고압으로 울면서
산등성이를 뛰어가고 있다.



- 공광규 시 ‘뼛가루를 뿌리며’
* 말똥 한 덩이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공광규 시 ‘시래기 한 웅큼’




읍내 술집을 전전하다가
늦은 밤에 빈 고향집을 찾아가는데
옆집 개 짖는 소리도 반갑고
멀리 보이는 이웃 불빛도 따뜻하다

아궁이에 불을 넣고
빈방 무서움을 견디며 잠들 무렵에는
시끄럽던 풀벌레 소리도
옆집 늙은 부부가 다투는 소리도 정겹다

이제 고향집에 늙은 어머니마저 없으니
수돗물도 끊기고
따뜻한 쌀밥도 국도 반찬도 없다
고향에 오면 국물도 없는 인생이 된 것이다

마른 빵을 뜯어먹다가
먼지가 쌓인 낡은 녹음기 단추를 누르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목탁 소리에 실린 예불문이 처량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아득한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는 수십 년을 혼자 울었을 것이다
혼자 고독에 울다 위가 굳어
폐목으로 쓰러진 것이다.


- 공광규 시 ‘빈집’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 공광규 시 ‘아름다운 사이’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 공광규 시 ‘폭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공광규 시 ‘소주병’





청양 산골 함석지붕 아래에서 먹는
야생 멧돼지와 산꿩은
우리를 벗어나 산야를 마음대로 헤매던
근육 맛이다

울진 후포 어시장 노점
바다에서 금방 건져올린 물가자미회는
물살을 힘차게 뚫고 다니던
지느러미 맛이다
우리에 갇힌 돼지나 양어장 물고기는
맛이 없다
비육된 이념이나 사육된 인간도
마찬가지다

세상천지에 이 맛없는 고기들


- 공광규 시 ‘맛 없는 고기’




아주 끔찍하여라

차고 무거운 시간 안에서의 투덜거림이
내 생의 반이었다니
이제 남은 날은?

확실한 것은
자꾸 줄어든다는 것

그러니 세월이여 천천히
좀더 천천히 내 숨통 꺾어
내 비겁했던 지난날을 기려
길 위에 내동댕이쳐다오

나 풀 한 포기로 삼아
사시사철 밟히고 일어서며
엄혹한 구름 아래서의 희망을
다시 노래할지니.


- 공광규 시 ‘ 유언‘
* 詩集, 지독한 불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 공광규 시 ‘욕심’
* 시집: 지독한 불륜.





문자를 여의고 말을 떠나는
이해할 수 없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설명하면 틀려버리는
그리고 아주 우연인
글로 쓰면 아직 그곳에 덜 도달한
입술에 올려지면 허공으로 사라지는
다가와도 못 막고
도망가면 잡을 수 없는
너무 큰 문자이거나 말이어서
가둘 수도 쫓아버릴 수도 없는
애걸해서도 요구해서도
거친 성욕으로도
마음을 아주 놓아버려도 안 되는
무엇이 안 된다거나 된다라고도 할 수 없는
다만, 마음에 물이 들면
아주 오래 오래 바래지 않는
혹시 바래거나 잠시 물건처럼 잃어버려도
흙 속에 묻힌 보석처럼
사라지지 않는.


- 공광규 시 ‘사랑- 불경을 읽다가 문득‘




그 개를 나는 안다

먹기 위해 굽실거리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 벌고 싶어하는,
횡령과 보신이 머리를 지배하고,
횡재와 호사한 생활만 꿈꾸는,

카페에서 낭만의 기차만 타는 시인을,
스포츠신물과 주식동향, 신문연재소설이 유일한 독서인,
술집에서만 안주로 책임 없는 정치를 애기하는,
빨아주고 핥아주는 언론과 학자 평론가를,
아전만한 권력에게 후장을 대주고 싶어하는,
자본가의 금가루 뒤집어쓴 노조간부를,
권력의 칼국수 얻어먹으며 황송해하는 운동가를,

정의의 쓰레기통 옆
개뼈다귀 하는 물고 서 있는,
털빠진 누추한,



- 공광규 시 ‘누추한 개‘
<지독한 불륜> 실천문학사, 1996년




누구에게나 여름은 짧구나
시간의 단두대 앞에서
고개 떨구지 않는 자 없다
서리가 한 번 치니
푸른 잎들 다 내린다
내일 바람 불면
남아 있을 잎 없겠다
동지들 다 가고 없는데
오는 겨울 어떻게 맞을 것인가
다시 길을 묻는 수밖에
질문을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져
엄혹한 현실의 매질 앞
사소한 것에 화내거나 목숨 걸지 않고
내 안의 나약함과 부도덕을 먼저 때려죽이며
부드럽게 견디는 수밖에.


- 공광규 시 ‘견디는 잎새‘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꺽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


- 공광규 시 ‘사랑’




우리가 춥고 불운할지라도
찬란한 별무더기
같이 덮고 잘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

그래도 임종이 가까워 부를 노래는
차라리 그때가 겨울이라도
당신이 있어 따뜻하고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 것

세월 앞에서
수치와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젊음을 자랑하는 나에게
충고한다, 차라리 금기를 구걸하다
거리에서 맞아 죽어라.


- 공 광규 시 ‘충고‘
* 지독한 불륜, 실천문학사




바람 부는 들판에서
가난과 설움의 키를
서로 대보며 애무하던
그때 겨울이 좋았다

혹한에 손과 발 얼어도
깃발 아래 어깨 겯고
그리움 키우던 그때
서러웠어도 외롭지 않았다

비록 우리들 꺾여
슬픔의 무게로 짓눌린
고통의 이불 덮었어도
체온 나누어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않다
지갑의 두께
방의 크기에서 벌이는
쓸쓸한, 우리들의 자본화된.


- 공 광규 시 ‘쓸쓸한, 자본화된’




아내를 들어 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공광규 시 ‘아내’





돈이 사랑을 이기는 거리에서
나의 순정은
여전히 걷어차이며 울었다

생활은 계속 나를 속였다
사랑 위해
담을 넘어본 적도 없는 나는
떳떳한 밥 위해 한 번도
서류철을 집어던지지 못했다

생계에 떠밀려
여전히 무딘 났기대 메고
도심의 황금강에서
요리도 안 되는 회한만
월척처럼 낚았다

자본의 침대에 누워
자존심의 팬티 반쯤 내리고
엉거주춤 몸 팔았다
항상 부족한 화대로
시골에 용돈 가끔 부치고
술값 두어 번 내고
새로 생긴 여자와 극장 가고
혼기 넘은 친구들이 관습과 의무에 밀려
조건으로 팔고 사는 결혼식에
열심히 축의금을 냈다

빵이냐 신념이냐 물어오는 친구와
소주 비우며 외로워했다
나를 떠난 여자 생각하다가
겨울나무로 서서 울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이런,
시시한 비망록이라니.


- 공광규 시 ’ 시시한 비망록‘





** 공광규: 1960년 6월 15일, 충남 청양군. 데뷔 1986년 동서문학 '저녁1' 등단.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20. 제9회 녹색문학상, 2009.06.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