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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돌아 앉자서 눈물 흘리는 나’ - 황 지우 시.

가만히.., 생각 해 본다.








삶이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사고
그러니, 저지르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택시 주차장으로 가면
국민학교 교사처럼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핸드 마이크로,
종말이 가까웠으니 우리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쳐대지 않던가
사람들은 거지를 피해가듯
구원을 피해가고
그는 아마도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혼자서 절박해져가지고
저렇게 나와서 왈왈대면
저렇게,
거지가 되지


   - 황지우 시 '또 다른 소식' 모두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공범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황지우시 '손을 씻는다' 모두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을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황지우 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모두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 황지우 시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모두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지평선)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아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경)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야.
우리 마음의 地圖(지도)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 황지우 ㅅㅣ '나는 너다' 모두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황 지우 시 ‘겨울산’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Human&Books, 2010.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모두
시집<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미래사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 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황지우 시 '눈보라' 모두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 황지우 시 '당신은 홍대앞을 지나갔다' 모두






공중 목욕탕에 앉아서 제 손으로 제 몸을 구석 구석
훑어 나가는 것은 한두 주일 동안의 때를 밀어내는
일만이 아니다, 一生이여. 이 부피만큼 살아왔구나.
질그릇처럼 아슬아슬하다. 대저
나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내가 있었던가. 나의 容積이 탕 밖으로 밀어내는 물?
거짓이 나를 만들어 놨을 뿐,
두뇌의 격한 질투심. 열등감. 뭐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으로 적재된 서른 몇 해. 헐떡거리며 나는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살아 있다면 내 나이쯤 되는. 가령
전태일 같은 이는 聖者다.그의 짧은 삶이 치고 간
번개에 들킨 나의 삶. 추악과 수치. 치욕이다. 그의
우뢰소리가 이 나이 되어 뒤늦게 나에게 당도했구나.
벼락맞은 靑春의 날들이여. 나는 피뢰침 아래에
있었다. 나.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요행이었을 것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묵묵부답인 소작농이여. 그는
그가 떠나지 못한 新月里 北平의 防風林 아래 윤씨
땅을 새마을 모자 채양으로 재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웃 도암재를 넘어 그는 장독 굽는 陶工이 되려 했으리.
그는 小木이었을까. 말없고 성깔 괴팍한 미쟁이였을까.
아 그는 대처에 나와 그의 바람기로 인해 노가다가 되었으리라.
극장 간판쟁이였거나 공직공장 경비원이었거나 철도 노동자였거나
추운 삶의 시퍼런 정맥을 따라 淸溪川
평화시장까지 흘러갔으리라. 그는 땔나뭇꾼. 껌팔이. 신문팔이.
고물장사였었다. 역 뒤. 極貧의 검은 강가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빈 창자로
서 있었고. 내장에 콸콸 넘치는 쓴 하수도. 뜨거운 내 눈알은
붉은 회충알들이 청천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지러웠다. 현기증 사이로 본 부. 모. 형. 제. 전가족이
각각이 고아였다. 자원입대한 형이 떠난 후
조개석탄을 주우러 침목을 세며 南光州까지 걸어갔었다.
産物을 가득 실은 여수발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最低 生計 以下에 내려와 있는 차단기. 赤信號앞에
서 있던 불우한 날들이여.
風塵 세상 살아오면서 나는 내 삶에,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을 不在로 만들어 버렸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자화상이 흉칙하듯. 나는 내가 살던 露天을 복개했다.
캄캄한 여러 지류가 나를 지나갔다.
지나갔었다. 그리고 지나간다.
지금 나는 알몸이다.
내 손이 나를 만진다. 이것이 나다.
때를 벗기면 벗길수록 生涯는 투명하다.
낫자국. 칼자국. 자전거에서 떨어져 무릎팍에 남긴
상처가 내 몸과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돌아다보니 몇 바가지 물로 나와 같이
목전의 자기 일생을 씻어내는 알몸들.
알몸들이여. 나의 현장부재중인 '나'들이여.
그러나 등 좀 밀어 달라고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있다.
이태리 타월을 들고 나는 한 노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닿지 않는 나의 등으로.



- 황지우 시 '나의 누드' 모두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 황지우 시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모두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남대문 쪽으로 내려다본
매연이 아름답다. 중세의 문은 霧笛을 우는 배처럼 떠 있고
클랙슨 음색의 희끄무레한 대기; 훅 불면 사라질,
먼지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도큐 호텔, 市警, 피부비뇨기과, 정류장, 가로수들;
훅 불면 사라질 먼지 인간들이
시장에서 나온다. 나는 남대문 부근의,
낮에 나온 별자리를 보며 城을 찾아간다.
쿠스코에서 티티카카 호수로 가는 도중에서 쓴
그녀의 편지는 내 호주머니 속에 아직 있다.
나는 그걸 읽지도 않았다.

그렇다, 저 남쪽에는 나의 정원이 있다.
석양을 되받아 그 일대를 鍍金시키고 있는 연못;
나를 집어삼킨, 나의 필사적인 요양원.
나는 왜 그곳을 버리고 다시 떠나왔는가?
이미 성문은 닫혀 있고, 어쩌면
유토피아는 우리가 뒤에 두고 지나쳐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왜 한사코 근원으로 거슬러가고 있는가?
공항에서 그녀가 말했다: "이곳이 나를 뱉어낸 거야."
남대문에서 나는, 두고 온 저녁의 화엄정원을 생각했다.
그녀가 해발 4천 미터, 공중 호수로 들어갔을 때
다시는 내게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널 대신 살아주고 있는 자의 정체가 뭐야?"
"굶주림과 권태를 동시에 넘어선 곳;
난 거주할 수 있는 낙원을 찾고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넌 아직도 삶을 사랑하고 있어, 넌 겁쟁이야;
이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낮에 나온 별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별은 끔찍하다, 어지럽다
고 내가 생각한 것은
그녀가 내 삶에서 빠져나간 뒤
때로 내가 허공을 육체처럼 껴안는 버릇이 생기고부터다.



- 황지우 시 '낮에 나온 별자리' 모두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모두 1987)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 황지우 시 '출가하는 새' 모두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 ......................... 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눕고 싶다.

印度, 인디아!
無能이 죄가 되지 않
삶을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
온갖 야한 체위로 성애를 조각한
사원; 초월을 기쁨으로 이끄는 계단 올라가
영원한 바깥을 열어주는
문이 있는 그곳.



  - 황지우 시 '노스텔지어' 모두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뎁혀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식사(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안을 헹구고(이 사이에 낀 찌꺼기를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는 주의를 주었다)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 - 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구석기 시대(舊石器時代)의
이 다산성(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번역극(飜譯劇)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소파 하나, 그뒤엔 9시를 가르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있고 세잔느풍(風) 정물화 한점, TV세트,
창(窓)을 향한 행운목(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 놓고 읽지도 않는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코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서가(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까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 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렛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 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컷트해 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 놓고 내 귓밥을 파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 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 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 주고 목욕시켜 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 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生)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가끔 햇빛을 받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 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 행운목 나는
이 병실(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서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희극(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의(無爲)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격(格)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무의도식배(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격조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믈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무구(無垢)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횡(橫)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 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공기족관(空氣族館)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 데스크에서는 전 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였

내가 '오우 소파, 마마미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전 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 낮 28도 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으로 나는 가고 있어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공기족(空氣族)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황지우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日記)'모두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 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 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롭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그러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품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블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게야.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모두




1
어머니를 묻고 산을 내려와 뒤돌아보니
羅州 全域에 만발한 배꽃들이
땅 위에서 가장 건사한 잔치, 베풀어놓았다

봉분이 나오자 일꾼들은 삽 들고 내려가고
예순 넘은 장형, 스님 체면 아랑곳하지 않고
땅바닥에 굴러 어머니, 아부지를 목놓아 부르는데
아우와 나는 각기 다른 하늘 보며
지점에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
슬픔 또한 크리라
집에 돌아와 빈방에 혼자 누웠다
나는 내가 비로소 큰 짐을 부려놓은 듯
홀가분했고 이제 우주의 내 배꼽이
뚝 떨어진 듯했다; 한차례 경련이
지나가고 나는 어머니께 말했다
당신은 제가 가장 사랑한 여자였어요
나는 곧 잠이 들었다

2
죽는다는 건 잠자는 거; 잠이 들면,
그렇지, 꿈을 꾸겠지?
아직 발 디뎌보지 못한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꿈; 아, 죽음 뒤에도 무엇인가가 있다면
어떡하지? 이거 정말 큰 문제야

죽는다는 건 컴컴한 어둠에 드는 거;
그림도 소리도 없는 절대 암흑, 한번 죽으면
텅 빈 것도 아닌,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거
그 사람 인격도 성깔도 목소리도 표정도 마음도
죄악도 깔끔하게 지워져버리는 거;
아, 죽은 뒤에 정말로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떡하지? 이거야말로 진짜 큰 문제 아녀?


- 황 지우 시 ‘ 햄릿의 진짜 문제‘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Human & Books , 2010.




병원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나오셨지만
어머님이 예전 같지 않게 정신이 가물거리신다
감색 양복의 손님을 두고 아우 잡으러 온
안기부나 정보과 형사라고 고집하실 때,
아궁이에 불지핀다고 안방에서 자꾸 성냥불을 켜시곤 할 때,
내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내가 잠시 들어가 고생 좀 했을 때나
아우가 밤낮없이 수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새벽 교회 찬 마루에 엎드려 통곡하던
그 하나님을
이제 어머님은 더 이상 부르실 줄 모른다
당신의, 이 영혼의 정전에 대해서라면
네가 도망쳐나온 신전의 호주를 부르며
다시 한 번 개종하고자 하였으나
할렐루야 기도원에 모시고 갔는데도 당신은
내내 멍한 얼굴로 사람을 북받치게 한다
일전엔 정신이 나셨는지 아내에게
당신의 금십자가 목걸일 물려주시며
이게 다 무슨 소용 있다냐, 하시는 거다
당신이 금을 내놓으시든 십자가를 물려주시든
어머님이 이쪽을 정리하고 있다고 느껴
난 맬겁시 당신께 버럭 화를 냈지만
최후에 십자가마저 내려놓으신 게 섬뜩했다.
어머니, 이것 없이 정말 혼자서 건너가실 수 있겠어요?

전주예수병원에 다녀온 날, 당신 좋아하시는
생선 반찬으로 상을 올려도  잘 드시질 않는다
병든 노모와 앉은 겸상은 제사상 같다
내가 고기를 뜯어 당신 밥에 올려드리지만
당신은, "입맛 있을 때 너나 많이 들어라" 하신다

목에 가시도 아닌 것이 걸려 거실에 나왔는데
TV에 베로나 월드컵 공이
살아서 펄펄 날뛰고 있다


- 황 지우 시 ‘ 이 세상의 밥상‘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으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없는 밥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 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 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 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 황 지우 시 ‘오래된 물음‘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민음사,2014




비오는 날이면, 아내 무릎을 베고 누워, 우리는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젤 좋아하는 노래는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싶어 바다로 간다.
  
                                               는 동요이다.
그 方舟(방주) 속의 권태롭고 지겨운 시절이, 이제는 이 지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지복한 틈이었다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라. 華嚴(화엄)의 넓은 세상.
들어가도, 들어가도, 가지고 나올 게 없는
액체의 나라.
나의 汚物(오물)을 지우는, 마침내 나를 지우는 바다.


- 황 지우 시 ‘182’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Human & Books, 2010.





거울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거울에 자주 나타난다,
내가

재떨이를 찾아 책상까지 갔다가 오면서도
아, 내가 책상까지 갔다 오는구나, 생각한다
책상 모서리에 몸이 스칠 때
아, 내가 아직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
물로 채워진 어떤 덩어리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가끔 죽은 사람 생각이 들곤 하는데
말끝마다 씨발 하던 채광석이라는 자라든가
구반포 치킨집 부서진 치킨 앞에서 술 취하면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드럽게 부르던 김현 선생이라든가
왜 그들의 음성이 떠 있던 그 공간만의 생인가
그들의 목소리, 표정들, 성격은 환영인가

턱 밑 털을 밀기 위해 추어올린 내 얼굴:
비누 거품을 허옇게 쓴 나의 헛것,
이것, 아무것도 아닌데!


- 황 지우 시 ‘우울한 거울’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황 지우 시 ‘겨울산’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Human&Books, 2010.




내 마음의 馬脚마각이
뚜벅뚜벅 너의 가슴을
짓밟고 갔구나.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
나는 너를 다 갉아먹어 버렸어.
內心내심의 뼈만 남은 앙상한 果實과실,
苗板묘판에다가 너의 生생을 다시 移葬이장하련다.
사랑해!

- 황 지우 시 ‘333’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Human&Books,2010.




서까래는 찢어진 모자 채양처럼 내려와 있고
뜯긴 문풍지 바람에 온 집이 부르르 떨고 있다

여기, 난폭한 삶이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집이란 사람 훈김으로 서 있는 것

박살난 장독대, 금간 시멘트 바닥에
고추 한그루 올라와 붉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나가서 더 망하면
다시 돌아오라고


- 황 지우 시 ‘*빈집’
* 시집에 실리지 않은 미발표 시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 지우 시 ‘거룩한 식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至福(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화집)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후두음)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산성)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석교)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 황 지우 시 ‘ 몹쓸 동경 (憧憬‘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 사포의 시구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 이거
우주 기적(奇蹟) 아녀


- 황 지우 시 ‘발작’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 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저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 황 지우 시 ‘等雨量線 1‘
*어느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민주주의는
교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사는 진실을 말해야 하고
학생들은 그 진실을 배워야 한다.
교단은 비록 좁지만 천하를 굽어보는 곳
초롱한 눈들을 속여서는 안된다.
자유로이 묻고
자유로이 대답하고
의문 속에서 창조되는 진리
아니오 속에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외우는 기계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일魷짜리만 소용되는 출세주의 교육
꼴찌를 버리는 교육이어서는 안된다.
일등하기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음독자살하고
참고서 외우는 죽은 교육이 싫어서 목을 매달고
점수에 납짝 눌려 있는 초초한 가슴들
교실이 감옥이 되어서는 안된다.
친구의 목을 조르는 경쟁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모이면 오손도손 정이 익어가고
눈과 눈들이 별이 되는 꽃밭
서로의 가슴이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교실은 너와 내가 하나 되는 공동체
각기 다른 빛깔로 피는 꽃밭이어야 한다.


- 황 지우 시 ‘ 민주주의는 교실에서부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 황 지우 시 ‘재앙스런 사랑’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 황 지우 시 ‘시 에게’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 황 지우 시 ‘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1952년 전남 해남군 북평면 배다리에서 출생(음력 1월 25일). 빈농의 3남
-1954년(4세) 광주로 이주함.
-1959년(7세) 광주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하다.
-1965년(13세) 광주 서중학교에 진학하다.
-1968년(16세) 광주일고에 입학하다.
-1972년(20세)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미학 전공)에 입학.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다.
-1973년(21세) 문리대의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강제입영되다.
-1976년(24세) 제대 후 복학하다.
-1977년(25세) 김소연과 결혼하다.
-1978년(26세) 장남 찬 출생하다.
-1979년(27세) 인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입학하다. 장녀 정 출생하다.
-1980년(28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沿革」이 입선,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여 필명 황지우롤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다.
-1981년(29세)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사유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다.
-1983년(31세)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고 동 시집으로 계간 『세계의문학』이 제정한 제 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다.
-1985년(33세)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다. 계간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이 되다. 제2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민음사에서 발간하다. 한신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시작하다.
-1987년(35세) 제 3시집 『나는 너다』를 풀빛출판사에서,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를 한마당에서 각각 펴내다. 『뉴욕 타임즈』에 시 「그날그날의 현장검증」이
소개되다.
-1988년(36세) 거주지를 서울에서 광주로 옮기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다. 시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극단 연우무대에서 공연하다.
-1989년(37세) 독일어판 한국현대문학 선집에 시 「呼名」외 2편이 수록되다.
-1990년(38세) 제 4시집 『게 눈 속의 연꽃』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다.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광주로 이주시키다.
-1991년(39세)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 26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다.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를 미래사에서, 시선집 『聖가족』을 살림출판사에서 각각 펴내다.
-1992년(40세)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문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여 「끔찍한 모더니티」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다.
-1993년(41세)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제 8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다.
-1994년(42세)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취임하다.
-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