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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혼자 서서 부르는 노래’ - 한 하운 시.

저 길을 따라 걸으면.., 고향이 보일까?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한 하운 시 ‘보리피리’




잘못 살아온
서른 살짜리 부끄러운 내 나이를
이제 고쳐 세어본들 무엇하리오만.

이 밤에 정녕 잠들 수 없는 것은
입술을 깨물며 피를 뱉으며
무슨 벌이라도 받고 싶어지는 것은

역겨움에 낭비한 젊음도, 애탐에 지쳐버린 사랑도,
서서 우는 문둥이도 아니올시다.

별을 닮은 네 눈이 위태롭다고
어머니의 편지마다 한때는 꾸중을 받아야 했습니다

차라리 갈수록 가도 가도 부끄러운 얼굴일진댄
한밤중 이 어둠 속에 뉘우침을 묻어버리고

여기 예대로의 풍토를 그리워하면서
무척도 새로 돋아나고 싶은 보람을 뒹굴며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이 깊어만 갑니다.


- 한 하운 시 ‘수수야곡(愁愁夜曲)‘





- 삶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보리피리, 인간사, 1955>




-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보리피리, 인간사, 1955>





- 귀향(歸鄕)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 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깜깜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정말
법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 듯하는데

산천초목은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흐르고.......

<가도가도 황토길, 지문사, 1983>




- 비 오는 길



주막(酒幕)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잔 술을 모르랴

<보리피리, 인간사, 1955>



-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나는 죽어 파랑새 되리,덕우출판사 >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 한 하운 시 ‘어머니’




바다!
억겁을 두고
오늘도 갈매기와 더불어 늙지 않는 너의 청춘,

말못할 가슴속 신음 같은
파도 소리
한시도 쉴 새 없이 처 밀고 처 가는
해식사.

바다의 꿈은 대기만성인가
억겁을 두고 신념의 투쟁인가
바다는 완성한다!
욕망이 침묵하는 그 속에서

황혼이 깃들어
저녁 노을의 빛 .빛.빛
변화가 파도에 번질거린다.


- 한 하운 시 ’해변에서 부르는 파도의 노래‘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라 랴 러 려
로 료 루 류
르 리


- 한 하운 시 ‘개구리’









한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한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 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메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 머리에
쩔름 쩔름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온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우 윈도우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 볼 수 없는 나의 얼굴.


- 한 하운 시 ‘自畵像(자화상) ‘





- 목숨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은 새운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죽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진다.

아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자벌레의 밤



나의 상류에서
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온 밤이냐.

물결 닿는 대로 바람에 띄워 보낸 작은 나의 배가
파도에 밀려난 그 어느 기슭이기에
삽살개도 한 마리 짖지 않고......

아 여기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 보아야 하나

첩첩한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서
가릴 수 없는 동서남북에 지친 사람아.

아무리 불러 보아야
답 없는 밤이었다.





-生命(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罰(벌)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는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은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 나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億劫)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양 걸음걸이 몸맵시 하며 틀림없이 저......누구라 할까... ...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 버러지


새살이 하려 찾아온
또 새손댁 금실기가
바램에 부풀은 눈시울에
똑똑히 삶을 그린 눈썹이 시물구나

손가락 떨어지면
손목은 뭉뚝한 몽두리 됐다

분에 못견딘 삶이래서
내 몽두리도 마구마구 휘어때린
매 맞는 땅바닥은 태연도 한데
어이 억울한 하늘이 울음을 대신하나

한 가지 약을 물어 천 가지를 바래며
전설로 걸어가면 신기를 만나련가

이 실천이 꿈이련가
꿈이 실천이련가

큰 목적을 위하여
이 몹쓸 고집을 복종시키자

인내만이 불행을 달래어 두고
의심만이 나와 소근거리자

버러지 버러지 약 버러지

놀래 자지러진
네 너로 네딴으로 죄없단 빛이
누두둑 푸른 피 흘려 흘려

헒 짙은 목덜미에
왕소름을 끼친다

내가 버러지를 먹는지
버러지가 나를 먹는지




- 귀향(歸鄕)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 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깜깜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정말
법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 듯하는데

산천초목은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흐르고.......

<가도가도 황토길, 지문사, 1983>




- 비 오는 길


주막(酒幕)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잔 술을 모르랴

<보리피리, 인간사, 1955>




-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 한하운: 1920-1975) 함남 함주 출생. 1943년 중국 북경대 졸업. 1949년 『신천지』에 「전라도」 등 12편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음. 자신이 겪었던 나병을 소재로 하여 거기에서 오는 고통과 절망의 처참함을 그렸으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리얼하면서도 자기 상황을 고발하는 시를 썼다.

시집으로는 『한하운시초』(정음사, 1949), 『보리피리』(인간사, 1955), 『한하운시전집』(1956), 『가도 가도 황톳길』(지문사, 198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