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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정갈하게 ‘수놓는 시’ - 허 영자 시.

간결한.., 아름다움.






나는 많이
가진 것 없기에
버릴 것도 없습니다
버릴 것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남이 버린 것도
주워서
알뜰히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아주 떠날 때에도
버리지 않고 두고 떠날 것입니다
부끄러운 살림 몇 점
두고 떠날 것입니다.


- 허 영자 시 ‘ 소유所有‘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허 영자 시 ‘ 완행열차’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미래문화사, 1995.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다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다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 허 영자 시 ‘길’
<현대시학> 여름호 신작시




사랑은
눈 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 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 허 영자 시 ‘ 그대의 별이 되어‘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여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 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허 영자 시 ‘ 무지개를 사랑한걸‘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 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 허 영자 시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딸아
네가 아직 아기였을 때
엄마는
공장에서 이제 막 출고된
눈부신 새 차였지


딸아
네 몸무게 영혼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을 때
엄마는
가파른 고갯길을 숨차 오르는
낡은 고물차였지


용서하라 딸아
이제는 폐차
밧데리는 꺼지고
바퀴는 헛돌고
브레이크는조차 말을 듣지 않는
녹슨 폐차 엄마를.


- 허 영자 시 ‘폐차’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 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 허 영자 시 ‘ 가을 기도’




모딜리아니(Modigliani) ― 푸른 눈의 여인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는 눈이다 차안도 피안도 영원도 찰나도 투명한 그 시선 앞엔 경계를 허문다.

고 흐 (Gogh) ― 자 화 상 한 쪽 귀를 잘라내니 세상 소란 반이로다 하지만 내게 아직 뜨거운 숨결 있어 한 귀는 세속 쪽으로 또 한 귀는 마음을 듣는다.

모네(Monet) ― 수련(睡蓮) 마구 황칠한 지베르니의 연못 속에 심청이의 연꽃이 고요히 솟아있네 천재와 햇빛이 만난 장엄한 오케스트라. *지베르니(Giverny) : 모네의 집이 있는 곳 김환기(金煥基)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저 많은 불빛이며 저 많은 人總들 눈물겹고 가여운 생명의 흔들림 이 한번 만남을 위해 몇 억 겁을 기두렸나.

뭉크(Munch) - 절규불길하게 흔들리는 붉은 하늘 귀를 막아도 들릴것은 다 들린다소리는 들림으로 공포가 된다.


- 허 영자 ‘ 명화에 부치는 정형시 네 편‘





또 한번 천지는
흔들리누나

꽃잎은 펑펑
눈처럼 쏟아지고

고꾸라질 듯 고꾸라질 듯
내 영혼 흐느끼느니

알고 싶구나
애인아

바람부는 날은 그 마음에도
아픈 금이 그이는가.


- 허 영자 시 ‘바람부는 날’




입술에
입술 포개고

뺨에
뺨 부비고

꽃들은 잠자네

어둠은 흘러
땅을 적셔도

꺼지지 않는
밤하늘 별빛

눈물에
눈물 석고

마음에
마음 겹쳐

아아
꽃들은 잠자네.


- 허 영자 시 ‘ 밤꽃밭‘




너무
맑은 눈초리다

온갖 죄(罪)는
드러날 듯

부끄러워
나는
숨구 싶어…….


- 허 영자 ‘하늘’







빈 들판을 걸어가며

저 빈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성싶다
꾸밈 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을 성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
아득히 신비로운
신의 땅까지 다다를 성싶다


- 허 영자 시 ‘ 빈 들판을 걸어가며’




가을이
푸르름을 숭상하던 마음 거두어
사라져가는 것을 사랑하라고

앞을 막아서는 바위 같은 절망을
물처럼 고요히 싸안으라고

날카롭게 날이 선 원수의 칼날도
바람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지라고

가을이 가을이
나에게 가르친다.


- 허 영자 ‘가을이’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 허 영자 ‘여름소묘’





네 눈의 맑음
네 눈 속의 흔들리는 기쁨

쓸쓸한 해으름께
아픈 팔 쉬는 내 등 너머로

바안히 불을 켜는
초롱별 한 쌍.

눈썹
고향 언덕의
애솔나무밭같은 푸르름이

애솔나무밭에 이는
맑은 바람같은 푸르름이

바람결에 실리던
젊은 꿈같은 푸르름이

딸아

네 눈썹 위에는
항시 그런 푸르름이.....


- 허 영자 시 ‘ 딸을 위한 자장가‘



아픈 손이
아픈 손끼리 마주잡는다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끼리 순히 겹친다

아픈 손이
아픈 손 곁에서 쉬고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 곁에서 낫는다

참말로 아픈 손
아픈 마음은

그래서 안 아픈 손이 되고
또 안 아픈 마음이 된다.


- 허 영자 시 ‘아픈 손끼리’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疫病

罪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사는

섧은 情婦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내다본다

긴 봄날엔--


- 허 영자 시 ‘ 긴 봄날‘




하고 많은 선물 중에
하늘은 나에게
눈물겨운 슬픔 하나 주셨습니다

하고 많은 말씀 중에
하늘은 나에게
"나를 잊지 마"
목이 메는 꽃말 하나 주셨습니다.


- 허 영자 ‘물망초’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 허 영자 시 ‘임’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끼

죽은 나무도 생피붙을 듯
죄스런 봄날

피여, 피여

파아랗게 얼어 붙은
물고기의 피,

새로 한 번만
몸을 풀어라

새로 한 번만
미쳐라 달쳐라.


- 허 영자 ‘봄’




돌 틈에서 솟아나는
싸늘한 샘물처럼

눈밭에 고개드는
새파란 팟종처럼

그렇게
맑게

또한 그렇게
매웁게


-허영자 시 ‘무제'




살고 싶어라
아파
살고 싶어라

한 웅큼
다수운 햇살에 촉이 트는
그런 민감함으로

한 오리
가벼운 바람결에 풀잎 흔들리는
그런 섬세함으로

하늘 한켠
슬며시 일었다 스러지는 구름
그런 무위(無爲)의 몸짓으로

얼음 속 불꽃으로
감추인 끓는 가슴으로
병(病)들며 또한 나으며....



- 허영자 시 ‘삶’
* 시집<빈 들판을 걸어가면>.




당신 앞에선
그만
눈물이 글썽여요.

하고 싶던 이야기
모두 잊고
묵묵히
고개만 숙여요.

바람에
문풍지 우는 밤
당신이 절 잊을까봐
겁이 나요.

그럼에도 정작
마주 보시면
가슴은
바다의 울렁임.

저물녘에
초롱불 켜 들고
마중 갔다가

저만큼
고운 모습 설핏거리면
나빈 양 가슴 접고
울상이 돼요.

돌아오는 길목
징검다리께
쪼그려 앉아
손등을 꼬옥 꼬집어도

당신 계신 데선
못내
수줍은 버릇

지나가신
빈자리에
워어이 소리치면
훠어어이
메아리만 돌쳐와요.


- 허 영자 시 ‘ 꽃‘




한 여인의
그 영혼을
송두리째 드린다 하면

한 여인이
그 살을
피를
내음을
송두리째 드린다 하면

아아
그대의 고독은 풀릴 것인가

차갑고 어둡고 말없는 얼굴
그대 마음을 풀 길 없는
크나큰 이 슬픔

울먹이며 떨며 머뭇대는
나의 사랑아!


- 허 영자 시 ‘바위’




외곬으로 외곬으로만 흐르던
내 사랑이 쏟아놓는
선연한 핏자욱

어느 밤은 두견새의 울음
또 어느 밤은
하얀 목마름

빈 뜨락을 비취는
서러운 달빛으로
기슭을 치는 목메인 물결로
안타깝던 내 기다림은

겨운 스스로의 보람에
무르피는 이 봄
진달래꽃

순결무구한 내 젊음이
흐느끼며 흐느끼며 지우는
불타는 눈물.....


- 허영자 시 ‘ 진달래‘
* 시집 <가슴엔듯 눈엔듯>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 허 영자 시 ‘얼음과 불꽃‘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 허 영자 시 ‘ 刺繡(자수) ‘





** 허 영자: * 1938. 8. 13. 경상남도 함양
* 등단 : 1962년 현대문학 시 '사모곡' 등단
* 수상 : 2015년 옥관문화훈장2015년 제3회 허난설헌 시문학상1998년 제3회 민족문학상 본상 목월문학상.
* 경력제40대 한국시인협회 평의원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

*함양 출신의 여류 시인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이다. 겸손하기로 문단에 소문이 난 분이다. 까마득한 후배들을 만나도 먼저 허리를 굽히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겸손은 감히 따를 이가 없다. 근래 등단한지 2~3년만 되어도 윗 사람은 눈에도 안보이는 듯 행동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은 시대에  교과서 적인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