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 쓸쓸한 영혼

존재와 ’본질‘ - 신동집 시.

존재 함으로 ‘상상’한다, 본질을,,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신동집 시 ‘오렌지’모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갑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을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맬 차롄가.
차갑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신동집 시 ‘어떤 사람‘모두




아주 너를 멀리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平地 가로 떠났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 신동집 시 ‘눈’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 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生活史는 그래도 숨이 도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 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더욱 좋은 일.
秋日은 마침 別曲이 된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高麗(고려)선비는


- 신동집 시 ‘추일별곡(秋日別曲)‘





가장 아름다운
이름으로 시작하는가
우리의 기쁨은.
설령 그 기쁨이
어느 날 그저 그런
나날이 되고 만다 해도
때로는 바이 없는
슬픔이 되고 만다 해도
마무리는 옥빛 서린
이름으로 빛나 주기를.
슬퍼도 기쁜 그런 이름으로
우리의 日常은.
아 날은 저문다
더없이 좋았던 날은 저문다.


- 신동집 시 ‘우리의 일상日常은’
* 송별送別.문학세계사.1986.




고얀 놈의 수작도 웃어 넘기는
해는 뜬다.
아린 자의 마음에도
어진 해는 뜬다.
해를 이고 일어서면
오늘은 생각보다 가볍다.
한 송이 장미에도
장미만한 햇살은 묻어나고
한 개 조약돌에도
조약돌만한 햇살은 돋아나고
한 마리 참새에도
참새만한 넋은 비치고
하나의 슬픔에도
슬픔의 크기만한 하늘은 비친다.


- 신동집 시 ‘해뜨는 법‘
* 시집:장기판/문학예술사/1980



바다여, 옷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살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진한 잉크 물이다.

수면으로 내려앉는 돌층계도
뱃전에 날아 뜨는 갈매기떼도
떠나는 고동 소리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해만의 끝머리 흰 등대도
등대 위에 조으는 구름 자락도
흩어진 섬들의 밝은 무덤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바다여,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찍어서 내가 쓰는
가슴의 잉크 물이다.


-신동집 시 ‘바 다’
* 시집 <새벽녘의 바람, 형설출판사>
*해만(海灣):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간 곳. 바다와 만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은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신동집 시 ‘송신(送信) 1973,‘




많은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갔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왔고
그리하여 서로들끼리
말 못할 악수를 한다
죽은 사람과
죽지 않고 남은 사람과

악수란 오늘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의 한 편 팔은
땅속 깊이 꽂히어 있고
다른 한 편 팔은
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한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를 그리워하며
산 사람이 죽어갈
때를 그리어 보며……


- 신동집 시 ‘악수‘
ㅡ『장기판』(문학예술사, 1980)




목숨은 때묻었나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페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주검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의 현암玄暗 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는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오라.


- 신동집 시 ‘목숨’



포스터 속에 들어 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 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닐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버린 집통만
비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 볼 하늘이 없다.
마셔 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 보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 낸 포스터
수 많은 복사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 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 신동집 시 ‘포스터 속의 비둘기‘





** 신동집:1924년 3월 5일, 시인.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1948년 <대낮>이라는 시집으로 문단에 나왔고, 1954년 <서정의 유형>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아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2년에는 계명대학교 외국어대학 학장을 지냈다. 작품집으로는 <사랑에 눈뜬 자여>·<염열에 끓는 돌이여>·<추일별곡> 등이 있다

정서가 풍부한 지성미가 살아있으며,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세련된 정서에 의해 순수성보다는 존재론적 철학이 강한 시인이었다. 독특한 구술체 어법을 시 작품에 도입하는 등 표현 기교에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며, `모순의 물`(1963년), `빈 콜라병`(1968년), `송신`(1973년), `귀환자`(1988년) 등의 시집을 발간했고,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중후한 시의 경지를 보여줬다.

회고록 `예술가의 삶`(1993년)에서 “진정한 시인이라면, 비록 그의 시가 점점 너절해지고 마침내 자기의 무참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여전히 노래할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비참을 노래로 퉁겨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말년의 신동집은 달관(達觀)과 유현(幽玄)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며 독보적인 시 세계를 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