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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동화와 시’ - 안도현 시.

하늘 높이,, 날고 반짝인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안도현 시‘우리가 눈발이라면‘




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에 쓸리우며
우리 연을 띄우자.
아직은 설푸른 슬기로
웃음 함께 모두어
뉘우침이 자욱한 새벽 끝에 서면
참 눈살 시린 하늘이
겨울에도 가슴으로 고여들고
예감은 밤나무 얼레로
풀려 가는데
훠어이 훠이
밀물처럼 밀려 오르는데
한결같이 바람 소리 높은 곳
저 아름다운 꽃잎 흩날리는 햇살은
누구에게 보내는 영원의 노래인가.
四季가 피었다 이우는
왼쪽 하늘에는
방패연
조개연
오색치마연
아득히 어디로 날리우는 것일까.
바람빛 연한 사랑을 채워둔 韓紙에
항시 곧고 가는 낱말이
떨림으로 자라는 댓살에
수만의 땅을 물고 가는
건강한 바람의 어깨를 보았으리.
九天을 돌아온 연줄의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意志를 보았으리.
훠어이 훠이
언덕받이에선 휘파람 소리
서둘지 않고 우리들의 새벽은
귀를 여는가.


- 안도현 시 ‘연(鳶)‘
  * <학원>(1978)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안도현 시 ‘연탄 한 장‘모두
  *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서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안도현 시 ‘사랑’
  * <그리운 여우>(1997)




호미 한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날을 세우고

서너평을 나는 농사라고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를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를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금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했다 는 것은 오래 기억해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 안도현 시 ‘호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 2020.




평생 사내 등짝 하나 뒤집지 못 한 여자가 마당 돌덩이 화덕에 솥뚜껑을 뒤집어놓는 날, 잔칫날이었지 불을 지피면 바삭바삭 엎드려 울던 잘 마른 콩깍지

속구배이 어구신 배추는 칼등으로 툭툭 쳐 숨을 죽여야 된다 호통치는 소리, 배차적을 부쳤지 가련한 속을 모르는 참 가련한 생을 가지런하게 뒤집었지 돼지기름 끓는 솥뚜껑 위에

  배추전이 아니라 배차적,
  달사무리하고 얄시리한 슬픔 같은 거

  산등성이로 전쟁이 지나가는 동안 아랫도리 화끈거리던 밤은 돌아오지 않았고 멀건 밀가루 반죽이 많이 들어가면 성화를 내던 들판들,
무른 길들을 죽죽 찢어 먹던 산맥들, 고욤나무 곁가지 같던 손가락들

  이마의 땀방울을 받아먹던 사그라지는 검불의 눈이 그래도 곱던 시절이 있었니더 아지매는 아니껴?

제삿날에는 퉁퉁 부은 눈덩이로 썰어 먹던 배차적, 여자는 무꾸국처럼 하얘졌지

울진 영덕 봉화 영양 청송 영주 안동 예천 의성 문경 상주 가가호호 배차적 냄새가 송충이처럼 스멀스멀 콧등을 기어갔지


- 안도현 시 ‘배차적‘모두
* [능소화사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 2020.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 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으렵니다


- 안도현 시 ‘花巖寺, 내 사랑‘모두
* 시집 『그리운 여우』(창비, 1997)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퍼서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었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 안도현 시 ‘그릇’모두
  * <시인동네> 5월호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 안도현 시 ‘무식한 놈‘
- 『그리운 여우』(창비, 1997)




양말 한 켤레를 발아
빨랫줄에 널었다 양명한 날이다
빨랫줄은 두말없이 양말을 반으로 접었다
쪽쪽 빨아 먹어도 좋을 것을
허기진 바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려
양말 끝으로 똑똑 듣는 젖을 받아먹었다
양말 속 젖은 허공 한 켤레가
발름발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던 구름이
양말 속에 발목을 집어넣어보겠다고 했다
구름이 무슨 발목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원래 양말은 구름이 신던 것이라 했다
아아, 그동안 구름의 양말이나 빌려 신고 다니던 나는
차마 허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 안도현 시 ‘露宿(노숙)’모두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안도현 시 ‘가을엽서‘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햇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 안도현 시 ‘재테크’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 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안도현 시 '바닷가 우체국' 모두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釘)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 안도현 시 ‘益山古都里石佛立像(익산고도리석불입상)‘ 모두




젖은 길과 마른 지붕,
우는 말과 울지 않는 바퀴,
쓰러지는 나무와 일어서는 눈보라,
취하는 술과 취하지 않는 비탈,
납작한 빵과 두꺼운 가난,
아픈 동생과 아프지 않는 약,
가까운 하느님과 먼 총소리,
있는 군인과 없는 국경, 없는 아버지


산 너머
아버지를 넘어, 가는 소년

- 안도현 시 ‘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안도현 시 ‘봄날은 간다’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출간된 지 몇해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이 죽은 뒤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꽂혀 살아 있다
나는 그 시인의 고독한 애독자를 안다
본문은 펼쳐 읽지 못하고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날마다 시집 귀퉁이만 밟아보다가 돌아서던 그를 안다
햇볕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을 안다.

- 안도현 시 ‘오래된 발자국‘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나는 능선을 타고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 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는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안도련 시 ‘독거(獨居)‘




아,고 잡것들이 말이여,불도 한 점 없는 거 뭣이냐 깜깜한 묏동가에서 둘이서 불이 붙어가지고는  누가 왔는지, 누가 지나가는지, 누가 쳐다보는지 모르고 말이여, 여치는 싸랑싸랑 울어대쌓는디 내가 어떻게나 놀라부럿는가 첨에는 참말로 귀신들이 아닌가 싶어 대가리 털이 바짝 서두만 가만히 본께 두년놈들이 깨를 홀라당 벗고는 메뚜기같이 찰싹 붙어가지고는 일을 벌이는디, 하이고매 숨이 그만 탁 막혀 나는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겠고 그런다고 좋은 구경 놔두고 꽁무니 빼기도 그렇고 마른침을 꼴딱 삼켜가면서 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디 글쎄, 풀들이 난데없이 야밤에 짓뭉개져가지고는 푸르딩딩 멍든 자죽처럼 짓뭉개져가지고는 야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바로 고것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나 참 별 생각도 다해봤는디 말이여,그때 말이여 반딧불하나가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싸가지 없이 나를 빤히 보고있었던 거 아니겄어, 한마디로 챙피해두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가 다 봤을거 아녀, 처음부터끝 까지 저도 다 보고있었으면서 말이여, 하이고매.

- 안도현 ‘뜨거운 밤’
*시집, 바닷가 우체국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 안도현 사 ‘바람이 부는 까닭‘
* 그리운 여우




시외버스를 타면 길가에
가끔, 오래 된 정미소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나는 그곳을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싶어지네

생산의 고향이여,
모든 부의 관리자여,
그리하여 눈부신 빚더미여,
붉은 양철 지붕을 뒤집어쓰고
한마리 덩치 큰 짐승처럼 서 있는 정미소를
나는 찬미하고 싶어지네

그러나 내가 탄 시외버스마저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가려 하는
나이 많은 정미소

들녘의 모든 길들,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
멍석만한 크기로 날아오던 참새떼와
앞마당에 넘치던 나락 냄새, 말들의 울음소리
청춘의 팔뚝의 꿈틀거리는 힘줄의 물줄기를
내가 노래하려는 것은 아니라네

정미소는, 숨가쁘게 달려왔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늙은 혁명가

지금 그에게는 속도가 없네
개들이 똥을 누고 가는 뒤안에서부터
개들의 똥을 누고 가는 뒤안에서부터
개들의 잠자리가 있는 마을까지가
마지막 그의 관할구역이라네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 시 ‘정미소가 있는 풍경‘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 안도현 시 ‘빗소리 듣는 동안‘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고속도로,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리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교 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 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지


- 안도현 시 ‘모퉁이’




칼을 간다
더 이상 미련은 없으리
예리하게 더욱 예리하게
이제 그만 놓아주마
이제 그만 놓여나련다
칼이 빛난다
우리 그림자조차 무심하자
차갑게 소름보다 차갑게
밤마다 절망해도
아침마다 되살아나는 희망
단호하게 한치의 오차 없이
내. 려. 친. 다.
아뿔사
그리움이란 놈,
몸뚱이 잘라 번식함을 나는 몰랐다


- 안도현 시 ‘그리움 죽이기‘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는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 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 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 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그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

- 안도현 시 ‘모항 가는 길‘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입구에 서면 나는 빈 의자들하고 흥정을 하고 싶어진다 나를 다시 낳아줄래요?

맨 처음 나를 낳은 것은 어머니였지만 아랫도리를 내리고 나를 두번째 낳은 것은 여인숙이다, 그날밤의 나를 어머니, 다시 깨끗하게 낳아줘요, 매달리고 싶게 만든 것도 여인숙이다

가끔 나는 숙박계에 이 세상에 없는 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벽에 구름의 바지를 걸어놓고 잠든 적 있다 그런 어느날 번갯불이 유리창에 금을 그으며 지나가고 백열전구는 밤새 깜박거리며 어둠의 알을 낳았다

골목은 훌쩍 커버렸다 골목이 밖에 나가 놀다 오면 지금도 젖을 꺼내 물린다는 늙은 여인숙, 그녀가 골목의 어머니였다

세상의 모든 여인숙 간판의 불을 끄지 말자 비어 있는 방이 있다는 거다 몇겹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누군가 허벅지 비비는 밤을 보내고 있다는 거다 나이 든 어머니에게 애인을 붙여주자


- 안도현 시 ‘세상의 모든 여인숙‘
*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반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 안도현 시 ‘건진국수‘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 안도현 시 ‘고래를 기다리며‘
* 제13회 소월시문학상.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
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
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 입 고이던 밤.

- 안도현 시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



  3월도 스무 닷새나 눈곱을 떼어냈는데
참말로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도톰하게 입술 내밀고 있는 목련 꽃망울들한테
도대체 뜬금없이 달려들어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꽃망울 속에 들어 있는 꽃들이
제 귓볼을 만지며 앗 뜨거워,뜨거워하며
난감해하는 모양 보자는 것 아닙니까?

자글자글 햇빛이 끓는 봄의 냄비 뚜껑을
좀 열어보려다가
이거 신세 조지게 생겼습니다.


- 안도현 시 ‘3월에 내리는 눈‘
<2002.제47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금강 하구를 가로지른
거대한 배수갑문, 그 한쪽에
강물을 조금씩 흘려 보내는 조붓한 물길이 있다
어도라고 하는데,
영락없이 강물의 탯줄이다
강으로 오르고 싶은 물고기는 오르게 하고
바다로 내려가고 싶은 물고기는 내려가게 한다
5월, 내려가는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거슬러오르고자 하는 것들이 거기 가득했다
더 높은 곳에서 봤더라면
버드나무 잎을 따다
몽땅 뿌려놓은 것 같으리라
숭어떼였다!
바다를 뚫고 억센 그물을 찢을 때 생긴
상처투성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하나같이 무엇이 간절한
눈부신 숭어떼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대가리를 강물 쪽으로 대고
오로지 거슬러오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날개를 찰싹 접고 꼿꼿이 서서
꼼짝도 않고 숭어떼를 노려보는
잿빛 새 한마리
그 긴 부리의 간절함은
또 무엇이었던가!

- 안도현 ‘간절함에 대하여‘



지금 이 땅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지아비가 되고
한 사람의 지어미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노예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두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일입니다
키 큰 저 신랑의 숨결이 자꾸 거칠어지고
이쁜 저 신부의 얼굴이 홍옥처럼 붉어지는 것은
서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쓸쓸하던 분단의 날들을 깨부수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선언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기어코 결혼이라는 것은
해방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를 함께 타는 일입니다

신랑이여 신부여
이제 그대들이 맨 처음으로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첫 아기의 눈부신 울음소리를
이 세상에 들려주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통일의 전사로
그 사랑스런 아기를 키우는 일입니다
신랑이여 신부여
그대들은 오늘부터 비로소
조국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 안도현 ‘지금 이 땅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그대에게 가고 싶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
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
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
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
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 시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더 우스꽝 스런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왔던 거야
생각해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 고 생각해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주었을 거야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 안도현 시 ‘낭만주의‘
* 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 안도현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 안도현 시 ‘꽃’
*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시집 / 문학동네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탁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 안도현 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안도현(1961-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전교조 가입한 이유로 해직되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었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었다. 1996년 제1회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2002년 제1회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등의 시집과 <연어>(1996), <관계>(1998), <짜장면>(2000), <증기기관차 미카>(2001) 등 어른들을 위한 동화, 그리고 산문집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1998), <사람>(2002) 등이 있다.


* 고교 재학 시절인 1978년 <학원> 문학상의 당선작이었다. 당시 이 문학상을 심사하였던 두 시인인 김현과 황동규의 심사평은 이러했다. “다소간 관념서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만 적극적인 사랑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그 사랑은 무엇보다 힘찬, 그러면서도 절제된 리듬 속에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확산되는 사랑이다. '항시 곧고 가는 낱말이 / 떨림으로 자라는 댓살에 / 수만의 땅을 물고 가는 / 건강한 바람의 어깨를 보았으리.' 같은 구절은 바람을 독수리 같은 새로 비유하는 메타포어가 되었다가 다시 연을 독수리처럼 자유스러워지는 상태로 이끄는 메타포어의 메타포어로 바뀌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투고한 세 편 가운데는 '농악대'가 더 짜임새를 가지고 있으나 선배 몇몇 시인의 냄새를 너무 지니고 있어서 '연(鳶)'을 택하기로 했다. 앞으로 한국의 좋은 시인 하나를 가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