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 쓸쓸한 영혼

생활속의 나 / 박목월 시

아이들이 ‘희망’이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시 ‘가정‘모두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시 ‘나그네’모두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박목월 시 ‘산도화’모두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운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시 ‘윤사월’모두
* 윤사월: 음력 4월과 5월 사이에 여분으로 붙은 또 하나의 4월이다. 음력 360일 과 양력 365 일의 차이를 극복하기 뤼해 끼워넣은 윤달의 하나.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면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라카노 뭐라카노 뭐라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면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러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박목월 시 ‘이별가’ 모두



머언 산 굽이굽이 돌아갔기에
산 굽이마다 굽이마다
절로 슬픔이 일어˙˙˙˙˙˙

보일 듯 말듯 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날 같다


- 박목월 시 ‘그리움’모두
[청록집],열린책들, 2022.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시 ‘청노루’모두




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 박목월 시 ‘하관(下棺)‘모두




어딜 가나,
나는 元曉路行원효로행 버스를 기다린다.
어디서나 나는
元曉路行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릴케의 詩句시구를 빌리면,
깊은 밤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누리 안에서
孤獨고독한 空間공간으로
혼자 떨어져가는
그 땅덩이에서
나는
糊口策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거리를 서성거렸고
때로는
사람을 訪問방문하고
외로운 친구와 더불어
盞잔을 나누고 밤이 되면
어디서나 나는
元曉路行 버스를 기다린다.

이 갸륵하고 측은한 回歸心.
元曉路에는
終點종점 가까이
家族가족이 있다.
서로 등을 붙이고
하룻밤을 지내는 측은한 和睦화목들.
어둑한 버스 안에서
나는 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릴케의 詩句를 빌리면,
이처럼 떨어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받아 주시는
끝없는 부드러운 그 손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 박녹월 시 ‘回歸心(회구심)‘모두
* [詩와 佛敎의 만남〃3],東國譯經院동국역경원,1989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예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 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

어린 것을 내가 키우나.
하나님께서 키워 주시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 위에 찬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으로
인간은 얽매여 살아왔던다.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올께.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이여. 당신 앞에
육신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 박녹월 시 ‘밥상 앞에서‘모두
[크고 부드러운 손],민예원, 2003.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윗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 가는
쓸쓸한 식욕.


- 박목월 시 ‘적막한 식욕‘모두
[박목월 시전집], 서문당, 1984.




오냐, 오냐, 오냐.
어머니의 목소리로
얼음 밑에서도 살아나는
미나리.
오냐, 오냐, 오냐.
어머니의 목소리로
환하게 동이 트는
새날의 새벽.
믿음과 긍정의
누리 안에서
훈훈하게 열리는
남쪽의 꽃봉오리.
오냐, 오냐, 오냐.
어머니의 목소리로
사방에서 들리는 사랑의 응답
오냐, 오냐, 오냐.
어머니의 목소리로
우리는 흐뭇하게
멱을 감으며
오냐, 오냐, 오냐.
어머니의 목소리로
東(동)에서 西(서)까지
먼 길을 가며…


- 박목월 시 ‘신춘음(新春吟)‘모두



아즈바님
잔 드이소
환갑이 낼모랜데
남여가 어디 있고
上下가 어딨기요.
분별없이 살아도
허물될 게 없심더.
냇사 치마를 둘렀지만
아즈바님께
술 한 잔 못 권할 게
뭔기요.
북망산 휘오휘오 가고 보면
그것도 恨이구머
아즈바님
내 술 한 잔 드이소.

보게 자네,
내 말 들어 보랭이.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고
내외(內外)도
이부자리 안에 內外지.
야무지게 산들
뾰죽할 거 없고
덤덤하게 살아도
밑질 거 없데이.

주머니 든든하면

술 한 잔 받아 주고

돈 있으면
니 한 잔 또 사 주고
너요 내요 그럴 게 뭐꼬.
거믈거믈 西山에 해 지면
자넨들
지고 갈래. 안고 갈래.

시절은 절로
복사꽃도 피고
시절이 좋으면
풍년도 들고
이 사람아 안 그런가.
해 저무는 산을 보면
괜히
눈물 글썽거려지고
오래 살다 보면
살 맛도 덤덤하고
다 그런기라.


- 박목월 시 ‘한탄조’모두



水質 좋은 경상도에,

연한 푸성귀

나와

나의 형제와

마디 고운 수너리斑竹.

사람 사는 세상에

完全樂土야 있으랴마는

木器 같은 사투리에

푸짐한 시루떡.

처녀얘.

처녀얘.

통하는 처녀얘.

니 마음의 잔물결과

햇살싸라기.


- 박목월 시 ‘푸성귀’모두



친구들이 서가에 나란하다.
외로운 서재
등불 앞에서
나와 속삭이려고 이런 밤을 기다렸나보다.
반쯤 비에 젖은
그들의 영혼......
나도 외롭다.
한권을 뽑아들면
커피점에서 만난 그분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눈짓.
외로울 때는 누구나 정다워지나보다.
따뜻한 영혼의 미소.
때로 말씨가 서투른 구절도 있군.
그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겉치레
벗기고 보면
아아 놀라운 그분의 하늘
-가만히
나는 책을 덮는다.(얘기에 싫증이 나서가 아닐세)
돌아앉아
그분의 말을 생각해 보려고 그래.
과연 인생은 이처럼 서러운가, 하고.
때로는 긴 밤을 생각에 잠겨 밝히면
새벽 찬 기운에
서가는 아아한 산맥
친구는 없고......
골짜기에 만년설 눈부신 영하.


- 박목월 시 ‘서가‘모두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로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 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 옷만 입을 까부냐
다만 두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


- 박목월 시 ‘모일‘모두



팔을 저으며
당신은 거리를
걸어가리라
먼사람아

팔을 저으며
나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 적막. 그안도.
먼사람아

먼 사람아
네 팔에 어려오는
그 서운한 반원

내 팔에 어려오는
슬픈 운명의
그 보라빛 무지개처럼.......

무지개처럼
나는 팔이
소실된다

손을 들어
당신을
부르리라
먼 사람아

당신을
부르는
내 손끝에
일월의 순조로운 순환
아아
연한 채찍처럼
채찍이 운다
먼 사람아


- 박목월 시 ‘먼 사람에게‘모두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 보다는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이 마르는
황토흙 타는 냄새가 난다.


- 박목월 시 ‘사투리’모두




**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靑鹿集)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다.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한국적인 서정과 극히 간결하고도 리듬감있는 시어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유명한 시로는 하관(下棺), '내 신발은 십구문 반'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가정> 등이 있다. 군가인 <전우>, 포스코 사가, 한국일보 사가, MBC 사가, 신정고등학교의 교가 등의 작사도 남겼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호인이었다고 한다. 다정다감하고 목소리는 약간 가냘픈 듯하며, 조용조용한 성품에 원고 청탁을 거절해본 적이 없고, 모든 원고는 꼬박꼬박 본인이 직접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1978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집으로 가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5번지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8시에 결국 63세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적은 그의 시는 일제 말기의 한국인의 정신적 동질성을 공감하여 통합하려는 태도를 보였는데 시인 스스로 자연과 교감하며 현실에서 안주 할 곳을 잃은 상실감을 표현했다, 그의 중기시는 생활에 대한 묘사와 후기에는 그에게 큰 영향를 준 어머니의 신앙을 공감하며 시로 노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