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 쓸쓸한 영혼

‘날아오른 새’ / 박남수 시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시 ‘새’모두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 박남수 시 ‘아침 이미지’모두



무덤을 파고
너는 관 속에 누워 있다.
둘레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통하며 관 위에
꽃을 던진다. 흙도
뿌린다.
눈썹에 가리인
눈물을 통하여, 나는
너의 모습을 지우고 있다.
맑은 눈으로는
볼 수가 없어서
눈물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었다.
누구의 만남도, 결국은
이렇게 갈리기 위하여 있었겟지만,
눈물의 투명을 통하여
자꾸 흔들어 지우면서, 우리는
어처구니 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다.
흙을 덮고 나면 그뿐, 저 넓은
품에서 너를
다시 찾기는 어려우리라.
안녕. 안녕.


- 박남수 시 ‘하관’모두



구름 흘러가면
뒤에 남는 것이 없어 좋다.
짓고 허물고, 결국은
푸른 하늘뿐이어서 좋다.

한 행의 시구
읽고 나면 부담이 없어서 좋다.
쓰고 지우고, 결국은
흰 여백뿐이어서 좋다.

평범한 사람
남기는 유산이 없어서 좋다.
벌고 쓰고, 결국은
돌아가 흙뿐이어서 좋다.


- 박남수 시 ‘小曲(소곡)‘모두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미래사, 1991.




音樂(음악)

  내가 아지랑이 속에 있소. 어쩌면 요지경으로 조용한 들녘입니까. 말하자면 음악과 같은 것이지요. 복사나무는 복사나무의 작업을 하고, 배나무는 배나무의 작업을 하고...... 가시내사 가시내의 구실을 시키시구려. 푸른 열매를 먹으면 좀 조용도 해지리다.


無題(무제) 1

  그저 한 귀가 모자라는 나날을 살다가 보면, ......푸면 다시 고이는 우물물처럼 충만한 게 부러워지오. 두레박으로 푸시지만 마시고, 가다가 하늘과 맞보는 충일로도 두어주십시오, 제가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오늘은 참말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無題(무제) 2

  종달새는 어디까지 오르려나. 꺼질 듯 꺼질 듯 하늘로 點(점)져가는 종달새는 하늘 그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보오. 나도 잠시면 지구를 좀 떠나보고 싶소. 어쩌면 성층권쯤에서 家鄕(가향)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오.


祈禱(기도)

  뺨이야 부빌 수 있습니다. 부둥켜안기사 더욱 쉽습니다. 그저 당신이 하듯이 사랑할 수가 도무지 없습니다. 내 가슴에 파묻혀 귀기울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키는 일만도 여간이 아닙니다.
  -이런 이제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만이라도 해주십시오.


한 모금의... 물

  처녀야 물 한 모금만 다오. (한 바가지의 우물을 주었습니다.) 처녀야 네 웃음도 조금만 다오. (웬지 복사꽃의 그 부끄러움을......)
  - 모두 그렇고 그렇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박남수 시 ’閑題(한제) 五話(오화)‘모두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미래사, 1991.




1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멀리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에는
가까이가 보이지 않아서, 한평생을
나는 안경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살아왔다.

구부러진 유리알을 통하여
세상의 애환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그렇게 슬프고 기뻤는지는 알 수가 없다.

2
한 사람의 기쁨이, 어쩌면
한 사람의 슬픔이 되는 잔혹을, 나는
어느 한쪽에서만 보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한 사람의 슬픔이, 그 실은
한 사람의 기쁨이 되는 비정을, 나는
어느 한 면에서만 보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3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에는
현실이 보이지 않아서, 한평생을
나는 안경을 벗지 못하고 살아왔나보다.

구부러진 유리알을 통하여
세상의 애환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그렇게 밝고 어두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4
안경이 너무 밝아서, 어쩌면
세상의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어느 한 면만 쉽게 즐겼는지도 모른다.

안경이 너무 어두워서, 어쩌면
세상의 눈부신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어느 한 가지만 자꾸 슬퍼했는지도 모른다.

5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는
유리의 척도에 맞춰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세상인 줄 알면서 살아왔나보다.

그 잣대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도, 그것은
구부러진 유리알, 그것이
아무리 어설픈 눈이라 해도, 내 눈으로
내 세상을 보면서, 내 발로
스스로 걸어가서 확인하면서, 나머지
세상은 슬기롭게 살 일이다.


- 박남수 시 ‘안경(眼鏡)‘모두
[어딘지도 모르는 숲의 기억], 미래사, 1991



팬티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 박남수 시 ‘훈련’모두



물상(物象)이 떨어지는 순간,
휘뚝, 손은 기울며
허공에서 기댈 데가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소유하고
또 놓쳐 왔을까.

잠깐씩 가져 보는
허무의 체적(體積).

그래서 손은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면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원(祈願) 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빈 것만 되풀어 왔을까.

손이
이윽고 확신한 것은,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 박남수 시 ‘손’모두



* 시인은 시를 쓰며 이미를 형상화 하고 존재하는 탐색과정을 형상화 한다. 그는 현대시에서 일부가 서구적인 표현과 감정에 몰입하는 듯 하면, 꾸준히 대담이나 산문을 통하여 동양사상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피력 하였다. 그의 시는 단순히 고요하고 투명한 서정시로 비치기도 하지만, 대상의 고요와 투명함 속에는 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촬과 유머, 세상 만물에 대한 깊은 사색과 관심이 녹아 있다.

그의 시에는 ‘새’가 단골 소재로 많이 등장하여 ‘새의 시인‘이라 호칭 하기도 한다. 그의 시 세계 속에 나오는 공중에는 숱한 새가 갖가지 날갯짓으로 날고 있다. 그가 그려낸 풍경은 비 갠 오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밝은 세상처럼 선명하다. 그의 ‘새’는 순수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 순수는 쉽게 얻어지는 순수가 아니다. 여기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고 ‘절규’가 배어 있다. 간결하고 감각적인 언어 속에 숨겨지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그의 시는 관념의 모형에서 벗어나 시적 긴장을 유지한 채 살아 있는 시가 된다.


그의 ‘새’는 지금도 끊임없이,, 날아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