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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해바라기. 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더보기
슬펐던 어린시절 기억 - ‘개망초꽃’ 죽은 아기를 업고 전철을 타고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한 마리 들짐승이 되어 갈 곳 없이 논둑마다 쏘다니며 마른 풀을 뜯어모아 죽은 아기 위에 불을 놓았다 겨울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붉은 산에 해는 걸려 넘어가지 않고 멀리서 동네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떠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왜 무우시래기국 같은 아버지에게 총을 쏘았을까 혁명이란 강이나 풀, 봄눈 내리는 들판 같은 것이었을까 죽은 아기 위에 타오르는 마른 풀을 바라보며 내 가랭이처럼 벗고 드러누운 들길을 걸었다 전철이 지나간 자리에 피다 만 개망초꽃 - 정 호승 시 ’개망초꽃‘모두 헌정 [안정옥] 새벽 산책길 잠자는 것들을 뒤로 두며 걷는다 이미 들꽃들은 깨어 있다 새들도 막 날개짓 멈춰 새들이 먹이에만 급급하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어쩌면 틀린 생각.. 더보기
봄에 핀 Rainbow - 찔레 꽃* 찔레꽃 필 때 [박노식] 뭐든 오래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일지 길가의 흰 찔레꽃, 너는 너무 수줍어 보여서 나를 병들게 한다 옆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목소리를 문밖에 나가 조용히 듣는 것처럼 나에게도 비밀이 있었으면 바랄 때 네가 눈에 띄었다 어떤 아쉬움이 잔뜩 남아 있는 얼굴로 정말 서운한 표정으로 영아, 고백컨대 그날 그 저녁나절에 네 앞에서 나의 마음이 그랬다 -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2022 몸 시 [이정모] 세상에 자기 몸에 시 쓰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햇살과 비와 천둥의 긴 진술을 짧은 문장으로 음각하는 바위와 이별을 준비하라는 하늘의 소리에는 아직 놓지 못한 시간이 부끄러운 붉새와 하염없는 침묵을 차갑게 얼리어 그리운 이름인 양 부수어 뿌리는 눈송이 그리고 하고픈 말들이 너무 많아 우.. 더보기
*화양연화(花樣年華).., 덧 붙여. 화양연화 2 이미산 그 여름, 그 가로등, 내가 불빛 아래 서성일 때 너는 어둠 쪽에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간 만큼 꼭 그만큼 너는 물러났다 그러니까, 전등갓 속의 불빛이 바닥 쪽으로 곤두박질치는 거리와 그 빛에 의해 드리워진 공간, 우리의 허락된 영토는 꼭 그만큼이었을까 빛과 어둠, 경계는 완강했다 한 걸음만 내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마주선 그림자 적시며 더듬이를 키웠다 새벽이면 지워질 관계로 기꺼이 한 방향을 보았다 무엇을 보았을까 어둠을 삼킬수록 더듬이는 환하다 그가 들숨을 쉬면 나는 그의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그의 모퉁이에 서있는 내 그림자를 만난다, 다시 나의 들숨에 차곡차곡 그가 새겨지고 먼 거리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우리의 그림자 꽃들 끝끝내 살아남을 슬픔을 위해 우리는 일부러 소나기.. 더보기
Mosaic - 쟈끄 프로베르. 그대 방금 꺽은 꽃을 안고 거기서 무얼 하는가 어린 소녀여 그대 시든 꽃을 안고 거기서 무얼 하는가 젊은 처녀여 그대 말라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는가 멋진 부인이여 그대 죽어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는가 늙은 여인이여 승리자를 기다리지요. -'꽃다발'모두 ---------------------------------------------- 누군가 열어놓은 문 누군가 닫아버린 문 누군가 앉았던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물어버린 과일 누군가 읽고 난 편지 누군가 넘어뜨려 놓은 의자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아직도 달리는 길 누군가 헤쳐 나가는 수풀 누구나 몸을 던지는 강 누군가 죽은 병원 -'메시지'모두 -------------------------------------------.. 더보기
반성.(2022) 깊이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품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 채워 흘러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코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었던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더보기
화양연화(花樣年華) / 발칙한 상상?! 치마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팬티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 더보기
El Condor Pasa..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장석남] 점등시간 77번 좌석버스를 탔다 나는 페루에 가는 것이다 시드는 화환처럼 해가 진다 바람은 저녁 내내 창 유리의 흰 페인트를 벗겨내고 있다 이른 산책의 별이 하나 비닐 봉지처럼 떴다 허공에 걸려 있는 푸른 풍금 소리들 나를 미행하는 이 깡마른 적막도 끝내 페루까지 동행하리라 철망 위에 앉아 우는 새 새의 울음속에 등불이 하나 내어 걸린다 페루의 유일한 저녁 불빛 밤새 파도들은 불빛으로 낮게 포복해 몰려와 몸을 씻고 있다 불빛을 따라간 한 목숨을 씻어주고 있다 나는 내내 페루에 가고 있는 것이다 새들의 페루 [신용목]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의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