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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봄에 핀 Rainbow - 찔레 꽃*

꽃잎이 흐른다.





찔레꽃 필 때 [박노식]



뭐든 오래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일지
길가의
흰 찔레꽃,
너는 너무 수줍어 보여서 나를 병들게 한다
옆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목소리를 문밖에 나가 조용히 듣는 것처럼
나에게도 비밀이 있었으면 바랄 때
네가 눈에 띄었다
어떤 아쉬움이 잔뜩 남아 있는 얼굴로
정말 서운한 표정으로
영아,
고백컨대
그날 그 저녁나절에 네 앞에서
나의 마음이 그랬다

         -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2022




몸 시 [이정모]



세상에 자기 몸에 시 쓰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햇살과 비와 천둥의 긴 진술을
짧은 문장으로 음각하는 바위와

이별을 준비하라는 하늘의 소리에는
아직 놓지 못한 시간이 부끄러운 붉새와

하염없는 침묵을 차갑게 얼리어
그리운 이름인 양 부수어 뿌리는 눈송이

그리고
하고픈 말들이 너무 많아
우수수
바람결에 날려 보내는 나뭇잎의 전율들

이 모든 것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詩는
어머니, 당신이 웃으며 서있는 하얀 찔레꽃,
그 언덕이 내게로 와 지친 몸에 쓰는 시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내 그리움 아득하여
고향의 자운영 꽃밭 위를 지나는 바람이 됩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묶어
행간의 숨은 뜻을 알 필요도 없는 몸 시집을 만들고

찔레꽃 향기가 깊숙이 몸속을 찔러오도록
그냥 두고 봅니다

마음은 제 몸에 세월을 새기지 않는 신비한 시입니다

   - 허공의 신발, 천년의시작, 2018




내 생의 봄날 [엄원태]


  아침에 눈뜰 때마다, 또 하루 '살아 있다'는 감동이 파도 처럼 밀려오곤 한다. 사무치도록, 각별하고 아름다운 봄날 이어서......

   남들은 건강해지려고 걷는다는 산책길, 김은영(34)은 '살려고' 매일 두 차례씩 걷는다. 찔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영은 씨, 말없이 시든 꽃잎 한 잎 한 잎 떼어내기 시작한다. 꽃잎들, 그녀 허물어진 가슴에 눈물처럼 뚝, 뚝, 떨어진다.

   하얀 꽃 순박한,  
   별처럼 슬픈 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낙엽이며 눈을 한결같이 쓸어내는 아버지가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 야채수프를 끓어주는 남편 전붕식(36)이 있다.

무엇보다도, 찔레꽃 봄날, 목숨 걸고 낳은 딸 시영이(1)가 있다.

*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 변용.

               -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창비, 2013




사랑하는 서쪽 [김효선]


지문을 찍고 나면
한쪽 심장을 내준 것 같아
지문 인식기를 통과할 때마다
누군가 대신 거기 서 있다

운명의 절반을 껴안아 무너져 버린 부위

먼발치에 서서 무른 사과를 먹는 사자처럼
나무 위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독사처럼
서쪽에서 태어난 몽고반점은
간절하다가도 독기가 차올라 숨이 멎는다

굴러갔는데 굴러오지 않는 대답
구름도 숨어 버린 하늘에
누가 엎드려 울다 간 흔적일까
강물에 두 손을 모으고 오래 물을 흘려보냈다

무엇으로 서쪽을 닦아 내 지문을 지울 것인가

가만히

찔레꽃이 핀다 슬개골이 아프다

             - 어느 악기의 고백, 시인수첩, 2020




봄밤 [김성희]




찔레꽃 향기에 청춘은 부풀어 올라도
잔가시는 아픈 현실의 바닥으로 박히고

험한 줄 알면서 또 내딛는 걸음의 폐허는
무릎 아래의 어린 것들이 있어
어머니의 궁전은 멀고 가파른 울음의 고개 너머에 있죠

단 하루도 내 날 같은 날이 없었다던 슬픈 일생
단 열흘이라도 다정한 사내와 살아봤으면 하던
수위 높은 넋두리를 혼자 쏟아낼 때
나는 왜 그렇게 이해가 빨랐던 것일까요

일부종사, 삼종지도는 시대의 덫도 강요도 아닌
죽어도 이 집 귀신이 되겠다던 당신의 희생은
당신 나이가 되고 보니 그게 선택이었음을 알았죠
엄마, 다른 생의 다른 봄에는 어머니로 꽃 피지마세요

                 - 나는 자주 위험했다, 미네르바, 2020




꽃을 그냥 보냈다 [정진혁]




꽃 저문 자리가 어두웠다
안이 잠기고 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끼니처럼 왔다 갔다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당신이 빠져나가고

벚꽃이 지는 일이
손금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누군가의 손을 놓으며 서로를 건너는 일이고
아프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속사정이고
서로가 서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찔레꽃 떨어지는 일에 한 시절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당신이라는 이름 하나가 희미해지는 줄도 모르고

꽃잎 하나 떨어지는 일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고
당신의 바랜 뒷모습을 쳐다보는 일인지도 모르고
목련꽃 한 잎이 지는 일에 봄빛이 흐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생김새를 열어 보고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일이
분홍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모르고

          -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찔레꽃 [박상천]


아파트 창문으로 넝쿨을 뻗어 올라온
하얀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심어놓은 것이지요.
하얀 찔레꽃이 좋다며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심어놓은
그 꽃이 피었네요.

작년에도 피었을 테고
재작년에도 피었을 텐데
그런데 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른 꽃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떠난 후
꽃이 피어도 내겐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당신 떠난 지 3년,
벌써 이렇게 안정이 되어가는 건가요?
그래서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한 올봄엔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내 마음에 정좌한 당신을 보듯
흰 꽃잎 속 한가운데 들어앉은
노란 곷술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 계간<시인수첩>,2016년. 여름호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뜻은 [신석정]



우리 모두들
고이 지녀온
마음을 잃은 지 오래로다.

한때
대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밀화부리 노래와 이웃하던
그 조촐한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찔레꽃 짙은  향기에 젖어
오월 하늘을 비상하던
아아 거울같이 맑은
그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아무리
검은 손이 우리 눈을 가리고
우리 마음을 가릴지언정
차마 어둠을 이웃할 수 는 없거늘

오늘은
저문 강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그 안쓰러운 우리 마음을 찾아
어서 출발을 서두를 때로다.

하여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잃어버린 마음을 그리워하는 까닭이로다.

            -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비, 2007




오월 [임창아]



나는 무럭무럭 푸르기만 해도 될까?

노동자도 왔다 가고 어린이도 왔다 가고 어버이도 왔다 가고 유권자도 왔다 가고 이팝꽃도 왔다 가고 아카시아꽃도 왔다 가고 한 줄로 선 찔레꽃도 느리게 왔다 가고 여전히 자애로우신 부처님도 왔다 가고 복도를 달려 선생님 훈계도 잽싸게 왔다 가고 마지막 생리도 장밋빛으로 왔다 가고 세 살에 죽은 오빠도 어김없이 왔다 갔는데

           - 즐거운 거짓말, 문학세계사, 2017




야외 수업 [장철문]


얘들아, 저 도라지꽃만큼만 당당하자
아침 열시 무렵의
도라지꽃처럼만 꽃대를 세우고
당당하게 꽃봉을 열자
저 가지만큼만
막 꽃을 떨군
자줏빛 가지만큼만 의기양양하자
얘들아, 옮겨 심은 저 파만큼만
밭고랑에 퍼드러져 시르죽은 파만큼만
신열을 앓자
꼭 그만큼만
죽을 것 같은 시간을 위장으로 보내자
얘들아, 저 뱀딸기만큼만
붉은 뱀딸기만큼만 꿈틀거리자
흔들리는 저 개망초꽃만큼만
햇살에 나서자
이 햇살만큼만 어깨를 펴고 쏘다니자
저 찔레덤불만큼만
가시덤불만큼만
설레는 꽃 무더기 흰 무더기를 햇살에 바치자

           - 비유의 바깥, 문학동네, 2016




봄날은 간다 [김용택]


진달래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 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2006




모산도* [이윤학]


찔레꽃이 피었다고 같이 보러 가자고
보챌 사람도 없는데 웃음이 나오는 건
내 마음에 떠 있는 웃음을 흉내 낸 것

왜 부르지 않았냐고
왜 말을 걸지 않았냐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
다들 웃음을 잃고 돌아갔지

뒤가 아름다운 사람을 기억하고 싶었지

* 충청남도 홍성에 있던 섬.

          -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찔레꽃 [조용미]



못이 줄어들었다,
아기가 사라졌다

아시터도 작아졌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저물녘이었다

못 둑길도 짧아졌다,
등불을 밝히고 산속을 뒤졌다

옛집은 허물어진 탑이 되었다,
작은어머니는 사흘 밤낮을 귀신처럼 돌아다녔다

폐허는 혼자 싱싱하다,
아기는 못물을 뺀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진 것들은 시끌벅적 고요하다,
아기는 그 사이 조금 자라 있었다

못은 겨울밤이면 쩡쩡 울었다,
못가의 흰 찔레꽃이 향기를 내뿜었다

찔레꽃이, 옛집과 아기를
데려갔다

            -현대시학, 2013년 3월호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찔레, 북인 2008




아득한 봄날[정진규]


모내기 전 무논 가득
슬어놓은 개구리 알 도룡뇽 알
동그랗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알간 유리창
그 안에 새까아만 외눈동자 하나씩
눈 뜨고 있다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한창이던 찔레꽃 하얗게 눈발 날리고
아득하다
달래간장에 밥 비벼 먹고 나온
심심한 동네 아이들
개구리 알 도룡뇽 알 쪼그려 들여다 보다가
외눈박이다 도깨비 새끼다아
논두렁길 줄지어 내달리는 한낮

              - 껍질, 세계사, 2007




** 찔레꽃은 어린시절 동네의 뚝방이나 개천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이였다. 인적이 드믄 철도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철길 따라서 한무더귀씩 피어있는 찔레꽃의 찔레순을 꺽어서 먹기도 했는데,, 시우 한분이 봄날의 무지개와 같이 다채로운 칼라의 시를 모아 적어 놓았다. 모셔와 적어 놓고 천천히 읽어보니 가객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가 후드러지게 피어난다. 노래가 슬프고도 구성지게 흐른다. 절창이다!



찔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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