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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산수유 나무. 삼월의 속수무책 [심재휘] 초봄날 오전, 내게 오는 볕의 마음은 그 생김이 ㅁ 같기도 하고 ㅇ 같기도 해서 지루한 햇살을 입안에 넣고 미음 이응 우물거려보다가 ㅁ과 ㅇ의 안쪽을 기웃거려보다가 기어이 낮술 몇 잔으로 밑이 터진 사람의 마음을 걸치고 사광에 늘어진 그늘 가까이 이르러서야 빛으로 적막한 삼월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서둘러 활짝 핀 산수유 꽃나무가 제 속을 뱉어 어룽대는 그늘을 먼발치에도 오래 드리우는데 그 노란 꽃그늘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안팎으로 드나드는 ㅁ과 ㅇ이 저런 풍경이라면 누구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본 적 없는 두 발 단 것들은 속수무책이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은어 [함명춘] 햇볕의 길이 서면 온다 바다쪽으로 한쪽 어깨.. 더보기
자작나무 2.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1996)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정끝별] 유난히도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우내 心身蟲에 나무 몸 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더보기
새해,,. 2024년에 덧붙여, 백야 [최재원] 새해가 밝, 발, 밖, 박, 았습니다 눈보다 손이 먼저 부셔요 손보다 찌르르 젖은 마음이 부셔요 너를 입(에 넣)고 굴릴 때 혀가 먼저 부셔요 부셔요 부셔요 시고 부신 너(들) 구름이 해를 찢어 놓습니다 갈래의 해도 하나의 해이니 하얗게 얼어 영원히 젖은 파도만이 꾸역꾸역 다가옵니다 해도 구름도 파도도 쉬지를 않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 참 우리는 집이 없어요 갈래에 무리에 보라에 잠깐 머물까요 우리? 해 해 해는 너무 밝, 밖, 발, 박나요? 나는 그들 그들 그들이라고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잘 모르니까 우리 서로 아는 체는 말아요 아니 우리 누일 데 없는 몸을 해 위로 겹쳐요 차가울수록 두께 없는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어요 사위어 가는 사이의 모든 것들의 트랜스 오늘도 오지 않는 오늘.. 더보기
자작나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박정대]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름 폭풍은 내 마음속에 있었소 폭풍우 치는 낮과 밤을 동무들.. 더보기
미루나무 미루나무 [최갑수]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습니다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떠나가던 길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흔들려주었으니 당신이 떠나간 후 일말의 바람만으로도 나는 온몸을 당신쪽으로 기울여주었으니 그러면 된 것이지요, 그러니 부디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내 기다림은 그렇게 언제나 위태롭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 단 한 번의 사랑, 문학동네, 2021 욜랑거리다 [최서림] 말에 붙잡혀 사는 자, 꽃들에게 나무들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에게도 미루나무 담록색 이파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 내일은 언제나 새로운 기차처럼 다가왔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말에 붙들려 들떠 있는 자, 언제나 낡은 정거장에 홀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다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가 오겠.. 더보기
래여애반다라( 來如哀反多羅1~9 )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 1 이성복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컥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아, 푸르게 살아 돌아왔구나,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 래여애반다라 2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돌아가면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와 자궁을 열고 피 묻은 나를 번쩍 드어 올릴 때 또 다른 딸들이 깔깔거리며 빛 바랜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 보다가, 보다가 어미의 삭은 탯줄 끌고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죽고 없는 세상으로 래여애반다라 3 이 .. 더보기
바람꽃 너도바람꽃 [정진혁] 산기슭에서 만났다 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 저녁이 모이고 모였다 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 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네가 있던 자리에 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무갑사 뒷골짝, 그늘볕을 쬐던 어린 꽃 가는 바람 지나가자 여린 목을 연신 꾸벅댄다 전등선원 동명스님은 깜빡 졸음도 수행이라 했다 꽃도 절밥을 하도 먹어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요새 무갑산엔 허물 벗은 봄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다 - 달빛 .. 더보기
국화꽃. 국화빵은 모른대 [이규옥] 국화빵은 모른대 알록달록한 국화꽃을 모른대 알큰달큼한 국화 냄새를 모른대 불 위에서 철틀 속에서 엎어지고 젖혀지는 국화빵은 모른대 누릇한 냄새밖에 모른대 살 익는 냄새밖엔 모른대 내장마저 훤히 비치도록 바싹 살을 지져 전신에 국화 문신 새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거뭇거뭇 살을 태워 구수한 국화 냄새 풍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저만치 비켜선 채 화분 속에서 방실거리는 국화꽃은 모른대 가을볕 받아 살랑살랑 풍기는 국화 냄새를 모른대 덥석, 내장째 물려 찢기고 씹혀 감감한 미로 속으로 삼켜질 제 살 익은 냄새밖에 국화빵은 모른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사, 2008 귀가 서럽다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