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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슬펐던 어린시절 기억 - ‘개망초꽃’

무리지여,, 피었는데도 슬퍼 보이던 꽃.






죽은 아기를 업고
전철을 타고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한 마리 들짐승이 되어 갈 곳 없이
논둑마다 쏘다니며
마른 풀을 뜯어모아

죽은 아기 위에
불을 놓았다

겨울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붉은 산에 해는 걸려
넘어가지 않고

멀리서 동네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떠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왜
무우시래기국 같은 아버지에게
총을 쏘았을까

혁명이란 강이나 풀,
봄눈 내리는 들판 같은 것이었을까

죽은 아기 위에 타오르는
마른 풀을 바라보며

내 가랭이처럼 벗고 드러누운
들길을 걸었다

전철이 지나간 자리에
피다 만 개망초꽃


- 정 호승 시 ’개망초꽃‘모두




헌정 [안정옥]




새벽 산책길 잠자는 것들을 뒤로 두며 걷는다
이미 들꽃들은 깨어 있다 새들도 막 날개짓 멈춰
새들이 먹이에만 급급하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어쩌면 틀린 생각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었을까
들꽃 몇 송이 꺾으며 꽃도 새도
나와 흡사하게 숨쉬며 그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오늘 산책길에선 다른 질문 하나 받는다
지난번에도 훨씬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갔지만
이렇게 합쳐지는 마음은 흔하지 않았다
불쑥 그 안으로 잡아당겼다 몸이 더워졌다
그들도 누군가에게 혀와 가슴으로 바치듯
때로 더 화려하게 더 진하게 날개짓도 우아하게
흔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늘 힘들어하는 내 책상을 위해 들꽃을 꺾었지만
문득 이 꽃을 여기에 보내고 새들을 허공에 보내고
나를 만들어 강가로 보낸 이가 내 옆의 공기를 대신해
있기는 한 걸까 이 들꽃을 그에게 바치고 싶다
묵은 갈대가 속을 흔든다 강물이 자그그락,
꽃이 아니라 내 몸으로도 가능하다고 대신 중얼거린다
물속으로 소리 없이 들어선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뭐라 할까 잠시 그런 합침을 준 그에게 그렇게
표시해야 한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에
내 몸으로 묘비를 세우고 싶다
하루하루가 개망초의 한줄기와도 같다면
그 한쪽을 툭 분질러, 잠시 진물도 흐르겠지만
곧 멈춰질 것 그런 마음까지 품에 안고 풍덩

    -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문학동네, 2017




공휴일 [이규리]



지금 안 피면 다시 못필 것처럼 개망초들
왕소금 말가웃으로 퍼부었다
그 풀밭 가운데
시멘트 담 낮은 우리에 앞발 척 올리고
오래 한길 쪽을 내다보는 돼지들
무얼 기다리는 눈치다
생긴 모습이 워낙 동떨어져
절실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자만
그래서 더 처량하다
체중을 다 실어 우리 밖으로 넘어간다 해도
바깥 또한 안과 다르지 않고
함부로 규정해놓은 돼지라는 이름은
이승에선 이미 손볼 수 있는 간극이 아니다
한참 내다보던 눈 돌려 앞발 내리고
질척이는 세상 구석 킁킁 냄새부터 맡아본다
밥통은 비어 있고 이런 형편쯤
이제 이골이 나 있기도 하다
단 한 번 의심할 겨를 없이
외관이 삶을 막아버린 지 오래,
더 이상 심각해하지 않는다
단순해져 있으므로, 단순해야 하므로
질척이는 오물을 보금자리로 깔고 앉는 도량이 생겼다
그저 뚱뚱 돼지감자나 돼지풀에게 물려준 이름이
미안하다고,
허전하다고,

          - 뒷모습, 랜덤하우스, 2006




여름 [임선기]




개망초에서
망초로
망초에서 데이지로
데이지에서
이름 없는 풀로
이름 없는 풀에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해변으로
그리고 마침내
심장 깨지는 소리를 들을 때
다시 나는 너에게로
너는 풀 한 줄기로
데이지로 개망초로
그리고 여름으로
눈망울로
다시 눈망울로

  - 항구에 내리는 겨울 소식, 문학동네, 2014




개망초 [최서림]




유월이면 이 북쪽에서도 똑같이
나른한 목소리로 뻐꾸기가 운다.
애잔한 눈빛으로 개망초도 핀다.
쓸쓸한 인민의 얼굴로 핀다. 아니,
물, 바람, 햇빛만 받아먹은 얼굴로 핀다.
인민 이전의 사람의 얼굴로 핀다.
길가에 버려진 땅위에 무더기로 핀다.
인간의 역사는 아랑곳없이
바람 속에 서로 몸 비비며 핀다.
소나기 포탄으로 뒤집힌 땅에서도 피어나던 꽃,
오늘 금강산 가는 길에도
하늘하늘 질기게 피어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겨우 구별되는 얼굴로
소리 없이 피었다 진다.

           - 물금, 세계사, 2010



* ’개망초꽃‘ 하면,, 먼저 떠 오르는 ‘이미지’를 잘 그려낸 정 호승 시인의 ‘개망초꽃’. 철없던 어린시절 철길따라 산발하고 떠돌던 아기같은 포대기를 싸 않고서 개구진 아이들을 피해 철길을 따라 떠돌던 여인의 얼굴.., 잊혀지지 않는 어린시절 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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