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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제라늄. 제라늄처럼 [황혜경] 그리 쉽게 병들지 않는다고 해서 받았다 그리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데 까맣게 타들어가고 아껴 써야 하는데 먹는 속도가 곰팡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자주 버렸다 버리는 나를 버릴 수 없기도 해서 독서와 식사의 습관을 되찾아야 하는데 제라늄은 장식적이고 에둘러 말하곤 해왔는데 다시는 안 그러려고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잠들 수 없어 무엇으로든 무르기 시작하는 줄기들 꽃의 이미지에 기대어 질이 필요한 것들이 있지 질이 비현실적으로 거쳐서 지나가면서 끝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통과할 수도 없으면서 생식生殖을 대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그런 거라면 등을 돌리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 손잡아줄게 지금은 눈앞에서 잠시 사라져야 할 때 질문하는 자가 보이지 않고 대답도 들을 수 없고 원하는 .. 더보기
무제 / 아프리카 시인의 습작노트 중. 당신의 둥글고 빛나는 검은 공단의 가슴…. 얼굴의 그늘 속 이 하얀 미소가 오늘 저녁 내 맘속에 저 멀리 기니에 있는 귀가 멍멍해 지는 도취의 리듬을 일깨운다 검고 벌거벗은 우리의 누이들을 도취시키는 저 리듬 또한 이 저녁 내 맘속에 고대 가 잠들고 있는, 검은 나라의 영혼을 관능에 겨워 열망하는 검은 황혼을 일깨운다. 오늘저녁 불안한 힘속에, 당신의 좁은 등을 따라… - 무명 아프리카 시인의 습작노트 중 에서, * 1987 년의 Note에 쓰여있는 시 한편,, “시를 감상하는 것은 시를 짓는 것보다도 어렵다. 그러나 자꾸만 읽고 되뇌이는 속에서 감상의 깨우침도 얻게 되는 것이다.” 36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다. 크게 반성 할 일이다. 더보기
영혼의 꽃/진정성.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풀통이 넘어져 모자란 만큼 물을 채웠다 넘어져 흐른 자리는 굳어 엉기고 점성은 .. 더보기
시(詩). 젖 시 한 채 -안현미 시인 김자흔 요즘 그녀의 시 쓰는 화두는 오르지 젖이란다 화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동안 시 속에 젖을 풀어 놓을 생각이란다 그래 그런지 함평 찾아가는 문학버스 안에서 꽃무릇이 다 졌을 것이라는 동행 시인의 말에 "뭐라고요? 젖이 다 젖어버렸다고요?" 대뜸 젖으로 들이미는 그녀의 우문, 그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젖은 아직은 비루해서 이제 겨우, 젖동냥 젖비 젖울음 정도 젖감질젖꼭지젖꽃판젖내젖당젖니젖동생젖멍울젖배저부들기젖비린내젖갬젖송이젖어미젖줄젖털젖퉁이 이 많은 젖의 재료를 섞어 어떤 시를 낳을지는 무릇 그녀의 몫, 발효된 시 가득 쟁여 놓았다가 가난한 시인들에게 詩젖 한 사발씩 푹푹 떠주는 일도 꽤 재미진 일이 아닐까 지상에 아직 집 한 채 마련치 못한 그녀, 이제 머잖아 보얀 젖들이.. 더보기
고향의 누이 같은 꽃/메밀 꽃. 눈물을 깎는 법 [김점용] 수평선을 잡고 걷는다 똑바로 걸으려 애쓴다 안 보이던 섬들이 문득 일어나 절뚝절뚝 줄을 잘라 먹는다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저절로 감긴다 왼눈은 감기지 않아 눈물이 난다 바다 저 멀리 끝에서 하얗게 메밀꽃이 핀다 수평선을 놓칠세라 꽃을 깎는다 눈물을 깎는다 대패는 장대패가 좋다 어미날에 덧날을 끼우고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는다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허리 를 숙인 자세로 무게중심을 오른발로 옮기며 살짝 당긴 다 눈을 크게 뜨면 눈물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망막에 꽃잎이 비칠 듯 말 듯 눈시울의 힘 조절에 각별히 주의 한다 물새 앉은 자리처럼 누군가 다녀간 자리는 엇결리기 쉽다 눈을 다친 숭어 새끼가 뛴다 날.. 더보기
내 말년의 입맛 / 고들빼기’ 김치. 잡초 [이향지] 내가 심어 내가 먹는 손바닥농사 뽑아도, 뽑아도, 쳐들어오는 잡초들과의 전쟁이다 나는 도라지 심었는데 쑥 민들레 어깨동무로 자란다 나는 무 배추 상추 시금치 아욱 심었는데 쇠비름 고들빼기 씀바귀 더 팔팔하다 내가 내 감자 고구마 서리태 옥수수에게 타이른다 쟤들 좀 봐라, 꾸짖을수록 내 잎과 열매 한층 모자라다 토박이 경운기 빌려서 깊이 갈아엎고 닭똥 푸집 섞어 주고 싶어도 하늘 높은 줄만 아는 다락밭이다 똑같은 흙, 똑같은 안개, 똑같은 햇볕 잡초도 사는데 내 희망 먹고 자란 푸성귀보다 구박덩어리들이 더 반들거리니 내가 게으른 탓이다, 내가 경계를 느슨하게 잡초도 식구로 보아주기로 한 날부터 잡초가 잡초 쪽으로 나를 엎어 버린 것이다 내가 계속 그늘 속에 앉았거나 누워 있으면 쑥 민들레 .. 더보기
채송화.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기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2007 밤의 가족어 사전 [이선이] 3음절로 된 단어를 고르는 중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카르마 karma 셋이 되었을 때 느끼는 어설픈 안정감 편안한.. 더보기
해바라기 / 둘, 어느 한 사람의 산책길 [천양희] 숲이 잠 깨는지 나뭇잎들이 찰랑거립니다 아침햇살이 부신 듯 어린 새들 두 눈이 붉어집니다 바람이 몰래 빠져나가느라 오솔길이 더 좁아지는 아침 들쭉나무 아래 철 늦은 산꽃이 순하고 작년의 낙엽들 썩어 거름 된 지 오랩니다 한 사람의 산책길이 그냥 지나가고 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 이곳에 와서야 해 지는 서편을 잠시 돌아봅니다 되돌아볼 것은 노을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지기 때문에 노을이 아름답다 하였으나 지기 때문에 무서운 건 누구이겠습니까 눈시울이 노을보다 더 붉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가오리연 하나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얼레를 더 당겨, 그래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거여 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노인이 힘주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