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숲에 들다

새해,,. 2024년에 덧붙여,

새해, 2024년 모두 행복하길,





백야 [최재원]




새해가 밝, 발, 밖, 박, 았습니다 눈보다 손이 먼저 부셔요 손보다 찌르르 젖은 마음이 부셔요 너를 입(에 넣)고 굴릴 때 혀가 먼저
부셔요 부셔요 부셔요 시고 부신 너(들)

구름이 해를 찢어 놓습니다 갈래의 해도 하나의 해이니
하얗게 얼어 영원히 젖은 파도만이 꾸역꾸역 다가옵니다 해도 구름도 파도도 쉬지를 않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 참 우리는 집이 없어요 갈래에 무리에 보라에 잠깐 머물까요 우리? 해 해 해는 너무 밝, 밖, 발, 박나요? 나는 그들 그들 그들이라고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잘 모르니까 우리 서로 아는 체는 말아요 아니 우리 누일 데 없는 몸을 해 위로 겹쳐요 차가울수록 두께 없는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어요

  사위어 가는 사이의 모든 것들의 트랜스 오늘도 오지 않는 오늘 사이의 올 해를 제멋대로 바칠 거야 비출 거야 사이의 해 사이에는 해멋대로 굴 거야 우리는

  소년도 소녀도 아닌
  오차도 찰나도 아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안은 여러 개지만 밖은
  하나예요 이제 같은 길은
  없어요

  뾰쪽한 모래 위 몸 둘 곳 없어 정처 없이 없었던 집을 헤매는 발 디딜 데 없는 얕고 짙은 물자국 속 뒤섞인 발자국 겹쳐진  



그 위로
성난 파도
올 해 올 해 다른 올 해를 싣고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맘을 드시오
오른쪽  왼쪽에서 밀려드는
바람과 바다의 못 말리는 키스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몸을 나누시오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어
올해의 입을 그들과 맞추시오
맘을 내어 주시오
어찌 맘을 곱게 접었겠소
그러니

걱정 말고
미어진 맘을 맡기시오


              -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민음사, 2021




세모감 [김소월]




금년도 한 해는 어디 갓노
두던 데 없건만 가는 세월
온다는 새해는 어디 오노
값없이 덧없는 나이 한 살.

걷는 길 같으면 돌아가리
걸을 길 같아도 쉬어가리.
깨었을 말로는 자도 보리
꿈이라고 하면 깨어보리.

모르는 글자도 아니지만
감았든 마음만 이르집네.
못 먹는 술이나 아니언만
간다사 원마다 술값 있네.
                          **주막


                -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 2018.권영민 엮음




사랑의 힘 [윤후명]




지나온 한 해가 거울 속에 묻혀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
사랑을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힘인 사랑을 기대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그때마다 더 깊게 파이고
새로운 날 숨가쁘게 기다리게 했으니
이제 기쁨과 슬픔 함께 버무려
거울 속 침묵의 창고에 간직하련다
가거라, 모든 망령이여
먼 뒷날 비록 다시 모습을 드러내
거울 속에서 절규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옳음과 그름을 살피기 위하여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님께
길을 비켜라
헌날을 데리고 서산을 넘어가
멀리멀리 사라져가거라.
있는 것을 있게 하고 없는 것을 없게 하는
사랑을 위하여


                - <2023년 달력>(샌드파인 골프클럽)




새해에는 [임영준]



새해엔
모두 부자되게 하소서
돈벼락을 맞아
입원한 사람들을 문안하느라
정신없게 하여주소서

새해에는
다들 정치인이 되게 하소서
특정인 몇몇이 다 해먹는
삼류국이 아닌
일등나라 사람으로
자부심을 갖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으로 넘치는 세상이게 하소서
콧대높은 여자도,이중적인 남자도
아무에게나 베푸는
약간은 에로틱한 사회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시간이 느려터지게 하여 주소서
한해가 다섯해만큼이나 늘어져서
빨리 불혹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친구녀석들의 푸념에
질리게하여 주소서

새해에
이도 저도
이루어지지 못할거라면
그냥 지금 이대로
소시민으로 남게해 주소서
그것 뿐이외다.





눈보라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안주철]




주지의 등에서 눈보라가 일었다 찻상 앞에 앉은
아내와 딸은 주지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희미하게 웃는다

주지는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들은 이야기를 아내와 딸에게 되돌려준다

첫번째 입은 늘 이렇게 쉽게 지워지는 걸까?

창 너머로 눈발에 지워지는 산을 바라본다
지 · 워 · 진 · 다 ?
산은 지워지지 않는데
나는 오직 나를 지우는 데 모든 힘을
헛 쓰면서 산 것 아닐까?

주지의 등에서 날린 눈보라가
다시 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날리는 눈송이들이 쌓고  있는 흐린 풍경을 바라보면서
처마에 매달린 쪼글쪼글한 산감 향을 떠올린다

새해를 누각에서 맞이하려는 사람들은 성실한 사람들이다
눈 내린 산길을 밟으며 누각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올해도 성실하게 슬퍼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모이고 모여서
다음 사람을 미끄러뜨릴 때
많은 사람이 지나간 산길이 다음 사람을
받아주지 않을 때

내가 나만의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만든 위험,
내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찾아오는 불행?

모든 사람이 하나의 길을 걷는 위험한
곡예가 주지의 등 너머에서 벌어진다 나는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주지는 이미 나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주지의 등에서 시작된 눈보라가 창을 급하게 두드린다


              -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문학동네, 2020




저만치 여기 있네 [김경후]




새해 첫날마다 지난해 토정비결이 맞았는지 맞춰본다
예언은 지연된다
잘못된 건 없어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
일어나자마자 운 게 아니에요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사랑보다 빨리 쉬는 건 사람 그러나
난 쉬고 싶은 사람
울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건 없어
러시아혁명사 스터디 내내 새로 살 원피스만 떠오른다
혁명사를 읽을 때마다 봄꽃 무늬 피어오르는 난 혁명인 사람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췃다
그럼 자신을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를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군
변한 건 없지
고양이 감시하는 카메라를 감시하는 고양이가
저만치 나를 보고 있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시간은 멈추고 세월이 흐른다


                   -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문학과지성사, 2021




일어나라 보풀 [신은숙]




보풀은 일어난다고 한다
보풀이 보푸라기가 될 때까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닳는다는 말의 저편에 다시 일어서는 보풀들

거스러미는 돋는다고 한다
손톱을 매만지다가
아프다는 말의 저편에 문득 돋아나는 거스러미들

무신경의 극치 바다엔 녹조라떼
내 안의 녹이 슬어 혀가 굳고 피가 돌지 앟는 나날들
라떼를 마시다가 사라지는 거품을 바라보다가

물끄러미 새해가 밝았다 해는 어제도 그제도 밝았는데
내 속의 절벽이 새벽을 마주하고
새해는 새가 붙여 준 이름일까 철새도 철드는 게 싫다는데

미세 먼지 짙은 겨울을 너는 지나가고 있다
자욱한 강바닥을 다 걸어야 봄이 기침을 하듯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보풀인 채로 나는


                 -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파란, 2020




새해 [테이무르 토란지]




우리 눈물이
왈칵 쏟아져도
새해가 오겠지
늙어가는 우리 노래에
새로이
비가 오겠지

와서 앉아봐
앉아서
세어보자
부풀어진 순간들을

기억하자
저 멀리 가버린 날들을
잊어버린 눈물을
허연 눈밭 밑에 남아
이루지 못한
꿈을


               - 미친 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 마음이음, 2017




새해에 [이용악]




이가 시리다
이가 시리다

두 발 모두어
서 있는 이 자리가 이대로
나의 조국이거든

설이사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헐벗은 이 사람들이 이대로
나의 형제거든

말하라 세월이어
이제
그대의 말을 똑바로 하라


              - 낡은 집,미래사, 1991




까만 양복엔 어떤 양말을 신어야 하는가 [이근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발음이 자꾸 새는 디제이가 반갑다
(간밤에 펐다)
새벽까지 요란한 음악이 흘렀겠지

오늘의 (술 취한) 질문은 이런 것
까만 양복엔 어떤 양말을 신어야 어울리는가
당신의 패션 감각은 몇 점인가
자선냄비의 빨간색은 다 어디서 왔는지
한 해를 곱게 물들이는 당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데

(오늘도) 사랑을 전하기 위해
눈이 펑펑 내린다
눈도 소리를 가졌으면
음퍽음퍽 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일의) 지붕을 부수었으면
그러니까 오늘의 답은 이런 것
와인색 양말
짙은 밤색 양말
무난한 스트라이프 양말
(검정 양말은 다 어떡하라고)
산타의 무게에 선물의 무게까지 합하여
(비현실적으로) 부담스럽다
미래에도 굴뚝은 좁고 길고 어둡겠지

(수염은) 감쪽같지만 (목소리는) 숨길 수 없다
허스키 보이스와 캐럴의 궁합에 맞추어
눈이 펑펑 내린다
눈도 맛을 가졌으면
막대사탕처럼 아이들을 유인해
알록달록한 세계에 빠뜨려 휘저었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처럼
눈 쌓인 운동장에 발자국 글씨
사랑해 누구야
외국어처럼 낯설고 아름답게 빛난다
눈이 펑펑 내린다
평등하게 쌓여서
세계는 반쯤 지워진다

그러니까 오늘 당신의 까만 양복 아래
빛나는 양말은 무슨 색깔인가
당신은 누구의 땅을 밟고 있는가
네버랜드
에버랜드
내 땅은 없다
(내 땅의 시작과 끝이 없다)
내 땅에 내릴 눈은 없는데
발자국을 남기는 용감한 이의 입술은?

가난한 내 땅에 비행기가 뜨고
남의 땅을 함부로 가로지른다
당신의 감색 재킷이나 회색 넥타이 같은 건
보지 않아도 (뻔하다)
양말은 (모르겠다)
주의 깊게 살펴야겠지만

꼬부라진 발가락이 하나쯤 눈치 없이 새지는 않았는지
눈이 펑펑 내린다
(질문과 답을) 지우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라는 듯이
각설탕처럼 뾰쪽하게 내린다


              - 차가운 잠, 문학과성사, 2012




오늘 [박준]




  마늘을 한 접 더 사 오는 것으로 남은 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 들여야 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반쯤 낡았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습니다 어제는 '들'이라 적어야 할 것을 '틀'로 잘못 적었지만 고치지 않았습니다 달라질 것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내일은 바람이 잦아든다고 하니 구경을 겸해 뒷산을 오를 것입니다 며칠 전 내린 큰 눈이 아직 나무들 위에 쌓여 있을 테고 그러다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날리는 백매白梅를 함께 보았던 사월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근하신년 [윤관영]


연말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다
설날이 지나면, 그래 입학 시즌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다
발가락이 어는 지금을 두고
자꾸 앞을 내다 봤다
사, 오월이야 잘 되는 달인데
왜 이러지 하다가 넘어가고
찌개 기피 철인 여름이 오고
또 휴가가 끼고 연이어 추석이 왔다
자꾸만 앞을 내다보면서
나아지겠지, 좋아지겠지 하면서
속는다 속는 줄 알면서 속는다
시월은 되는 달인데 하다 보니
김장철이고, 월동 준비해야 하고
찌개 철인 겨울이 오니, 막상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진다
기대하다가 기대하다가
이렇게 해가 간다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다가
앞이 없다는 걸 확인하다가
그래도 기대하면서 새해를 맞고
기대를 저버린 한 해가
그냥 간다

속아도 기대게 되는 기대
속을 줄 알면서도 기대하게 되는,




새해의 기도 [허형만]




갓밝이에 처음으로 비치는 햇살처럼
귀하고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하소서
알음알음 한올진 사람이든 풋낯인 사람이든
발그림자 환히 밝혀 주시고
비록 작은 입길이나 험담을 일삼는 자를 만나거나
말전주 짓 하는 자, 말재기 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지상으로 내려와 풀꽃에 입을 맞추는 햇살처럼
처음 만나는 생명들을 귀히 여기게 하소서
뙤약볕 속에서 햇볕에 감사하고
태풍 속에서도 비바람 받아들이는 나무처럼
어떠한 고난이 닥칠지라도 겸손하게 하소서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 법
내가 희망하듯 뜻있는 길마다
희망으로 넘치게 하시고
자비와 평화가 내 안에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 황홀, 민음사, 2018




할렐루야 소주와 함께 [최금진]




소주 두 병을 사놓고 아껴가며 먹는다
만성이 된 궁핍함에 무슨 경계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저녁 여섯시 이후에
취해도 덜 부끄러운 시간에 마신다
술을 푼다는 말과 슬프다는 말의 여운이 서로 비슷해지는 저녁
새우깡을 씹어먹으며
깡으로 찬장 속으 부엌칼을 물고 죽어도
그건 엽기적인 사건일뿐 뉴스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저녁의 소주 두 병과 일곱평의 방은 너무 적고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게 적다고만 생각되는 결핍,
왜 그런 결핍에 코를 댈 때마다 석유냄새가 나는 걸까
화악, 불길처럼 오르는 술기운

빈 술병을 들여다보면 그 속은 텅 빈 옹관묘
서너 개 불켜진 건너편 셋방들도 어둠속의 구멍
새해마다 같은 점괘가 나오는 사주의 까닭모를 불행은
왜 손도 안 닿는 구멍인가
구멍이 술주정뱅이를 낳고, 미신을 낳고
기도를 해볼까,
이 쓸슬한 연말에 오실지도 모를 메시아나 기다려볼까
주여,
저는 당신이 끈덕지게 저주할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소주 두 병으로 취하기엔 아무래도 모자라
추리닝을 입고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경기가 안 좋죠, 어떻게 알아보고 주인사내가
말을 걸 것이다

누구나 함부로 예측할 수 있는 통속적인 불행을 산다
하지만 누구나
아닙니다, 살 만랍니다, 웃으며 딴청을 부려야 산다
인간은 호모네간스, 반드시 그렇더라도 '부정하는 존재'니까
성탄절 트리를 멋지게 세운 골목 앞 교회에서
예수님이 그려진 전도지를 보면
무조건 아멘, 이다
갈 데까지 가겠다는, 기꺼이'콜'하겠다는 뜻이다
할렐루야, 소주와 함께


          -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향일암 애기 동백 [송찬호]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기 위해
향일암엘 올랐을 때 이야긴데요

해를 놓칠까 하는 조바심으로 진작에
마음의 일천팔십 계단 무너져내리고
그 험한 바윗길 틈에서 헤매고 있었는데요

더욱 급해진 마음에 그만 바윗돌 틈 애기 동백까지 깨우게 됐는데요
선홍빛 뺨의 애기 동백,
눈 비비며
그 이름난 향일암 돌문을 열어주는데요

새해를 맞기 위해 바다는 반짝반짝 닦여 있고
어향에 묶여 있던 고깃배들 그 좁은 돌문을 통해
먼바다로 빠져나가고 향불과 경 읽는 소리도 빠져나가고

이윽고 바위에 그려져 있던 고승 대덕의
이마가 환히 밝아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애기 동백을 깨운 미안함도 조금은 가셔졌는데요


             -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7




동족 [최문자]




오랫동안 가난한 집 가장이었다

서쪽에 살고 있었지만

늘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하나님이 사시는 곳

실업 수당 받은 날 그는 혼자 정동진 해 구경을 갔다

떠오르는 해가 둥근 밥상으로 보였다

자기 혼자만 둥근 하나님

바다에서 막 떠오른 둥근 밥상에

모두가 수저를 놓고 새해의 소원을 빌 때

그도 해에게 소원을 빌었다

밥 없는 밥상을 놓고 빌었다

붉고 둥근 것밖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동쪽

그는 해를 등지고 하산했다


                   - 파의 목소리, 문학동네, 2015




새해 아침에 [황규관]




이런 날에는 밝은 덕담을 나누며
이뤄야 할 것과
가져야 할 것과
빛이 나는 것을 한 아름
안겨줘야 하는 걸 잘 안다

부디 이런 날에는 복을 가까이 앉히고
피해야 할 것과
잊어야 할 것과
어두컴컴한 것은 한 묶음
문밖 모르는 이야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오래 들어왔다

창밖 마른 가지를 보며
곧 다가올 봄과
끝나지 않은 목숨과
찬바람을 한 아름 받아들여
마음을 밝혀야 하는 까닭도
어젯밤을 세워 새겼으나

어느새 고난에 익숙해진 나는,
복과 성공과 빛남을 모르겠다
뼈저린 시간과 타락과 오류가 남긴 흉터만
변함없이 끓고 있다
좀 더 가야 할 참극만 남아 있다

오, 신음 같은 사랑이 울먹이고 있다


                -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수유 나무.  (0) 2024.03.13
자작나무 2.  (1) 2024.01.14
자작나무.  (1) 2024.01.14
미루나무  (1) 2024.01.14
래여애반다라( 來如哀反多羅1~9 )  (2) 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