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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자작나무 2.

한 겨울 자작나무 숲길은 적.막. 하. 다.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1996)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정끝별]

유난히도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우내 心身蟲에 나무 몸 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온통 속 비어버린 몸이었기에 봄이 오고 여름이 왔어도 새 잎 돋지 않았음을 못 보았다. 무성했던 잎이 잡목들의 잎이었음을 못 보았다. 그토록 오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자작나무의 불운을 못 본 것이다. 간밤 비에 젖은 몇 개의 밑둥 혹은 등걸을 보고 그제여 알아차렸다, 내 앞에서 몸 숨겨버린 자작나무 몇 그루를. 이미 두엄의 색을 닮아가고 있는 생톱밥더미를 보았을 때야 알았다, 베어진 가지 사이로 햇빛이 숲 전체를 밝아보이게 한다는 것을. 그 빈터로 낯선 길 하나가 새로이 놓여지고
낯선 등걸에 잠시 앉아본다. 아직 축축하다. 햇빛을 따라 성글게 놓여진 길에 들어선다. 자작나무 숲은 또 이대로 자연스럽고 나는 익숙하게 걸어나온다. 불운한 기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


*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1996)






자작나무 뱀파이어 [박정대]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랫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곳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자작나무 [헤르만 헤세]

시인의 꿈의 넝쿨도
더 섬세하게 가지 치지는 못하리
더 가볍게 바람에 숙이지 못하리
더 고귀하게 푸르름 속으로 솟지 못하리.


여리게, 젊게, 너무도 날씬하게
환하고 긴 가지들을 너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입김 하나에도 흔들리게 드리우고 있다.


가벼이 나직이 나긋나긋 흔들리며
그 섬세한 전율로써
너는 내게 연연하게 맑은
젊은 날의 사랑의 비유로 보이려는구나.

* 헤르만 헤세 대표 시선 / 전영애 옮김, 민음사(2007)




자작나무 [문성해]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하고

* 자라, 창비.




자작나무 [신대철]

돌덩이들 은은해지는 폭설 속에서
자작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눈사진 몇 장 찍고 우리는
자작나무 주위를 빙빙 돌았습니다
발자국 흐른 길에 눈꽃 피었다 지고
흔들린 품속엔 손때 묻은
가슴 한 장만 남았습니다

하얀 자작나무 껍질 같은


* 바이칼 키스, 문학과지성사(2007)




자작나무 여자 [최창균]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너무나 눈부실 때
그도 검은 땅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게다
생의 횃대에 아주 오르고 싶었을 게다
참았던 숲살이 벗어나기 위해
또는 흰 새가 나는 달빛의 길을 걸어는 보려
하얀 침묵의 껍질 한 꺼풀씩 벗기는,
그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듯 종아리 올려놓은 밤
거기 외려 잠들지 못하는 어둠
그의 종아리께 환하게 먹기름으로 탄다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종아리가 슬픈 여자,
그 흰 종아리의 슬픔이 다시 길게 걷는다

*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창비(2004)




나의 자작나무 [강신애]

당신은 언제부터 자작나무 숲에 살았나요
제가 부를 때 당신 대답은
자작나무 숲을 돌아나오는 피리소리였나요
당신은 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당신 살결은 은잔처럼 눈부시고
맨발은 흰뱀처럼 보드라워
그 아래 양귀비꽃들도 아득히 눈감고 머리 숙입니다
저녁이면 자작나무 이파리는, 연기가 뿌옇게 올라오는 숲에
긴 머리칼을 기대고 手淫합니다
긴장이 빠져나간 이파리는 순결해지고
당신은 촘촘한 흰 피륙으로 꿈을 덮습니다
자작나무를 잠재우고 자작나무 숲을 들어올리는 당신은
자작나무의 정령,
제게 보여주신 수천 길 폭포의 현란한 추락과
비상하는 새떼의 날갯짓은 연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탁발하며 저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씨방이 있어
당신 숲 가까이 씨앗을 날려보냅니다
과거 따윈 갖고 싶지 않은 당신 몰래
내가 낳아 기른 자작나무 한 그루
나는 이제 나의 자작나무에 기대어 삽니다

*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창작과비평사(2002)




자작나무 봉분 [김선우]

낮잠에 들었다 깬 맑은 가을 오후 저, 저, 저 나비 잡아라
꿈속의 내가 평상을 박차며 허둥댄 것도 같은
내 낮잠 속으로 누군가 자러 들어와 한잠 곤히 들었다 방금 나간 것도 같은


깨어보니 나는 큰대자로 잠들었던 모양인데 나비를 쫓으러 퍽이나 달렸는지
침대 발치에 머리를 누인 거꾸로 놓인 큰대자인지라


떡 벌어진 다리는 말고 조금은 섬섬하게 다리를 벌린
거꾸로 선 매촐한 큰대자 같은 자작나무 한그루 떠올린 것이다
말하나마나 몸빛은 재처럼 희디희어서 사바사나*, 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 것인데


거꾸로 선 희디흰 자작나무의 잠,
송장자세로 삶을 건너는 고즈넉한 휴식이 나는 대번에 그리워져
내 죽음의 형식을 벼락처럼 알아채고 만 것이다


화장한 나를 묻은 뒤 자작나무 묘목 한채 심어주면 좋겠구나
원한다면 언젠가 내 옆에 그대의 육신도 좋은 나무 한채로 이사와도 좋겠구나
그곳은 너무 울창하지 않은 이제 막 꿈꾸기 시작한 황무지여도 좋겠어서
하나둘 이사온 사람들이 한 백년쯤 뒤에는 숲 한채 넉넉하게 이루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 내가 사랑한 자작나무 한그루 노란 잎새 나비떼처럼 떨구고 있는
한적한 가을 오후 저, 저, 나비 잡아라 희디흰 송장에서 비끄러져 내려오는
수천수만의 저 나비떼, 나비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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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가 동작의 하나. 산스크리트어로 송장자세를 뜻함.

*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2003)




물 건너는 자작나무 [안도현]

한 떼의 자작나무가 二道白河를 건너고 있다
물을 가르는 허벅지들이 하얗다
자작나무들은 보퉁이 하나씩을 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있다
머리에 인 보퉁이가 클수록 삶은 가난처럼 슬프다
어두워지는데 옆모습 희미해진 자작나무들이 두런거린다
백 년 넘게 물을 건너느라 발목이 시큰거린다

<2004,현대문학.10월호>
* 좋은시 2005, 삶과꿈.




자작나무 [김백겸]

숲 속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흰 눈이 내리고 햇빛이 찬란하게 비친 동지가 지난 어느 날
자작나무는 성스러운 세계목이 되었다
구름 위의 하늘과 대지의 지하를 오르내리는 샤먼의 경배에 의해
온 우주의 소리와 빛을 보고 듣는 천수관음이 되었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전에는 그냥 평범한 나무였다


봄이 오면 새 잎을 피우고
가을이 오면 흰 가지로써 바람에 온 몸을 내 맡기는
뿌리에 온 몸의 생명을 내려보내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는
목숨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였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어느 날 불멸의 환상을 품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믿기 시작했고
흰 몸과 푸른 잎들은 신의 마음으로 타고 있는 불길임을 자각했다
흰 몸과 푸른 잎들이 불사조처럼 날아가
빛과 하나가 되는 존재임을 믿기 시작했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그 때부터 마음에 빛을 내기 시작했고
신의 모습을 본 모세처럼
숲의 운명을 나무들에게 빛의 침묵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 『현대시학』2004년 3월호.
*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나희덕 엮음, 삼인(2008)




자작나무 사원 [최정란]

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들은 바람의 목구멍 깊이 울고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닌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한 전생이 저 나무의 한 잎이었을 터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ㅡ 『시인시각』(봄호)
* 미네르바 2009년 여름호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순 소록소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가 되고 말겠지

* 그리운 여우, 창작과비평사.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작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 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누구네의 어린 외동딸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한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1984) . 고은 전집 제3권 시2 , 김영사(2002)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김왕노]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니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세상 건너편에 서 있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에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를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너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자작나무야 [이경림]

너 지금 사랑하고 있구나 쪽쪽 살 빠지는 소리 들으며
진땀나게 그리워하고 있구나 이 엄동에 청청하게 고통
거느리고 지지푸르게 신음하고 있구나 가지에 새 한
마리
앉아도 소스라치는구나 그래 그 마음 만져지는구나
이파리만 날카로워지는 날들 잔바람에도 하늘이 흔
들리는 날들
자꾸 껍질만 키우며 거머죽죽 검버섯 만드는 날들
그래 아픈 몸에도 꺼칠하게 열매 달리고 그 열매 당
차게
가지 끝에 붙어 있구나 아아 하늘은 자꾸 네 모가지
를 당기고
출출출 물소리 뿌리를 흔드는데 안절부절 그 사이에서
팔다리만 휘젓는 자작나무야, 너 많이 아프구나

*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는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기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명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자작나무 둥치와 숟가락 [정끝별]


못이 박히도록 서성대던 이미 끝나버린 길, 한모퉁이에서 떨다 산책
을 한 적 있다 풀린 사지가 먼저 낯선 숲을 찾았다 염려와 공포로 목
이 탔다 약수터 흔적이 있었으나 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옆길로 들
어서니 잡초 무성한 집터에 망가진 캐비넷이 텅 빈 내장 가득 녹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사월인데도 바람이 뼈에 부딪혔다 턱턱 전기톱에
잘려 땅에 박혀있는 겁먹은 자작나무 둥치가 보였다 다가가 앉았다
이끼와 침묵을 뒤집어쓴 내 몸이었다 자작나무 둥치--- 나직히 되뇌
이자 후다닥 젖은 바람이 눈시울을 훑고 갔다 한결 따뜻했다 일어서는
순간, 함부러 드러누운 자작나무 둥치 옆구리에 돋아난 여린 이파리가
보였다 갓난 아이 손톱처럼 투명했으나 제법 실했다 뭉뚝 잘린 팔에
검정 고무줄로 묶여 있던 소록도의 은빛 숟가락처럼, 다시금, 모든
끝이 모든 걸 쓸어가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듯, 등뼈 한가운데가 꿈
틀, 소스라쳐 숲을 나왔다 버려진 그 숲에는 다 주어버리고도 다 내
버리고도 항복하지 않는, 끝의 끝에다 알을 까는 잊혀진 길 끝이 있
었다




자작나무를 찾아서 [안도현]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
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
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 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연애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
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 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
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 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자작나무 [류시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울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괜찮은 듯이 서 있다 [박용하]

시계 불명의 대관령을 오른다, 안개는 구름보다 낮게 흘러서
더 육체적인 황홀감을 가져다 준다
백 미터 이백 미터...... 팔백 미터의, 해발의 나무들은
덜 먹고 자란 아이들처럼 키가 작다, 몸집이 작다
하지만 산의 정상에 서 있는 나무와 풀들은 그 가냘픔으로도
산의 정상을 지킨다
작은 것의 엄청남.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다 망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것들을 열심으로 즐거워하다가 취해버릴 수 있을까
새들은 죽은 휴지처럼 나무에 가끔 걸리고 이곳은 구름이 가깝고
도시는 먼 곳, 나는 거기서 오래 호흡하여도 좋았다
나는 거기서 빨리 살아도 좋았다
하지만 산의 정상은 사람들을 오래 허용하지 않는 곳
이 고개를 드나드는 차들처럼 점점이 이동하여 점점이 흩어지고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더 강한 폭풍에 시달릴수록
더 청수한 얼굴을 보여준다
햇살은 안개를 투과해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여긴 스스로를 견디는 시간이 오랜 추억이 될
나무들 풀들, 사람들이 금세 여기를 떠나듯이 쉽게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견딤의 눈물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정상을 향해 오른다고 하는 이 열망은
바람을 헤치며 안개를 통과하며 폭설 속에서 걸어 나와
하나의 햇살과 마주치는 일
하나의 흔적과 마주치는 일
대관령의 자작나무는 괜찮은 듯이 서 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전육체의 중심을 다해
산 정상에 눈물 보이지 않게 서 있다
나는 오래 죽어갈 것이다




자작나무 숲길 [강윤후]

새치 같아 아니 흑판에
백묵으로 마구 그은 선들 같아
어느 땐 뼈다귀들처럼 보이기도 해
자작나무 숲 그것 때문에
겨울 산이 더 검은지 몰라
오래 흩어졌던 길들이 빽빽이 모여
숲을 이룬 걸까 길이 다 닳아빠지면
뼈다귀만 남는 걸까 중얼중얼
염불 소리 들려
기도 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게 뼈다귀마저 다 갈아 마시면
어디로 가게 되지 반쯤 무너진 봉분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해
한 입 베어먹은 사과처럼 보이는 그 앞에서
가로막는 것의 외로움을 생각하는 중이야
햇살이 발등에서 차곡차곡
눈을 감고 있어





출가하는 자작나무 [권혁웅]
ㅡ백담사 가는 길

눈을 뒤집어쓴 자작나무가 자작, 자작 도열해 있는

이 흑백의 풍경,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숨어 사는 마음들이

절을 지었구나 그대들이 버린 발자국,

여기에 길을 이루었구나

겨울 햇빛이 산등성이 나무들에

빗살을 긋고 있다

산은 오래 전의 토기 같다,

여기에도 열매를 모으고 고기를 구워

일가를 거두었던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方外의 시절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내가 가는 곳마다 杜門이나 不出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저 눈의 성채들,

나의 내면은 저 산의 외면이었으므로

도열한 자작나무처럼 나는 오래 背景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산은 제 안을 헐어

나무들을 내보내고 있다 햇살에 몸을 열어

질척이는 길을 세상에 放生하고 있다

출가하는 겨울의 긴 꿈으로

자작, 자작, 나무들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고 있다

* 시와시학 1999, 가을호.




자작나무 숲에서 나를 찾는다 [서정윤]

떠남이 시작되었다
화단을 벗어나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이제 자작나무 숲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무와 함께 서 있을
어느새 나 아닌 남이 되어 있을
자작나무가 되어 있을...

땅위에 배를 대고 꾸물거리는
애벌레가 된다
스스로의 삶에 묶여
다른 삶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탈태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나는 다른 많은 나무와 같은 모습
어느 나무를 가리켜도 나인 것이고
그건 다시 나가 아닌 것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
자작나무 숲도 사라질 것이다

삶은 너의 주머니 속에도 없고
나의 입술에도 없고, 아득히
보일 듯 말 듯 멀리 있지만
항상 가까이 느끼는 허기증이 되어
스스로를 마모시킨다
물처럼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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