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숲에 들다

산수유 나무.

3월, 산수유가 피웠다.









삼월의 속수무책 [심재휘]




초봄날 오전, 내게 오는 볕의 마음은
그 생김이 ㅁ 같기도 하고 ㅇ 같기도 해서
지루한 햇살을 입안에 넣고
미음 이응 우물거려보다가
ㅁ과 ㅇ의 안쪽을 기웃거려보다가

기어이 낮술 몇 잔으로 밑이 터진
사람의 마음을 걸치고
사광에 늘어진 그늘 가까이 이르러서야
빛으로 적막한 삼월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서둘러 활짝 핀 산수유 꽃나무가 제 속을 뱉어
어룽대는 그늘을 먼발치에도 오래 드리우는데
그 노란 꽃그늘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안팎으로 드나드는 ㅁ과 ㅇ이 저런 풍경이라면
누구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본 적 없는
두 발 단 것들은 속수무책이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은어 [함명춘]




햇볕의 길이 서면 온다
바다쪽으로
한쪽 어깨가 굽은 오솔길을 따라
삼삼오오 떼지어 온다
산수유나무의 오래된 벗,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미끄럼틀을 타듯 온종일 산수유나무를 오르내린다
이따금 산수유나무가 간지러운 듯
몸을 비트는 건 그 때문이다
때론 너무 웃다가
허리가 뒤로 넘어갈 때도 있다
참, 말도 많다 귓속말로
오늘은 고등어가 나쁜 놈이란다
쥐치를 버리고 농어와 눈 맞아 달아났단다
그는 눈이 맑다 몸도 마음도
때가 묻지 않은 은색이다


            - 무명시인, 문학동네, 2015




옆에 산다는 것 [이운진]




이삿짐을 싸다가 수세미가 자라던 화분을 넘어뜨렸습니다
아직 그 누구의 허리도 감아 보지 못한 어린 녀석을
같이 데려가지 못하는 미안함에
땅 내음이라도 맡으려무나
아파트 화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찬찬히 나무들을 쳐다봅니다
제일 큰 벚나무는 귀찮아할까
라일락의 목을 죄면 향기를 잃고 말겠지
산수유나무에서는 우리 집 창문이 보이지 않을 거야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나무마다 찾아다니며 밑둥을 만져 봅니다
나무에게도 눈물 같은 것이 있어서
손을 대면 뿌리의 체온이 전해집니다
뜨겁지도 먹먹하지도 않은 나무 곁에 수세미를 심어 주고
이제 막 허공 한 줌을 움켜쥘 만한
덩굴손으로는 상처 난 나무껍질을 감아 주었습니다
나무와 수세미의 그림자는 이미 하나였습니다

옆에 산다는 건 이런 일이었습니다
실로 우연히라도 그림자를 포개어 놓고 싶은 일 말입니다
먼 곳에서 당신이 보낸 대숲의 소식을 받는 순간
내 안에 당신이라는 심장이 생기는 그런 일 말입니다


                      -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천년의시작, 2015




산수유나무 아래서 [곽재구]
-연화리 시편. 8




꽃뱀 한 마리가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
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
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
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
사랑하는 이여,
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1999




향수다방이 있는 마을 [함명춘]

                                      


한때는 아주 큰 산판일로 집집이 흥청거린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먼지와 거미줄만이 손님인 향수다방을 머리에 이고 차곡차곡 하루를 살아가는 향수슈퍼가 서 있는 마을  
코흘리개 아이처럼 굴뚝들은 저녁이면 훌쩍훌쩍 연기를 흘리고  
제일 오래된 우물도 첫돌 지난 아가의 푸른 눈처럼 시린 그곳은 하나같이 어리다  
하루 네 번 지나는 정기열차 외엔 소유주가 불분명한 몇 량의 적막만이 운행하고  
밭마다 병아리같이 모인 동네 아주매들이 흙보다는 끊이지 않는 웃음 속에 더 많은 씨앗을 뿌리는 곳  
굳게 마음먹은 바람도 마을 언덕에 닿으면 풀어져 살구나무 가지를 두어 번밖에 흔들지 못하고
아픈 기억도 세상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된 산수유나무처럼 담장마다 소리 없는 미소를 톡톡 터뜨려놓는다  
세월이 흘러도 철들지 않는 햇볕들이 하루 종일 뛰어놀다 가는 마을  
아무리 큰 상처도 어린 바둑이와 같아서 어룽어룽 만져주면 이내 내 가슴에 와 안긴다

  
                          - 현대시, 2012년 2월호




초봄이 오다 [하종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낸 집 안을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 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 시평 제6호, 2001년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롱 나무.  (0) 2024.03.13
매화 나무.  (0) 2024.03.13
자작나무 2.  (1) 2024.01.14
새해,,. 2024년에 덧붙여,  (2) 2024.01.14
자작나무.  (1)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