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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해바라기 / 둘,







어느 한 사람의 산책길 [천양희]


   숲이 잠 깨는지 나뭇잎들이 찰랑거립니다 아침햇살이 부신 듯 어린 새들 두 눈이 붉어집니다 바람이 몰래 빠져나가느라 오솔길이 더 좁아지는 아침 들쭉나무 아래 철 늦은 산꽃이 순하고 작년의 낙엽들 썩어 거름 된 지 오랩니다 한 사람의 산책길이 그냥 지나가고 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 이곳에 와서야 해 지는 서편을 잠시 돌아봅니다 되돌아볼 것은 노을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지기 때문에 노을이 아름답다 하였으나 지기 때문에 무서운 건 누구이겠습니까 눈시울이 노을보다 더 붉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가오리연 하나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얼레를 더 당겨, 그래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거여 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노인이 힘주어 말합니다 더 당겨, 더 당겨, 더 당기라니께 나는 무엇을 더 당겨야 하나 당겨서 높이 올려야 하나 지금은 때까치 소리 겨우 나를 당깁니다 너도개미자리풀이 너도 풀이냐 하고 너도밤나무가 너도 밤나무냐 합니다 무릇꽃이 무릇, 꽃이 피는 까닭을 알고 피겠습니까 버짐나무가 버짐을 알겠습니까 세상에 모르는 것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왠지 사람의 집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자꾸 올라갑니다  고층으로 올라간 몸이 마음 따라 하층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어느 땐 웃어도 웃어도 우울은 우물처럼 깊습니다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 바라기를 하고 하루살이는 하루로써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려 할 것입니다


               - 오래된 골목, 창작과비평사, 2003




해바라기의 비명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1914~1946)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시인부락』 1집의 권두시




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홍일표]





산에 있는 나무를 뽑아다 말 잔등에 심었다
수차례 말의 뒷발에 차여 나동그라지면서
말 잔등에 심은 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모두 혀를 끌끌 차면서
등을 돌렸다
등은 언제나 빙벽이었다
가까이만 가도 입이 쩍쩍 달라붙었다
도리 없이 빙벽을 빙수로 만들어
콩을 심었다
빙수가 다시 얼어붙기 전에 해바라기 씨앗도 뿌렸다
콩이 자라고 해바라기가 자라는 동안
모두 눈을 피했다
이것은 콩도 아니고, 해바라기도 아니라고 하였다
말이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푸른 콩 잎사귀 뜯어먹고,
담 옆에는 해바라기 우뚝 서서 내려다보는데
모두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멀쩡한 대낮에
누가 내 눈을 뽑아다가 하늘에 박아놓았다


                - 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천년의시작, 2007




내 마음의 惡魔 [홍영철]




꽃밭에는
채송화도 시들고
책상 위 꽃병에서는
해바라기 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처럼 꽃잎은
간간이 불어 오는 서풍을 따라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고
발끝에 채이는
지난 날들의 돌멩이.
너를 만나기 위하여
이 가을 빛 속을 가도
어디에도 너는 없고
어디에도 너는 있는데,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어제는 죽고 오늘은 죽고
사랑과는 또 다른
이 물 같은 사랑으로 죽어 갈
내일을 두고
즐거우냐?
내 마음의 조그만 惡魔야.
너는 즐거우냐?


            - 작아지는 너에게, 文學과知性社, 1982



만년필/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소갈병 [윤재철]




이제는 고흐가 싫다
한때는 그리도 사랑했으나
이제는 노랗게 불타는
해바라기가 싫다
비틀린 채 타오르는
측백나무도 싫고
그놈의 붉은 수염이 싫다

불이 쌓여 생긴 병일까
갈수록 목마름이 더해가고
물을 찾고
물을 들이키며
이제는 고흐가 싫다
그놈의 붉은 수염이 싫다

평생을 자신에게 성실했던 자여


             - 능소화, 솔, 2007




아웃사이더 감별하기 [이희중]



잘 나가는 폴 매카트니나 존 레넌보다는
그들이 불쌍해 마지 않던
음울한 조지 해리슨, 또는 못난 링고 스타를 더 좋아한 사람
해바라기의 보스 이주호보다는
그의 마음에 따라 자주 교체되던
짝궁한테 더 눈길이 가던 사람
비틀즈나 해바라기보다, 우연히 들른 술집
손님들의 잡담 너머에서, 그냥 켜둔 테레비처럼 노래한 다음
갈채 없이 슬며시 퇴장하는
삼류 가수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는 사람
또는 혼자 천천히 박수치는 사람

김일보다 장영철을 더 좋아한 사람
프로레슬링은 쇼다, 라는 그의 말을 믿은 사람
홍수환보다는 염동균을 더 좋아한 사람
말년에 그가 오른손을 접고 싸웠다는 사실을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는 사람
그들보다, 세미파이널을 피 튀기며 뛰는
삼류 복서들이, 또 그 세미파이널이
케이오로 일찍 끝났을 때에 대비하여
뛸 수 없을지도 모를 싸움을 준비하는 복서들이
있다는 사실을 더 진지하게 기억하는 사람

안정환보다는 윤정환을 더 좋아하는 사람
우리편이 골 넣었을 때
벤치에 앉은 후보선수들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프로 선수,
1군이 되지 못한 2군 선수들을 더 걱정하는 사람
현대차 안 타고 굳이 대우나 쌍용차 타는 사람
아주 옛날에는, 일등하던 오비보다는 크라운을 더 좋아했고
얼마 전, 크라운이 하이트로 일등하자 이젠 오비를 마시는 사람
대접받는 애완동물 보면 속이 거북한 사람
꼬리치는 것 보기 싫어 개를 안 키우는 사람
조세형이나 신창원이 잡히지 않기를 바라던 사람
이종대, 문도석, 그리고 지강헌 또는 비지스의 홀리데이
이런 이름들을 술자리에서 꺼내기를 즐기거나
누가 꺼내는 것을 반기는 사람
엄숙한 자리에 앉으면 사지가 뒤틀리는 사람
여간해서 넥타이를 안 매는 사람
평창동, 압구정동, 대치동이 남의 나라 같은 사람

학창 시절, 선생이 이름 기억해 부르면 불편했던 사람
반장 패거리보다 사고뭉치들과 어울리던 사람
자신이 바로 사고뭉치였던 사람
창간할 무렵에는 안 보다가 요즘 와서 한겨레 보는 사람
돈 먹여 아들 군대 안 보낸 사람은
대통령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군대 갔다온 사람
통일을 사심 없이 바라는 사람
이 세상이 뒤집혔으면 하고 가끔 바라는 사람
실현 가능성이 아주 없기 때문에 더 자주
더 편안하게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
아웃사이더이다, 아니다에 관심 없는 척하지만
이런 시 읽으면서 동그라미 치며 자신을 감별하고 있는 사람


                -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 2017




기린 [송찬호]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
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
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노래하
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웃자람을 막기 위해 어른들이 해바라기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을 때, 나는 그걸 내리기 위해 해바라기 대궁
을 오르다 몇 번씩 떨어졌느니, 가파른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
기를 잡아먹고 사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이제야
알겠으니,

  언제 한번 궤도 열차를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
어 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
리 한 가지 꺾어 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
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
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꽝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시(詩)의 족장을 보아라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 지성사, 2009




내 남자의 사랑법(法)[이미란]




돌아누운 그의 등줄기 사이로 마른바람이 분다
그 바람벽에 살을 묻고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온전한 그림자의 알몸을 그의 등에 비비며
축축한 암술로 돋아나는 회한을 가닥가닥 엮어서
그의 등에 암각 된 성난 슬픔의 뿌리를 토닥이다가
잃어버린 모성의 숲 내 비린 젖무덤 사이에
이 세상 가장 편안한 숨을 내려놓게 해주었던가?

미안한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내 남자의 등에 접혀진 얼룩무늬의 날개를 본다
나달나달하게 삭은 깊은 뒤란의 날개 속엔
오랜 세월의 먼지 속에서 골라낸 성근 햇빛과
달의 골수로 길러낸 사향노루의 주머니와
첩첩한 소금창고 속 항아리 밑에 묻어둔
그만의 황홀한 비문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맨홀 속 같은 그리움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별빛을 조명삼아 뒹굴어본 적이 있었던가?

미안했고 미안했던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밤의 창문이 가로등 불빛을 포개며 돌아눕는다
저만큼 밀려난 등과 젖가슴의 간격이 휑하다
그의 등을 타고 온 마른바람의 숲이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구석기시대처럼 멀고 먼
야생의 무덤 같은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서있다
거기 한 사나이의 꿈이 굽은 세월로 박혀있다
전생의 못다 푼 밀렵의 화살을 당기며
동굴 속 벽에 사향노루의 들판을 새겨 놓는다
거꾸로 도는 시계를 따라 해바라기처럼 퍼져가는

내 남자의 등에 매달린 빛나는 암각의 사랑!


              - 내 남자의 사랑법, 황금알, 2011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피었읍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읍니다
진달래꽃이피었읍니다
파주 연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읍니다
백목련꽃이피었읍니다
방배동 부자집 철책담 위로 피었읍니다
철쭉꽃이피었읍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읍니다
라일락꽃이피었읍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읍니다
유채꽃이피었읍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읍니다
안개풀꽃이피었읍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읍니다
망초꽃이피었읍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읍니다
수국꽃이피었읍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었읍니다
칸나꽃이피었읍니다
수도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읍니다
백일홍꽃이피었읍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 가에 피었읍니다
해바라기꽃이피었읍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읍니다
무궁화꽃이피었읍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읍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 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보았습니다
보고싶습니다


          -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Human&Books, 2010




다래헌일지[법정]




연일 아침안개
하오의 숲에서는 마른 바람소리

눈부신 하늘을 동화책으로 가리다
덩굴에서 꽃씨가 튀긴다

비틀거리는 해바라기
물든 잎에 취했는가
쥐가 쓸다만 맥고모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다

법당 쪽에서 은은한 요령 소리
맑은 날에
낙엽이 또 한 잎 지고 있다

나무들은 내려다보리라
허공에 팔던 시선으로
엷어진 제 그림자를

창호에 번지는 찬 그늘
백자 과반에서 가을이 익는다

화선지를펼쳐
전각에 인주를 묻히다
이슬이 내린 정결한 뜰
마른 바람 소리
아침 안개.

  
                         - 1969. 11. 9. 대한불교지




해바라기 연가 [이해인]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어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어
드릴 것은 상처 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 민들레의 영토, 가톨릭출판사, 2016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김상미]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불친절과 비틀림 너무너무 지긋지긋 징글징글해
나 혼자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 되기로 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방긋방긋 인사하고, 마치 친절나무인 양 그 열매
뚝뚝 따먹게 하고 싶어요.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불평, 불만투성이 모든 어두운 것들. 정말
지긋지긋 징글징글해요. 누구에게든 나눠주고 싶어요.

친절이 별 건가요? 사랑이 별 건가요? 무한정 뿜어내어  듬뿍듬뿍
주고싶어요. 원하는 대로 골고루 나눠주고 싶어요.

우는 소리 제발 그만 둬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으로 王처럼
女王처럼 숨쉬게 해줄게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친절한 마음, 光도 한 번 못 내보고 녹슬
어버리면 뭐하나요? 모두에게 골고루 다 나눠줄게요.

친절과 사랑이 무슨 몹쓸 狂氣나 되는 듯, 입 꽉 다문 쇠창살 같은
표정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요.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한세상 건
너간다 하여 人品이 인생에서 줄줄 새는 건 아니잖아요?

나 혼자서라도 그렇게 살래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 [젊은 시인들] 동인지 제5집 [낭만을 철회한다], 천년의 시작, 2009




해바라기[신현정]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
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올려서는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보이고는
내딴에는 우아하기 그지 없는
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 보는 것이다
그럴까
해를 먹어 버릴까
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
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
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


                 - 월간 『현대문학』(2009년 10월호)  




환한 방들 [김혜순]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2008




얼음을 주세요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 들어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 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빗속에서 [김은경]




집으로 향하는 성내천(城內川) 길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토끼풀과 나란히
비바람에 시시때때 꽃잎과 결별 중인
찔레나무와 나란히
눈 뜨고 잠든 돌멩이와
나란히 나란히

돌아보니 빗속을 이렇게
맨몸으로 걸은 기억이 없다 어느 저녁
피치 못할 소낙비를 맞으며
눈물로 한 사내를 기다린 적 있었으나
불손하게도 인생은 어차피
장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 때 있었으나
빗방울을 생애 단벌로 껴입은
토란잎처럼은 아니었다
황사 비에도 어김없이 제 초록을 키워 가는
청미래 이파리처럼은 아니었다
(슬픔의 연주 방식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니!)

눈 뜬 채 비 맞는
모든 맨몸은 매혹적이다
오디나무의 맨손 사마귀의 맨발
눈 먼 해바라기의 맨얼굴 그리고
나의 맨 처음, 그대
결코 회귀할 수 없는 물고기 같은 말
맨 처음……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기운 어느 저녁
우연히 마주친 비,
가랑가랑 고저장단을 맞추어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지금 오롯이 맨몸이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가 직립의 한 생애를
둥글게 감싼다


           - 웹진《문장》2008년 10월호




조용한 여름 [김개미]




어려서 잠에 빠지며 하던 상상처럼
내가 투명해진 걸까

들쥐는 어째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눈알을 닦으며 사람의 길을 가로질러가고
머리가 커다란 해바라기는 어째서
태양에 몰두하지 않고 바닥을 살피는 걸까

시계를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누가 음악을 들으며 지나간다
듣고 싶지 않은데 너무 잘 들린다
아는 노래인데 제목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안다고 하기에는 모르는 부분이 중요하다

저기 이름을 모르는 아는 사람이
개를 데리고 간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그와 개의 몸을 훑는다

가렵다
겨드랑이도 가렵고 발가락도 가렵고
귓구멍도 가렵고 눈알도 가렵다
다행이다 가려워서
몸은 긁으면 되니까
더러 나인 건 분명한데 어딘지 모르는 데가 가려운데
그때 가려움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자는 내가 아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긁고 있기에
여태 나에게 오지 않는 걸까

죽은 것도 아니고
좀비도 아니지만
또 살아났으니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있어보자
젖은 귀를 창문에 걸어 말리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미라처럼 누워 있어보자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나의 태풍이
도망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와 있다


                   - 작은 신,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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