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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채송화.

채 송화.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기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2007




밤의 가족어 사전 [이선이]




3음절로 된 단어를 고르는 중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카르마 karma
셋이 되었을 때 느끼는 어설픈 안정감
편안한 순간에 끼어드는 초조함은 각자의 것

숟가락은 어원을 알 수 없는 일인칭 고유명사
둘러앉아도 허기는 혼자 삼킨다

인생은 시가 아니다, 이것은
이번 생을 격렬하게 살다간 아버지의 관용표현
곁을 지킨 어머니의 속내인지 모를 일이지만
기댈 곳도 아랫목도 없었기 때문이랬다

강바닥 돌처럼 검고 젖은 단어들 하나씩 줍다 보면
말의 어두운 난간에 매달린 벼랑의 발끝 느껴져
시도 인생도
아버지보다는 한 끗이 빠진다

담장 밑 자운영도 채송화도
봄을 다 치르고서야 건네받는 물 많은 복숭아도
단정할 수 없는 빛깔과 향기로 3음절을 고수하고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 그러나 다르마 dharma
셋이 모여도 일인용 베개 위에서
다르고도 같은 어둠을 베고 눕는다

이 사전에는 감정어가 지워져 있다



              - 문학과의식,  2019년 봄호




채송화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었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맨발 [박서영]




울음의 엔진은 발끝에 있다
채송화 꽃 앞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도
해바라기를 올려다 보는 여자도
발끝에 온 힘을 집중한 채 울고 있다
발가락들은 찢어진 꽃잎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심장에 뿌리 내린 채
꽃의 갈기를 흔들어댄다
열 개의 음표를 말없이 주무르다 보면
음악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데
눈물은 내려 채송화를 적시고
때론 솟구쳐 해바라기를 적신다
심장이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을지
돌아온 심장은 처음의 그것이 아니다
발가락이 운다
달과 태양까지
별의 구멍까지 쏘다닌 마음을 달래듯
울음의 시동을 부릉부릉 걸고 있다
맨발로 돌아와 잠든 뿌리여
안아주려고 했더니
오므렸다가 터졌다가 피었다가 졌다가
도무지 가만 있질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밤에 자라난 것들
씩씩하게 혼자 울기 시작한다


           -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




여우비 [강유정]




낮잠의 밖으로
여우비는 얼마나 올까
이 세상 구겨놓은 이력서 몇 장
하루이틀 등짐 진 블록담 아래
마지막 붉은 귀의 채송화 몇 송이
"속임수의 술잠에서 깨어나서"*
지워졌다 새겨졌다 비 오는 거기까지


*청淸의 화가 費丹旭비단욱의 夜雨圖야우도의 畵題화제에서.


               - 네 속의 나 같은 칼날, 문학과지성사, 1995




정선 아리랑 - 두 분 형에게 [함성호]




형님, 나는 갑니다
세상 술 모두 마셔버리고 허리
꺾이도록 시린 춤 한번 추자던
약속 지키기 위해 갑니다 가요
진흙탕 여울물 위에
가래침 탁탁 뱉으며 갑니다
채송화 돼지감자 캐 먹으며
파도치는 해변에서 뛰어놀던 때가
좋았어요 바람과 바다에 불 놓고
도망쳐나올 때 알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그 이상한 부끄러움 뒤의,
사랑한다는 그 깊은 절망을
체득하고 말았습니다
파도가 등 떠밀고 있습니다요
가라, 가마, 가자고
형님, 그 부름대로 나는 갑니다
의혹의 빈 난은 그대로 두시고
백백한 정선 아리랑
소나무 울음처럼 불러주십시오
그 바다에 눈 내릴 때까지
먼 산에―――억수장마 질 때까지요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문학과지성사, 1993




오십미터 [허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 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2016




내 마음의 惡魔 [홍영철]




꽃밭에는
채송화도 시들고
책상 위 꽃병에서는
해바라기 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처럼 꽃잎은
간간이 불어 오는 서풍을 따라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고
발끝에 채이는
지난 날들의 돌멩이.
너를 만나기 위하여
이 가을 빛 속을 가도
어디에도 너는 없고
어디에도 너는 있는데,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어제는 죽고 오늘은 죽고
사랑과는 또 다른
이 물 같은 사랑으로 죽어 갈
내일을 두고
즐거우냐?
내 마음의 조그만 惡魔야.
너는 즐거우냐?


              - 작아지는 너에게, 文學과知性社, 1982




격포우중格浦雨中 [서정주]




여름 해수욕이면
쏘내기 퍼붓는 해 어스럼,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
변산 격포로나 한번 와 보게.

자네는 불가불
수묵으로 쓴 싯줄이라야겠지.
바다의 짠 소금 물결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어
벼락 우는 쏘내기도 맞어야 하는
자네는 아무래도 굵직한 먹글씨로 쓴
싯줄이라야겠지.

그렇지만 자네 유랑의 길가에서 만난
사련邪戀 남녀의 두어 쌍,
또 그런 소질의 손톱의 반달 좋은 처녀 하나쯤을
붉은 채송화 떼 데불고 거느리고 와
이 뇌성 취우의 바다에 흩뿌리는 것은
더욱 좋겠네.

짓이기어져 짓이기어져 사람들은 결국
쏘내기 오는 바다에
한 줄 굵직한 수묵 글씨의 싯줄이라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채송화들에게
예행연습 시켜야지.

그런 용묵 냄새 나는 든든한 웃음소리가
제 배 창자에서
터져 나오게 해 주어야지.


*편집자주- 시집에는 `한 줄 굵직한 수묵 글씨의 싯줄이라야 한다는 것을'이 `짓이기어져...' 앞에 배치되어 있으나 첫 발표지인 <창작과비평>(1975. 가을)에 발표된 형태를 따랐다.


               - 떠돌이의 시,민음사, 1976




다녀왔습니다 [장이지]
-한양호일(漢陽好日).7




  인생이 비극적이라고 느낄 때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러 갑니다. 노란 꽃다지 핀 제방. 초록 공원길 별들이 하얗게 헤엄치는 강물에 이야기 전설같이 잦아드는. 거기 노래를 흘러보내러 갑니다.
  가족들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외톨박이. 구르고 굴러 달동네. 닳고 닳아 하얀 조약돌. 이래봬도 레벨 만오천의 흑기사. 이래봬도 연애 십 단. 이래봬도 줄담배.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힘을 내세요.
  패션은 후져도. 얼굴은 후져도. 월세 십만 원에 잠만 자는 방이어도. 짐이라곤 옷가방 하나라도.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기운 내세요.
  풍금을 울리며 그 옛날 유년의 노래를 부르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엔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강물은 서럽게 은빛으로 뒤채고 그 너머 아버지 얼굴, 웃음 번지고.사랑합니다. 너덜너덜한 인생이어도.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강물 너머 반짝이는 아빠의 금이빨.


                 - 연꽃의 입술, 문학동네, 2011




사철 채송화 [김용오]


요즘 내가 살면서 한 것 중에 그래도 자랑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후덕한 장봉도 민박 아줌마로부터 진한 갯벌 냄새로 포장을 한 너를 몇 그루 분양받은 일이었다. 찬바람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고 줄기를 잘라 아무데나 꽂아도 쑥쑥 잘 자란다는 타고난 성품이 좋아 쓸쓸하고 적막한 내 가슴뜰 한구석에 등불을 달듯 한 번 쯤 몰래 옮겨 심어 보려고

너를 몇 그루 가족으로 받아들인 일이었다


            - 맑은 시 동인시집, 새김, 2013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김소연]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들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러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나는 내안에서 여러 개의 별을 건너다니며 [이태선]




국수 한 입을 빨 때
천막이 펄럭 할 때

앞집 학생이 악다구니를 쓰며 자라고
피아노소리가 공중에 삐뚠 층계를 올리고
가로수가 집을 덮고

나는 턱에 종기가 돋고 코가 가려워
강물아 너의 시간은 몇 시나 되었느냐?
나는 내안에서 여러 개의 별을 건너다니며

오늘은 이리가 물크러진 채송화를 핥았어요
파도가 나를 다듬어요 일그러진 한쪽을 치면
또 한쪽이 어긋나요

집 앞을 작대기로 후려친다
유리병이 공중에서 떨어진다
늘 그런 식이예요


              - 딩아돌하 2012. 겨울호




나무 [곽재구]




인간인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움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모르는 이들은
만행 중인 바람이
나무의 심연을 헤적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무는 제 앞에 선 인간에게
더덕꽃 향기 짙은 제 몸의 음악을
고요히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춤을 출때
잎사귀 하나하나
다른 춤의 스텝을 밟는다
인간인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다가 홀연 당신 또한
온몸에 푸른 실핏줄이 퍼져나간 은빛 이파리가 된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
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
눈보라가 되거나
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먹기와집 마당을 뒤덮는 채송화 꽃밭이 된다


                - 와온 바다, 창비, 2012




허물어버린 집 [문충성]




허물어버린 집이 요즘
꿈속에 나타나 온다
할머니 어머니가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허물어버리면 안 될 집을 허물어버렸다
그 할머니 어머니 꿈속에 없어도
그 집이 꿈속에 나타나 온다
대추나무
감나무
당유자나무
산수국
매화나무
후피향나무
동백나무
채송화 몇 그루
저 멀리 혀 빼물고 헬레헬레
진돗개 진구가 나타나 온다
시간이 사라져 없는 풍경 속으로
오늘도 들어가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풍경이 된다 어느새


            - 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사, 2011




채송화 꽃[김유신]




아-하! 시원타!
가을 뜨거운 볕살에도
농부는 벼이삭 잘 익게 한다고
하느님 노염을 사게 된다고
아-하 시원타 시원타! 하는
볕살의 화음으로
채송화 꽃은
빨강. 노랑. 분홍. 주황.
장독대둘레에 활짝 피어서
농부들의 합창을 한다.
새참준비 오누이 올가을에 시집 날 잡아
함박웃음처럼
까르륵 까르륵 웃음이 피었다.
가을 뜨거운 볕살에
합창으로-


           - 청류재 시편, 시선사, 2019



관계, 물들다 - 솔에게 [이승희]




햇살에 잘 마른 광목이 마당 가득 펄럭이는 여기는 너의 하늘정원
꽃잎만한 어깨선 위로 채송화 은빛 씨앗 같은 눈을 뜨고
종일 달빛보다 깊은 노래 부르네.
손가락 마디마디 과자 냄새, 볼에 입 맞추면 복숭아 두어 개 둥실 떠올라
한입 베어물면 까르르 강물 지는 세상.

너의 눈썹을 타고 그 끝에서 새들 무수히 날아가고
붉은 꽃잎 따서 네 열 손가락 물들이면
손가락 끝에서  점점 커지며 자라나는 동그라미 하늘에 올라 뭉게구름 되고
나도 그 꽃잎을 따라 네게 물들거나 구름 위로 몸을 누인다
물든다.
물든다는 거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 그 투명한 방 속에 간장 종지 같은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살림을 차리는 거라네. 그 방 속에 산을 들이고 하늘을 들여 한세상 가만히 걷는 것이야.

들리지 않니?
세상천지에 불 켜는 소리, 달이 둥글게 돌아 네게로 오는 소리.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 2006




과수원 [박주택]




   애인아, 남겨진 기억을 모아 전철을 타고 강남역에 내려 5번 출
구로 나오렴 그러면 새로 들어선 외환은행 빌딩이 있고 뉴욕제과
가 있지 그 뒤 샛길로 걸어나오면 기억하겠지,   드높게 개인 하늘
아래 온갖 들꽃이 피고 과수원이 언덕에 비스듬히 누워 흰구름을
읽는 곳


   너 떠난 후 술집이 들어서고 호텔과 PC방까지 들어섰지만 네
가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땐 미루나무 아래 냇물의 물
풀 사이로 오가는 稚魚치어를 따라 박 넝쿨과 호박 넝쿨이 우거진 마
을의 집들 사이를 걸어오렴 혹 다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면 벼가
팬 들판에 서서 이마에 밴 땀을 닦고는 소금쟁이의 노래에 잠시
귀라도 열어두렴


  변해서 밀려나간 것들이 소리지르는 격정이 들리느냐,  다들 자
기 목숨이 있어 저토록 딱딱한 절망을 밖으로 발라내고 변한 것
들은 내 엽서 속의 멍든 글씨마냥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한
다  애인아,  네 갈피를 붙들고 너를 그곳에 머물게 하는 네 설렘의
흔적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떠난 후 내게 남겨진 저 새로 생
겨난 불꽃들을 軍團군단처럼 과수원을 건너 들판을 건너 내 방의 창
틈까지 스민다  밤이면 번지는 개울물 소리도 덩달아 들떠 네 떠
도는 사랑처럼 뒤척거린다

   애인아,   네 있는 자리 향기 가신 그 자리 혹 슬픔은 슬픔대로
부글거릴라치면 평상에 앉아 깎아 먹던 과수원의 사과와 마당에
하늘거리던 봄날의 채송화를 기억하라  네 뿌리가 되어주던 뒷산
의 자작나무 숲에서 네 온다는 기별를 알리면 나 와이셔츠를 다
려 입고 마을 입구 느티나무 지나 들꽃 사이 자전거를 타고 너 맞
으러 가리라


                    - 2003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겨울, 채송화씨 [김용택]



아내는 나를 시골 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득 발자국을
꼭꼭 찍어본다. 이 마당에서 벌거벗고 뛰어 놀던
내 형제들과 이웃 아이들의 벌거벗은 웃음 웃음소리 대신
어머니는 해마다 발 디딜 곳 없이 마당 가득 화려한
채송화꽃을 피워놓는다.
정말 환하다. 달빛은 환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나무만을 따로따로 달빛 아래 세운다.
달빛은 모든 것들을 떼어놓고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그렇게 보여준다. 물만 흐를 줄 안다. 발밑에서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까만 채송화씨들이 세상을 걷느라 두꺼워진 내 발바닥
깊은 속살을 찌른다.
씨만이 세상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들을 거둔다.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이 간단명료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거짓 없는 사랑은 현실이다.


이 세상 모든 살구멍이 열리고 뼈마디가 허물어져내리는 사랑을
나는 안다.
시를 써야지.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일하는 사람들이 꽃이 된다.
고된 노동으로 이룬 따뜻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자고 싶다.
어머니의 깊은 잠만이 나를 깨울 꽃이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깔려 잠을 자던 내가 창호지 문지방에서
꼬물거리는 겨울 벌레 소리에도


눈을 뜬다.
낡은 내 몸
어디에
새로
뚫릴
귀와


눈이 있었는가. 나는 깨끗하게 죽을 것이다.
내 죽었다가,
수백 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던
내 청춘의 오래된 이 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달빛으로 죽는다.
저 황량한 거리,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모든 거짓 사랑과 예술 속에서 미련 없이 걸어나와
누구도 닿지 않는 먼 잠을 자리.
저 물소리 끝까지 따라가 잠자는 겨울 채송화씨,
그 끝에서 나는 자고 깨어
그리운 우리집 마당에 채송화꽃으로 오리.


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거짓뿐이니. 너를 따라온 모든
낡은 길들을 거두어라.


            - 계간 문학동네-1999년 봄




질투 [김상미]




옆집 작은 꽃밭의 채송화을 보세요
저리도 쬐그만 웃음들로 가득 찬
저리도 자유로운 흔들림
맑은 전율들을

내 속에 있는 기쁨도
내 속에 있는 슬픔도

태양 아래 그냥 내버려두면

저렇듯 소박한 한 덩어리 작품이 될까요?
저렇듯 싱그러운 생 자체가 될까요?


               - 검은 소나기떼, 세계사, 1997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별드는 볕드는 大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마을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창작과비평, 200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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