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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제라늄.






제라늄처럼 [황혜경]




그리 쉽게 병들지 않는다고 해서 받았다 그리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데 까맣게 타들어가고

  아껴 써야 하는데 먹는 속도가 곰팡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자주 버렸다 버리는 나를 버릴 수 없기도 해서
독서와 식사의 습관을 되찾아야 하는데

  제라늄은 장식적이고
  에둘러 말하곤 해왔는데 다시는 안 그러려고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잠들 수 없어 무엇으로든

무르기 시작하는 줄기들

꽃의 이미지에 기대어 질이 필요한 것들이 있지 질이 비현실적으로 거쳐서 지나가면서 끝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통과할 수도 없으면서 생식生殖을 대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그런 거라면
등을 돌리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 손잡아줄게

  지금은 눈앞에서 잠시 사라져야 할 때
  질문하는 자가 보이지 않고 대답도 들을 수 없고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 없는데

  얼룩지고 찢어지는 꽃잎들

  제라늄은 장식적이고
  제라늄은 여러 빛깔로 화려하고
  두 팔을 벌려 이제 허공이라고 부를 것들을 안으면
  진딧물은 진딧물이고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를 찾는 일들이
  제라늄처럼


                - 나는 적그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




꽃의 슬픔 [박희수]




기쁨이 없다면 이 꽃들이 다 시들 텐데
그때는 또 무엇으로 뜰을 가꾸시겠어요?
불쌍한 글라디올러스, 제라늄과 안개꽃.

슬픔이 없다면 꽃들이 향기를 잃을 텐데
그때는 또 무엇으로 코를 즐겁게 하겠어요?
불쌍한 글라디올러스, 제라늄과 안개꽃.

아픈 아침
천천히 물처럼 스며드는
이 햇빛을 몸에 바르며

기쁨이 없다면 꽃들이 시들 텐데
그러면 누가 죽은 꽃들을 위해 흐느끼겠어요?
누가 머리에 화분을 얹고 찾아와
낮게 얼굴 숙이며 어두운 꽃잎들을 토하겠어요?

그리고 코가 듣는 노래는 어디로 가나요?
누가 받아줄 코도 없이 슬퍼할까요?
불쌍한 글라디올러스, 제라늄.

분수처럼 핀 안개꽃.


                - 물고기들의 기적, 창비, 2016




제라늄 [이규리]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 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도 이젠 꿈인데

닫아두어도 남는 마음이란 게 뭐라고

꽃은 붉고

비 맞는 화분에 물도 주면서 말입니다


           - 계간 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호




가자미, 하나 * 가자미, 둘 /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  




가자미, 하나

목록들과 동사들은, 당신을 많은 곳에 데려다준다.

모방하느냐, 모방하지 않느냐―이 질문의 답은 쉽게 얻
을 수 있다. 모방하지 않는 것의 위험이 모방하는 것의 위
험보다 크다.

늘 기억하라―말은 말하는자가 하는 게 아니다. 말이
하는 것이다.

동사들의 근육을, 형용사들의 엄정함을 추구하라.

아이디어가 말 word들을 몰아야 한다. 말들이 아이디어
를 몰면 솜, 억지 해석, 공들임, 공기 방울, 불순물, 겉치레,
유행에 뒤진 여자, 매춘밖에 되지 못한다.

시를 덮을 때는 펼칠 때와 달라야 한다. 당신 이름이 블
레이크이고 호랑이에 관한 시를 쓴 게 아니라면.


                      *

가자미, 둘


개의 소리가 개울에서 첨벙거린다.소년 같지도, 물고기
같지도 않다, 정확히 벤답다.

나는, 이른바, 슈만의 음악과 울프에 미쳐 있다.

비명, 그리고 뽑힌 못의 행복. 그것은 햇빛 속에서 다시
얼마나 깜빡이는지.

세상은 돈다, 안 그런가? 변화가 우주를 지배한다, 안
그런가?

삶은 있고 오페라가 있다, 그리고 나는 둘 다 원한다.

벤, 들판을 빙글빙글 돈다. 그는 코에 온 우주를 담고 있
다.

셸리들. 그들은 이상들의 실개천에서 살았다. 그들은 숨
어 있는 끔찍한 운명과 함께 살았다.

거미: 싱크대에서 나와 제라늄 속으로. 나는 그걸 잊고
제라늄에 세차게 물을 준다.

어째서 방울새를 믿지 않는가. 엉겅퀴도.

내가 지켜보는 동안, 파리가 벤의 덥석 무는 입으로 들
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들어갔다.


               - 긴 호흡,마음산책, 2019. (민승남 옮김)




이파리의 저녁 식사 [황병승]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 인형
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 에 앉아 열심히 삼십 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
이에요

사람들과 방금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틀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 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사, 2012




우야꼬 [서수자]




너무 예쁘다고 무성생식無性生殖하는 귀한 종이라고
나중엔 감당이 어렵다고 친구가
은박지에 싼 어린 만손초를 보내왔다
자손만대 할 때의 그 손孫이었다

넓은 화분에 심으라고 해서
직경 한 아름이나 되는 하얀 도자기 화분에 심었다
잎 가장미다 꼬불꼬불 프릴을 귀엽게 달더니
누운 8자가 선 8자 프랙털로 촘촘히 박히더니
실뿌리 같은 것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萬孫만손을 낳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 비어 있는 제라늄 화분에 살림을 차린 녀석도 있다
이주할 번지를 찾고 있는 저 번뜩이는 만 개의 눈 좀 봐

두드러기가 돋듯 온몸이 근지러웠다
우야꼬, 저 지칠 줄 모르는 기관차를 누가 좀 멈춰줬으면
상속이 이토록 무서운 것

무연히 어떤 죄가 떠오르고
"죽은 당나귀는 하이에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을 밟고 뛰어나오던 옛날도 생각났다
우야꼬, 저 지악스러운 만 개의 손아귀들

* EIDF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


               - 아주 낮은 소리,천년의시작, 2018




김수영문학관에서의 일일  [김은경]




도피가 필요한 날씨였다

액자 속 시인의 얼굴은 무표정
“은경 씨, 나중에 꼭 김수영문학상 타요”
누군가 진지한 톤으로 농을 했다

길쭉하게 네모난 창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건물 앞 제라늄이 목숨 건 열애처럼 붉어
목이 탔다

커피와 팥빙수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물과 기름이
지상의 냄비에서 한창 끓고 있었다

뜬금없이 비가 내렸다, 여름이니까
여긴 땅 위니까

그 저녁 찾아간
단골 곱창집은 문을 닫았고
순댓국집에서 소주를 부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주는 밥인 줄도 모르고

이번 생 펼쳐 든 차림표에는
내가 외쳐 부를 이름이 없다는 걸
미처 모르고

챙겨간 우산을 기어이 식당에 두고 왔다

전철을 탔다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울지 않았다
5호선에도 6호선에도
종착역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은
밤이었고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다*

* 에밀리 디킨슨의 시




제라늄 [박진성]




꽃잎에 수천 톤 욕망이 앉아 있다
육중한 신체가 타오르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 여린 불기둥
아서라, 꽃잎에는 아무것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한 잎 먹으면
피가 잘 돌겠다

가까스로 사랑의 입구에 서 있다


            - 식물의 밤, 문학과지성사, 2014




몰라몰라 행성 [함기석]

            


큰아이가 몰래
달의 분화구에 노란 수면제를 탔나 보다
달빛 마신 꽃밭도
강아지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뒤척이는 제라늄 눈을 바라보며 자장가를 부르다
나도 약에 취해 잠든다

내가 잠든 사이 작은아이가 몰래
우주 저편 알파켄타우루스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었나 보다
어두운 공중으로 반짝반짝 트럭이 달려오고
외계인 인부 둘이 나를 옮겨 싣고
뒷자리에 앉아 홍주를 마신다

나는 부피 제로 무게 제로
길이가 8만 광년인 바나나 대장경 꿈을 꾸고 있다
트럭이 멈춘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나는 눈을 뜬다
꽃밭도 집도 강아지도 보이지 않고 사방은 캄캄하다
여기가 어디요?

몰라몰라!
만취해 코가 빨개진 외계인 인부가
시간을 녹여 발효시킨 이상한 술을 권하며
머나먼 지구를 가리킨다
코딱지만 한 옥상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아빠 안녕! 굿바이!


               -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민음사, 2020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류인서]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그의 손목은 시간을 잡아당기는 무거운 구리 문고리
   그의 손목에서는 숨가쁜 말굽소리가 났다
   그의 손목에서는 매일 노오란 해바라기꽃이 피었다 졌다

   신생의 아이들이 바구니 속에서 울어 보채는 동안
   화분의 제라늄이 비릿한 비염의 코를 베어내는 동안
   그는 얼룩진 메트리스를 창문으로 끌어내 마구 두들겨 패고 있다
   여자보다 더 많은 수의 시계가 그의 손목 안팎으로 꽃피며 지나갔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격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느닷없는 사랑의 복면도 만났다 여우와 신포도도 보았다 깨진 무릎으로 찿아가는 아주 낡고 오래된 모서리도 보았다
  그는 흰 사슴도 보았다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그의 눈을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정신없이 팔을 휘둘렀다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계들을 잠재우지 않으려

  한때 그에게 단단히 손목 잡혀 있던 시간들이 이제 그의 손목을 되잡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현대시 2006년 4월호




아버지의 방 [이규리]



식구들은 어느새 아버지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방의 제라늄이 물기 없이 견디는 건
아직도 자를 대고 한 치 삐뚤지 않게 밑줄을 긋는
아버지의 독서법 때문이다
밑줄 친 문장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활자의 식구들,
활자의 피들,
아버지의 방은 흘러간 유행가처럼
과거의 시간들만 거울에 반사되어
아버지의 읽는 현재란 언제나 과거이다
내 삶의 곳곳에 밑줄을 그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밑줄을 빠져 나오지 못한
욕망들이 울며 잠들던 때
퉁퉁 부은 내 아침은
겉절이 된 배추처럼 고요했으나
아무도 모르게
물주름으로 쌓았던 희망
은단풍잎처럼 뒤가 바랠 때에도
아버지 밑줄을 풀지 않고
몰래 괄호 밖으로 뺘져 나온
나의 할자들 우는 소리
아.버.지.배.가.고.파.요.


             - 앤디 워홀의 생각, 세계사, 2004




헤비메탈을 들으며 [김경미]



-선배도 이젠 고상한 음악 좀 들으세요
나이도 있는데......온 국민이 다 재즈 팬인데......


돌아와 또 메탈 볼륨을 올린다 드럼 채가 튀어 식탁을
두드리고 신발장 안의 구두들 일제히 날아오른다
미안하다 이웃들이여 나 진심으로 그대들 사랑한
적 없다 서로 사랑하지 말고 묵묵히 멀리 있자고
그것만이 진실된 사랑이고 노래이리라고
나 또 이렇게 시끄러운 볼륨을 높이니


고백건대 국산도 말고 외제 메탈만 듣는다
멀리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상처가 되지 않는 거리
라벤더와 제라늄 식의 명칭들
고백건대 저녁 무렵이 되면 신데렐라처럼
소리치고 싶어진다 돌아가야 해요 난 실은
사람이 아니에요. 난 식물이란 말예요!


매일 몇 마디씩이라도 한느 내가 때로 시끄러워
견딜 수 없는 침묵과
슬픔과 내향만이 내가 아는 메시아이므로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나는 무겁고 묵묵하게
그 고요하고 슬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식물처럼 깊어질 때까지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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