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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사라지자 / 이 병률 시




마취 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이 병률 시 ‘사라지자’모두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 23년 전에 ‘만성신부전’으로 퇴근길 버스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그리고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이런 큰수술은 처음이라 속으로 나를 다독이며 수술실에 들어가 온통 하얗고 밝은 빛속에 빠져 들었다. 몽롱함 속에서 수면 속에서 깨어날 것인가 그냥 갈길을 갈것인가 하는 우스운 망상속에 마취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세상은 원래 바다 였다고 한다. 죽으면 한줌의 흙이 되어 바다나, 산에 뿌려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바다나 한줌의 흙이 였다고 하니,, 흘러 흘러 바다로 뿌려지거나 좋아하는 한 산의 골짜기에 한줌의 흙으로 뿌러지면 ,,, 원래의 본향으로 가는 거겠지.


아직, 살아있는 나는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바다처럼 넓고 산처럼 깊고 높아 진다. 다시, 투석실의 바늘이 날카롭게 내 무의식을 찌를때... 현실의 나로 깨어나고, 망상이 사라지자, 삶이 생생하게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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