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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이별이 나에게 만나자고 한다.




얼굴 [이병률]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바다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얼굴에 얼굴을 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 [이병률]


그때 난 인생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인생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어른들이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거나
어쩌면 나이들어서나 의미를 갖게 되는 말인 줄로만 알았으며
나는 영원히 그때가 오게 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해줄까
언제나처럼 나에게 그렇게만 물어오던 열한시였는데
예고 한 번 없이 인생이 여기 구석까지 찾아왔다





슬픔이라는 구석 [이병률]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숨 [이병률]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랑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 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내고
창밖으로 펼쳐진
텅 빈 세기(世紀)의 뒷모습을 기록하려 애썼다
친구에게 부쳐도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는 국제엽서는 처음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이병률]


당신 방에 앉아 침대 옆에 놓인 시집을 읽습니다

당신이 비운 집
한쪽에 놔둔 식물에 물을 주라 하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누워도 봅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술 한 병 꺼내 마셔도 좋다 하였기에

술만 마실 수 없어 달걀 두 개를 삶습니다

아, 희미한 삶의 냄새
이 삶은 달걀을 어디에 칠까요
무엇에 부딪쳐 삶을 깨뜨릴가요




* 오늘은 이병률 시인의 새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에서 마음에 와 닿는 5편의 시를 골라 적어 보았습니다. 시 한편, 한편이,, 당신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며 고단한 삶에서 한줄기 눈물로 삶의 아픔을 씻어 내 주어,, 좀 더 삶에 담대 하시길 기원 해 봅니다.

9월 한달은 참으로 지루하지만 삶의 하루 하루가 고난 하였습니다. 어제는 가까운 병원에서 독감예방 접종을 하였습니다. 병원에 들릴때마다 보이는 어떤 초조함, 그런 얼굴들을 뒤로하고 나와서는 “ 무얼 아점으로 먹어야 할까?”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나를 보며 웃었습니다.

‘병원 투석실- 사무실 - 집’ 을 무한 반복하며, 이제는 가을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가로수의 잎들이 반쯤 떨어져 내리면,, 사무실에서 가까운 경복궁 뒷길을 걸어가 보아야 갰습니다. 향이 진한 커피 한잔도......,


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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