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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안 주철 시 / 불행에 대한 예의




경주 계림 앞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을 때 나,
세상에서 잠깐 지워졌던 것 같다

아내는 계림을 등지고
나는 들판을 등지고 서로 안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었을지 모른다

만만하게 생각한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아서 헉헉거릴 때
나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내는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간신히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안았던 것은 어쩌면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내는 혀를 내밀며 아줌마가 되지만
오래전 나는 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고
아내도 아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생,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맞닥뜨린 시시하고 아름다운 불행들,
내 생이 저물어도 시들지 않겠지


- 안주철 시 ‘불행에 대한 예의’모두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문학동네, 2020.




* 지금 와 생각해보면 ‘불행하다’라고 느낀적은 없었던거 같다. 조금은 우울한 시기가 있었으나, 까짓거 하는 생각으로 ‘가오’를 스스로 세우며 살았던것 같다. ‘가오’란 내가 뻣뻣이, 무표정하게 세우는게 아니라 스스로 삶의 단련속에 자연스럽게 ‘서는 것’이란걸 몰랐던것 같다.

시인의 말처럼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하는 말에 동감이지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장마에, 코로나19에 숨이 막혔나 보다. 뜨거운 우동에 고추가루를 확 풀어 쓴소주에 한잔하고 싶게 하늘은 어둡다. 또 비가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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