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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주목나무 -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 미안하다 4 [이희중] ―어린 주목(朱木)에게 내 마음이 어떻게 너에게 건너갔을까 나는 그저 네가 사는 자리가 비좁아 보여서, 너와 네 이웃이 아직 어렸던 시절 사람들이 너희를 여기 처음 심을 때보다 너희가 많이 자라서 나는 그저 가운데 끼인 너를 근처 다른, 너른 데 옮겨 심으면 네 이웃과 너, 모두 넉넉하게 살아갈 것 같아서 한 여섯 달 동안, 한 열흘에 한 번 네 곁을 지날 때마다 저 나무를 옮겨 심어야겠네, 라고 생각만 했는데 네가 내 마음을 읽고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네가 스스로 자라기를, 살기를 포기할 줄 몰랐다 박혀 사는 너희들은 나돌며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성가시겠지 손에 도끼를 들지나 않았는지 마음에 톱을 품지나 않았는지 다른 까닭이 더 있는지, 사람인 내가 짐작하기 어렵지만 미안.. 더보기
메타세쿼이아나무 메타세쿼이아나무 아래서 [ 박라연] 메타세쿼이아 그대는 누구의 혼인가 내 몸의 뼈들도 그대처럼 곧게곧게 자라서 뼈대 있는 아이를 낳고 싶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빈 가지를 흔든다 주고 싶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 슬픔을 흔들어 털어버리기 위해서 못다한 사랑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툭툭 잎이 되어 푸르고 누구든 썩은 삭정이로 울다가 혼자서 영혼의 솔기를 깁는다 내가 내 눈물로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가 되었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 빗물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지만 달려가 그대의 잎이 되고 싶지만 나누지 않아도 함께 흐르는 피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른다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1993 아깝다 [나태주] 교회 앞 비좁은 길에 높다라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 처음 교회를 지은 목.. 더보기
모과 나무. 언제나 며칠이 남아있다 [위선환]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 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 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모과나무 가지에 허옇게 서리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걷고 있을 것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 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글어지는 며칠이 또 .. 더보기
배롱 나무. 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더보기
매화 나무. 그늘을 캐다 [임혜주] 매화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줘서 네 상심을 조금 캘 수 있었다 수보리야 부처를 보았다 할 수 있느냐 후우 호로롱 새 울음 몇 마디 얹고 일렁이는 달맞이 분홍 바람도 함께 올려서 대야에 담는다 왼손 끝에 딸려 나오는 자잘한 꽃망울들 상심이 이런 꽃이었단 말이냐 호미를 풀밭에 버려두고 일어나니 아찔한 햇빛 속이다 -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천년의시작, 2023 매화, 흰빛들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질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 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 더보기
산수유 나무. 삼월의 속수무책 [심재휘] 초봄날 오전, 내게 오는 볕의 마음은 그 생김이 ㅁ 같기도 하고 ㅇ 같기도 해서 지루한 햇살을 입안에 넣고 미음 이응 우물거려보다가 ㅁ과 ㅇ의 안쪽을 기웃거려보다가 기어이 낮술 몇 잔으로 밑이 터진 사람의 마음을 걸치고 사광에 늘어진 그늘 가까이 이르러서야 빛으로 적막한 삼월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서둘러 활짝 핀 산수유 꽃나무가 제 속을 뱉어 어룽대는 그늘을 먼발치에도 오래 드리우는데 그 노란 꽃그늘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안팎으로 드나드는 ㅁ과 ㅇ이 저런 풍경이라면 누구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본 적 없는 두 발 단 것들은 속수무책이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은어 [함명춘] 햇볕의 길이 서면 온다 바다쪽으로 한쪽 어깨.. 더보기
자작나무 2.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1996)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정끝별] 유난히도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우내 心身蟲에 나무 몸 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더보기
새해,,. 2024년에 덧붙여, 백야 [최재원] 새해가 밝, 발, 밖, 박, 았습니다 눈보다 손이 먼저 부셔요 손보다 찌르르 젖은 마음이 부셔요 너를 입(에 넣)고 굴릴 때 혀가 먼저 부셔요 부셔요 부셔요 시고 부신 너(들) 구름이 해를 찢어 놓습니다 갈래의 해도 하나의 해이니 하얗게 얼어 영원히 젖은 파도만이 꾸역꾸역 다가옵니다 해도 구름도 파도도 쉬지를 않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 참 우리는 집이 없어요 갈래에 무리에 보라에 잠깐 머물까요 우리? 해 해 해는 너무 밝, 밖, 발, 박나요? 나는 그들 그들 그들이라고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잘 모르니까 우리 서로 아는 체는 말아요 아니 우리 누일 데 없는 몸을 해 위로 겹쳐요 차가울수록 두께 없는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어요 사위어 가는 사이의 모든 것들의 트랜스 오늘도 오지 않는 오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