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숲에 들다

녹을 닦으며-공초14/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색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 허형만 시 '녹을 닦으며-공초(供草)14' 모두

 

 

 

* 이 작품은 모두 65편으로 이루어진 '공초(供草);조선시대 형사사건에서 죄인의 신문 내용을 기록한 문서' 에서

전봉준(全捧準)공초를 작품화 했다. 시인은 "이 시대에도 참된 삶을 위하고, 눈물겨운 희망을 위하여,,(중략) 비록

역사는 산골짜기는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깊이 깊이 골이 패인 이 시대의 골짜기마다 뿌리내린 가녀린 실피줄을

확인하고 사랑 하리" 라고 적고 있다. 아프다, 한편의 시가 시집 전체보다 무거운 시를 읽는것은 괴롭다.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자미상/모험이다  (2) 2010.07.15
만약에...  (0) 2010.07.03
절벽/공광규  (0) 2010.07.01
눈사람, 부드러운 칼/정호승  (0) 2010.07.01
껍대기는 가라/신동엽  (0) 201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