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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잠들 때

기형도의 겨울(冬) 詩.






얼음의 빛 -겨울 版畵(판화)

 기형도

 

겨울 풀장 밑바닥에 避難民(피난민)처럼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어요?

오늘도 純銀(순은)으로 잘린 햇빛의 무수한 손목들은 어디로 가요?

 

 

 

 

바람의 집 -겨울 판화 1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

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깍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

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

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때까지 어

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

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

을 할까?

 

 

 

 

 

도시의 눈 - 겨울 판화(版畵) 2
기형도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우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하구(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 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성탄목(聖誕木) -겨울 판화(版畵) 3

기형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오늘은 왜 자꾸만 기침이 날까
내 몸은 얼음으로 꽉 찬 모양이야
방안이 너무 어두워
한달 내내 숲에 눈이 퍼부었던
저 달력은 어찌나 참을성이 많았던지
바로 뒤의 바람벽을 자꾸 잊곤 했어
성냥불을 긋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이야, 난 참으려 애썼어
어느새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네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배당이 있었지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멀고먼 길 한가운데
알아? 얼음가루 꽉 찬 바다야
이 작은 성냥불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어머니는 나보고
소다가루를 좀 먹으라셔
어디선가 통통 기타 소리가 들려
방금 문을 연 촛불가게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참, 그런데
오늘은 왜 아까부터

 

 

 

 

삼촌의 죽음 -겨울 판화(版畵) 4

기형도

 

 
그 해엔 왜 그토록 엄청난 눈이 나리었는지.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수은주 밑으로 새파랗게 곤두박질치며 우르르 몰려가던 폭설.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왜 없어지는지 또한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지 못하였다. 한낮의 눈보라는 자꾸만 가난 주위로 뭉쳤지만 밤이면 공중 여기저기에 빛나는 얼음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어른들은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있는 힘 다해 높은음자리로 뛰어올라가고 그날 밤 삼촌의 마른 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밤을 하얗게 새우며 생철 실로폰을 두드리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쥐불놀이 -겨울 판화(版畵) 5

기형도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 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램프와 빵 -겨울 판화 6

기형도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너무 큰 등받이의자 -겨울 판화(版畵) 7

기형도

 

 
너무 큰 등받이의자 깊숙이 오후, 가늘은 고드름 한 개 앉혀놓고 조그만 모빌처럼 흔들리며, 아버지 또 어디로 도망치셨는지. 책상 위에 조용히 누워 눈 뜨고 있는 커다란 물그림 가득 찬란한 햇빛의 손. 그 속의 나는 모든 것이 커 보이던 나이였다. 수수밥같이 침침한 마루 얇게 접히며, 학자풍 오후 나란히 짧은 세모잠. 가난한 아버지, 왜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낡은 커튼을 열면 양철 추녀 밑 저벅저벅 걸어오다 불현듯 멎는 눈의 발, 수염투성이 투명한 사십. 가난한 아버지, 왜 항상 물그림만 그리셨을까? 그림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물 묻은 손을 들어 눈부신 겨울 햇살을 차마 만지지 못하였다. 창문 밑에는 발자국 하나 없고 나뭇가지는 손을 베일 듯 사나운 은빛이었다.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

 

 

 

 

 

겨울, 우리들의 도시
기형도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 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世上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을 無形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都市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世上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都市앞에 서서

버릴 것 없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角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은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刃]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서 나는!

 

 

 

 * 겨울이면 묘 하게도 기형도의 시가 어울린다, '어울린다' 라는 표현이 아프지만,, 적당한 어둠으로 채색이 되어서
인생이란, 겨울이란 스산함과 쓸쓸함,, 그리고 머물수 없는 인생의 어떤 흐름이 우리를 끄덕이게 한다. 누구나 '따스한'
세상을 꿈꾸고 원한다. 현실에서 많이 슬프고 우울했으며 고독했던 우리의 모습을 살았던 시인이기에 우리는 뒤늦게
나마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50 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성탄절에는,어떤,,
막연한 '설렘'이 있으니... 웃기는 일이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