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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잠들 때

폭설 시모음 - 눈이 오셨네요, 아주 많이,,


       - 네이버 친구인 休의 사진중 인용.




폭설  
김명인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폭설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찍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직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업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
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 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루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大寂)의 이력서다.


 

 

 


   - 休의 사진2.

 

 

 

폭설, 민박, 편지 2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 만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하자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폭설

 박진성

 

        연일 폭설이었다
        반지하 방 낮은 창 너머
        고향에서 온 부음(訃音)처럼 눈이 내렸다
        할머니, 할머니, 꽃상여 속에서 덜덜 떨던 복숭아뼈는
        열매를 잉태하시어…
        할머니는 말라 가는 작은 화분이었다
        손으로 툭 치면 방안 가득
        눈발처럼 날리던 향기.
        내한(耐寒)이 약한 식물은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대도
        살아나지 못했다
        빈터에는 아이들 몇 뛰어다니고,
        눈이 내리다 말고 한없이
        공중에서 떨었다
        나무의 뿌리 깊이 창문 열고 눈[雪]을 만지면
        오 년 전 죽은 할머니 복숭아뼈 열매 맺어
        함박눈이 덮쳐왔다

        아이가 온 힘을 다해 눈뭉치를 던졌다

 

 

 

 

 

폭설

심재휘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폭설

이상국

 

 

곡(哭)을 하다 배고프면 국수를 먹었다

 

처음에는 두 형님과 소리가 엇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은 어우러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살다 이렇게 가는구나 하며
나는 속으로 아는 체를 했다

 

꼬질대가 휘도록 눈은 퍼붓고
차일 밖에서 마른 눈을 삼킨 개들이
컹컹 기침을 했다

 

문상객들은 눈을 털며 들어와
양초나 문종이로 부조를 하고는
피가 비치는 돼지고기에 독한 소주를 먹으며
내년 농사 걱정을 했다

 

눈은 잠처럼 쏟아지고
영정 속의 어머이는
졸리면 형들에게 맡기고 들어가 자라 했으나
나는 추우면 화롯불을 쬐다가 다시 곡을 했다

 

 

 

 

 

댓잎들의 폭설

 전동균

 

 

  눈 쌓인 금장리 참대밭
  
  휘어져, 한껏
  휘어져
  마치 이 세상 밖으로 탈주할 것 같은
  저 팽팽한 떨림 속에
  
  휙,
  새 한 마리 지나가자
  
  순간, 있는 힘 다해
  눈을 터는 댓잎들,
  
  제 몸을 때리며
  시퍼렇게 멍든 제 몸을
  제가 때리며
  참회하듯 눈을 터는 댓잎들은
  
  어찌 저리 맑은 빛을 내뿜는지
  어찌 저리 곧은 생을 부르는지
  
  속수무책, 나는
  갈 곳 없는 죄인인데,
  
  대밭집 곰보노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산으로 간다
  어린 손주 약 해준다며
  덫 놓으러


 

 

 

 

폭설, 그 이튿날

안도현

 

 

눈이 와서,

대숲은 모처럼 누웠다

 

대숲은 아주 천천히

눈이 깔아놓은 구들장 속으로 허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아침해가 떠올라도 자는 척,

게으른 척,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은

 

밤새 발이 곱은 참새들

발가락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

 

참새들이 재재거리며 대숲을 다 빠져 나간 뒤에

대숲은 눈을 툭툭 털고

일순간, 벌떡 일어날 것이다

 

 

 

 


    - 休의 사진3.

 

 

폭설(暴雪)

 김상훈

                 
하늘이 수상했다
멀리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
전신주 밑에서 종량제 봉투를
물어뜯던 허기진 개들이
꼬리를 감추고 뚝 방 길로 사라졌다
술추렴에 찌든 썩을 놈의 사내에게
노름빚까지 떠안고 집을 나와
이삿짐 트럭에 몸을 실은 누이가
구부정하게 먼 길 떠나가는
찌든 여정을 집어 삼킬 듯
잿빛 구름이 입을 벌리며 몰려들었다
가슴을 할퀴던 상처 같이
선명하게 드러난 타이어 자국 위로
하얗게 탈색된 눈이 쏟아져 내렸다
통증의 무게를 남기던 길이
희미해져 갔다

아주머니,
뭔 눈이 이리 겁나게 내린데요
길조여, 길이 지워지니 이사헌디루
귀신이 쫒아가덜 못 한다잖여

쓸쓸히 돌아오던 길에
발자국을 따라오던 상심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폭설

류외향
 
 


   봄날 꽃가루처럼 하늘하늘 날리다가
   누가 떼어먹다 버린 솜사탕처럼 투둑 떨어지다가
   으스스 진저리치는 은사시나무 물비늘로 잠시 머무르다가
   어느 오랜 그리움의 어깨를 적시다가
   지평선을 휘덮은 노을처럼
   미치도록 마음 붉게 물들이다가
   마침내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저 울음
   지상의 지극한 영혼들이 하늘을 불러
   빛도 어둠도 공중에 붙들어 매어두다가
   오랫동안 놀아 흐르지 못한 채 붙박여 있다가
   시커먼 쓰레기더미로 버려지는
   저 울음

 

 

 

 

 

 

도장골 시편 - 폭설
김신용


하반신에 고무타이어를 댄 그림자가 느릿느릿 이어온다
그 산에 얼마나 큰 눈이 내렸나?
무릎까지 쌓인 눈, 어제 온종일 퍼부어 내리던 폭설
수의를 덮고 세상은 고요하다
한국의 수의는 마의(麻衣)이다. 바람이 제 집처럼 드나들
어 마치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그 성근 결 속으로 속살까지 내비치는 옷이다
봄 여름 계절도 없는, 누구나의 것이나
똑같이 생긴, 세상 끝의 집
무덤에 묻혔을 때, 다시 무의(無)의 삶 깃들어 저 세월
훠어이 훠어이 걸어가라는 옷이다
물기만 닿아도 곰삭은 두엄결처럼  올을 풀어  헤치는 그
옷처럼, 눈 녹으면
세상은, 천지간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모습을 나타내겠
지만
그 옷에 담겨, 지상의  마지막 길  걸어가듯 인가(人家)로
내려온 어린 고라니 한 마리
인적기에 문득 뒤돌아본다. 그 크고 둥근  눈망울에 비친
칡넝쿨 잎 같은 세계
등 뒤에서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눈사람처럼 녹아 내린다
 
 
 
 
 
폭  설

천서봉
 

  1.
  길이 낮게 들썩인다. 폭설이 시작되자 밤의 나무들은 모두 街燈 아래로 모여든다. 먼 곳의 숲이 어진 나무들을 모아 이름 없는 산이 되고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는 동안 나는 점찍을 수 없는 어떤 나라의 낡은 지도를 펼치곤 하였다. 어머니, 제발 엔카 좀 그만 부르세요. 그립지 않는 것도 가끔은 그리운 밤, 화해나 용서 같은 말에 밑불을 놓고 창 밖으로 혀 내밀면, 닿을 수 없는 공중에서부터 눈발은 거친 둔덕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튕겨 오르는 白髮, 틈새마다 바람이 푸르르 끓다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만 자려무나.

  2.
  쉬 붉어진 알등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새 더러워진 문자들을 닦거나 숨 죽여 지도를 그리는 일, 길은 마른 오징어 같았다. 쪼그라든 빨판 같은 어머니 기침 소리에도 기억은 총총 토막 나곤 하였다. 가령, 지면 위로 손바닥 흔드는 낙엽의 고별이나 어머니의 잠 속을 퇴각하는 늙은 군인들의 발자국 따위, 그 위를 덮으며 눈은 가등 아래서 한 번 더 내린다.

  고단한 主語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다. 희고 둥근 창 밖으로 밤새 미완의 빛들이 절뚝이며 흘러 다녔다. 무례한 손전등처럼 더듬어보는 아랫목 어머니 모로 누우신 능선 본다 길이, 아득하다.

 

 
 
 
 
1월의 폭설    

홍신선


대형서점에
톤백으로 쏟아져 나와 쌓인
수천톤 쓰레기들 저 생각의 잡동사니들
때 맞춰 시간의 양각풍(羊角風)에 쓸려내려와
텅빈 담론의 계곡이나
감각의 깊은 하수구에 꽉꽉 쌓이고 처박힌
이 말의 폐기물들
분리수거하듯 망각 속에 내용별로 곧 입고시키지만
부서진 고문서 활자들 주소지를 바꾸지만
깡마른 양어깨 속에
묻힌 유골들 발굴한듯 빗장뼈를 드러내는,
일제히 나무들이 퉁퉁 부은 몸피마다 검은 촉루(?뀜)를 감추고 섰다
썩음썩음한 공기 속에
오늘은 또 몇 ℓ짜리
쓰레기 봉투들을 하늘은 새로 내다놓는가

나는 나를 내다버리는가

 

 

 

 

 

폭설                     

이응준


지난 밤 꿈 속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金洙暎과 
눈 오는 새벽길을 걸었다.

處女雪을 시원스레 밟고 가는
그의 헝클어진 뒤통수를 따라 해장국집 있는
좁고 미끄러운 언덕을 올랐다. 이건
눈이 아니라 폭력이야, 아침 출근길
서울의 모든 통로들은 이 폭설로 조루하여
쓰러질 것이 뻔했다, 그는 순간 조루한
나를 보았다. 눈보라가 얼굴을 쳤다
폭설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려 쌓이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더운 밥을 국에 말자
뽀얗고 하얀 김이 그의 얼굴을 흐리고
그 큰 두 눈이 왠지 금방이라도
어둡고 맑은 선지국 안으로 별똥 되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건
눈이 아니라 폭력이다, 목이 메어 잠시
창 밖을 보니 흰 눈이, 여름날 정원에 펄럭이는
아가들의 기저귀보다 흰 눈들이, 오직
내려 쌓이기 위해서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오직 내려 쌓이려는 눈들이 이 더러운
거리를 덮을 수 있었다. 그의
자리를 보았지만, 그는 어느새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찰나에 사라지고
불안한, 불안한 내 마음의 벽을 부수고
세상으로 펑펑 내리는 폭설이
되어 있었다. 

 

 

 

폭설

송종규


지친 풀잎 같은 목소리가 안간힘으로 미끄럼틀을 기어오른다 나는 낡아서 헐거워진 신발을 벗어 검은 봉지에 집어넣는다 멀리서 순금의 빛살 하나가 자운영 손바닥 위에 하루 종일 붙들려있다 오래된 책 속에서 나온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 있다 달력 속이 왁자지껄하다 나는, 나를, 나에게 전송해야 하는데 갑자기 ID가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 폭풍이라 말했고 누군가 폐허라고 말했다 너는 깊은 연못 속에 빠져있는 듯 하다 나는, 이 난감한 삶의 한 끝을 손가락이 아프도록 붙들고 있다  


 

 

 

 

 

폭설

복효근

 

 

그 희고 눈부신 것을 온통 이마에 받쳐들고
측백나무 하나 부러질 듯
벌서고 있는
어린

대책도 마련 없는
이 그리움의 적설량


 

 

 

 

폭설

도종환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 休의 사진4.

 

 

 

폭설속에서

원재훈 
 
 
폭설이 내리면 길이 사라진다
붉은 신호등 아래,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저 횡단보도를 건너고,
폭설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을지라도
내가 여기에 있고, 네가 거기에 있으니
서로 조심하게 된다

얼어붙은 빙판 2차선 도로 위에서
항상 씽씽 달리던 자유로에서
폭설 때문에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집으로 가는 길에는
살면서, 가면서, 사랑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하게 된다

가끔씩 응급차가 요란한 싸이렌 울리면서
내 앞을 지나가면, 항상 몇 백 미터 앞에는 뒤집힌 차량들
불과 몇 분전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 삶이라는 것을
혹독한 폭설속에서는 희미하게 보인다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저 늙은 노새같은 스노우 타이어
차창을 부수고 튀어나온 여자의 피묻은 가는 손목,
그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의 약속은 이제 폭설 속에서 사라져 간다

폭설속에서 아주 천천히 걸음마를 하듯이 운전을 하면
하나, 둘, 사라지는 집들,
눈에 덮였지만, 분명히 저기에서 흐르고 있는 강물,
평소에 보았던 것들을 다짐하듯이 보게 된다

깜빡거리면서 마을의 불빛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덮어버린 지상의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이불을 덮고, 과일을 먹고, 연인을 기다리고,
서로를 사랑한다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그 모든 것들이
분명히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하게 된다

 

 

 

 

폭설

박이화

 

 


 밤새 보태고 또 보태어 쓰고도
아직 못다한 말들은
폭설처럼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 그리움에 첩첩이 막혀
더 갈데 없는 곳까지 가볼까요?
슬픔에 푹푹 빠져 헤매다
함께 눈사태로 묻혀 버릴까요?
나 참 바보 같은 여자지요?
눈오는 먼 나라 그 닿을 수 없는 주소로
이 글을 쓰는 난 정말 바보지요?
그래도 오늘 소인까진
어디서나 언제라도 유효하면 안 될까요?
끝없이 지루한 발자욱처럼 눈발,
어지럽게 쏟아지는 한길가
빨갛게 발 시린 우체통이
아직 그 자리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군요
한편에선 쿨룩이며 숨가쁘게 달려온 제설차가
눈길을 쓸고 거두어 위급히 병원 쪽으로 사라집니다
아, 그렇군요
내 그리움도 이렇게 마냥
응달에 쌓아 두어선 안 되는 거군요
아직 남은 추위 속에
위험한 빙판이 될 수 있겠군요
슬픔에 몸둘 바 몰라
저 어둔 허공 속 지치도록 떠도는 눈발처럼
나, 당신 기억 속에 쌓이지 말았어야 했군요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랑이 전부이고 다인 나에게는
해마다 어디로든 추운 겨울은 오고
큰 눈 도무지 그치지를 않네요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폭설 
장인수


하늘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백 리 넘어 도시에 살고 있는 애인에게
핸드폰을 쳤다
핸드폰에서 파드닥 튀어나간 음파
여기는 들판 한가운데야
하늘의 언어들이 들판으로 쏟아져 들어 와
무차별적이야
어떤 차별도 없이 쏟아져
하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말
무색(無色)하구나
저돌적으로 퍼붓는 하늘의 언어 앞에서
사랑한다는 우리의 속삭임은
무의미하다 들판을 다 덮어버리고
그칠 기미 없이
쌓이고 또 퍼붓는 하늘의 적설량 앞에서
지상의 모든 언어들은
무색(無色)하다


 

 


    - 네이버의 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