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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매화 나무.

섬진강 줄기따라 매화꽃이 만개 했다.







그늘을 캐다 [임혜주]




매화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줘서
네 상심을 조금 캘 수 있었다

수보리야 부처를 보았다 할 수 있느냐
후우 호로롱
새 울음 몇 마디 얹고

일렁이는 달맞이 분홍 바람도
함께 올려서
대야에 담는다

왼손 끝에 딸려 나오는
자잘한 꽃망울들

상심이 이런 꽃이었단 말이냐

호미를 풀밭에 버려두고 일어나니
아찔한 햇빛 속이다


                -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천년의시작, 2023




매화, 흰빛들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질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 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는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2002




봄 기차 [강은교]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
꽃그림 그려진 분홍색 나무 의자에 앉을 것이다
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

매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
기차에서 내려
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
또 기차에서 내려
진달랫빛 바람이 불면
또 또 기차에서 내려

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
들불 비치는 책 한권 들고
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젖히며

봄이 오면, 여기 여기 봄이 오면
너의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은난초 흰 꽃 커튼이 나풀대는 창가에 앉아
광야로 광야로
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창비, 2020




어제의 시 [신동옥]




   부처는 손가락으로 시를 적었겠지. 법을 전하던 손가락 살아서
는 법에 따라 고동치는 심장을 쓸어내리고 죽어서 살점이나마 맞
닿기 바라며 빛나는 손가락, 당나라 새가 그걸 물어 와서 황제는
30년에 한 번 절을 했다지. 황제는 긴 잠에 빠지고 꿈의 독재가 시
작됐다지.

    이 순간부터는 짐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리니. 한유(韓愈,768-
824)는 황제의 꿈을 代讀대독했다. 성벽에 붉은붓으로 적어 내린
포고령이 나부꼈다. 밤이면 榜방에서 혓바닥이 돋아났다. 도란도
란 수런수런 파랗고 아늑한 불길이 일었다. 피죽바람이 불길을 성
밖으로 데려갔다.

한유는 불길이 가 닿은 지평선을 응시했다.
내 땅은 파란 혓바닥 같고 말이 없구나

    어제는 아름다운 시를 얻었고 꿈에 시인을 만났지 붉은붓을 소
매 춤에 숨기고 그를 찾아갔지 매화나무 꽃그늘 아래 절 문을 두드
리다가는 곧 밀었지 그러고는 울음도 없이 흐느끼는 시를 읽었지
내일은 시를 읽고 말없이 돌아와야지 가난한 시인에게 벼슬자리를
봐주어야지

賈島가도는 오늘도 시를 쓰고 있을까?

    한유는 손깍지를 끼고 잠든다. 머리맡으로 당나라 새가 날아와
앉는다. 새는 부리 끝에 파란 불을 머금고 한유의 꿈속을 들여다본
다. 날름거리는 불길에 되비친 새의 눈알 속에서 한유는 입술을 움
직였다. 모든 시는 어제의 시다. 들릴 듯 말듯 낮은 소리로.




봄날 나의 침묵은 [조용미]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 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 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갖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을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면서 등 뒤로 와 나를 껴안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노자 『도덕경』에서 인용


               -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 2000




돌밭 [박성우]




돌밭 윗머리에 집을 앉혔다

땅이 풀리자 지붕이 기울어
겨울이 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경칩 전에 산개구리가 나와
가을에 심지 못한 차(茶)씨를 세 알씩 묻었다

산수유나무와 매화나무를 얻어
괭이가 먼저 몰밭에 뜨건 꽃을 핑핑 피웠다

도랑에서 길어 나른 물은
돌밭을 돌돌돌, 도로 도랑으로 갔다

산수유 홍매 피어, 돌밭에 오래 머물러주었다

차씨 움틀 날 아득했지만
아내는 자꾸 신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


              - 자두나무 정류장, 창비, 2011




탐매행 [조용미]




올봄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 만나러 나선 길이 멀었지 멀어서 참으로 까마득했지
허물어질 듯 네모난 연못가에 서 있던 매화나무,
산속 깊은 물소리에 해마다 매화 향을 얹어놓았겠지
바람이 차서 대숲 종일 소란스러운 이른 봄날엔 꽃잎을 멀리까지 살러 보냈겠지


멀리서, 매화가 처음 보는 객이 찾아왔다네
내 아는 매화나무 한 그루는 오래 묵어 검고 갈라진 살갗을 가졌네
꽃잎도 높은 가지 끝에만 잔설처럼 달려 있네
내 아는 매화나무는 그 아래 지나다 문득 바라볼 일 없는 산속 깊은 곳에 있다네


나는 한나절 앉아 매화나무 한 그루를 포섭했지
물소리 쪽으로 기울어진 듯 자란 늙은 매화나무는
천 리 길을 오게 하고 한나절도 모자라 하루, 이틀을 다시 올라와 앉아 있게 하자
해 기울도록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고무신 한 켤레 털신 한 켤레 댓돌에 나란히 놓인 암자가 있는 곳
사백오십 년 묵은 산매화는 큰 절과 암자 뒤편 또 보이지 않는 암자 가는 길 어디쯤에 숨은 듯 피어 있지
물소리 여간해서 그치지 않는 곳,
바람 세찬 날 대숲의 키 큰 왕대들이 더걱더걱  부딪히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곳, 내 아는 매화나무 한 그루는


           -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사, 2011




매화나무의 해산(解産) [문태준]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입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14






매화나무 [문인수]




도서관 앞뜰에서 너를 보낸다.



저 나목의 매화나무 아래에서 한 번,

얼어붙었다 사라졌다 너는



공중에 그려지는 꽃피는 폭설,

차고 환하다.



이 한 그루 毒한 비밀이나 가꿀밖에

여러 갈피 겨울바다를 걷는다.


              - 동강의 높은 새, 세계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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