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숲에 들다

자작나무.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박정대]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름 폭풍은 내 마음속에 있었소

폭풍우 치는 낮과 밤을 동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견디오

폭풍우 치는 한 계절이 지나면 장난처럼 고요하고 맑은 저녁이 내 작은 창가로 오오

그리고 기적처럼, 등잔불 피어오르는 고요한 밤의 생이 시작되오

나는 늘 등외에 있는 삶이었고 세상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삶을 꿈꾸었소

심지어 때때로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때도 많았소

오랑캐의 말을 듣는 누군가의 귀처럼 푸른 이파리들 돋아나는 아침이오

침묵의 함성이 하나의 행성이 되는 시간이 오고 있소

지나가는 바람이 배롱낭구의 매끄럽고 단단한 살결에 입맞추는 아침이오

미스터 션샤인이 빨래를 널고 있는 무한의 아침이오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달아실, 2023




6월, 가뜩하여라 [한영옥]




멀리 계시던 당신들
우르르 오신다

은사시나무에게 오시는
은사시의 당신,

자작나무에게 오시는
자작의 당신,

미루나무에게 오시는
미루의 당신,

옷깃 느슨히 오시는 당신들께
안기는 소리, 살폿 살폿

은사시, 자작, 미루들이 우르르
깨어나는 참 소리, 참 바람

가뜩하여라
좋은 바람, 6월.


              - 아늑한 얼굴, 랜덤하우스,  2006




시월 [김은경]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이에요

대추나무는 대추알과
은행나무는 은행알과

지상의 모든 열매는 눈물방울 같아요
나는 대추나무
나는 은행나무

나는 감물 번진 노을 밑에서 홀로 서서요

팔이 떨어져 나간 사람은 팔이 있다는 착각을 하며 내내 살듯이
살 빠진 사람들이 두 개의 영혼을 갖고 살듯이

지난 가을 스웨터를 입고
상실감을 상실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어요

알아요, 당신?
모든 나무의 눈물주머니 속엔 열매가 살아요

고욤나무의 고요를
자작나무의 한숨을
환희라는 꽃말을 가진 자귀나무의 역설을

빗방울처럼 받아먹는 저녁이에요


                 -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실천문학사, 2018




한 나무를 사랑할 수도 있다 [문성해]




달밤에 공원을 도니 아름다운 자태의 나무들이 나를 빙빙 돈다
나무들이 발가락을 움직여 제가 신던 거친 신발을 내게 벗어주러 온다
내 발에 수천 갈래 뿌리의 길이 생겨나니
홀리듯 달빛을 뚝뚝 듣고 섰는 달이여
내 아비는 원래 거친 너도밤나무였다고
한 여인과 접붙어 내가 태어난 거라고
내 여태 사람인 줄 알았다만
오늘 밤 홀린 듯 나무가 되고 보니
세상은 흘러가는 것 투성이로구나
일별도 없이 바람이 흘러가고
아랫도리도 없이 흘러가는 안개여
아비도 어미도 강물처럼 흘러 노래가 된 지 오래,
그날 밤 이후
나는 거리를 걷다가도 덜컥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허공을 살피는 일이 잦았다
큰 나무를 보면 그 나무에게로 가서
자꾸만 뜨거워진 아랫도리를 비비고 싶어졌다
마침내 어미를 닮아 한 나무를 사랑한다면
하얀 자작나무가 될 거라고
그 나무처럼 샅이 하얀 사내아이 하나 내게서 자라나왔으면,
바람과 빗소리에 내 머리카락이 무성해져갔다


           - 입술을 건너간 입술, 창비, 2012




새벽과 색깔의 꿈 [이혜미]




숨을 참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나요
화장실 옆 정수기의 고독처럼

종이는 나무가 지르는 차가운 비명이어서
오래 견뎌온 벽지들이 흔쾌히 일어서요

많이 웃는 사람은 조금 우는 사람입니까

내버려둔 손톱이 어스름한 테두리를 가지듯
시집의 페이지들이 갇힌 채 닳아가고

소식이 멀어진 사람은 자작나무의 껍질처럼
조금씩 겉표지를 놓아줍니다

모르는 사람은 왜 무섭고 아름다운지
종이컵처럼 젖어드는 입술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연인은
아직도 마침표를 사랑하는지

아름다운 꿈을 위해
하루치의 베개를 사용합니다

벽을 두드리면 남아 있던 밤이 뒤척였습니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배달집 전단지들이 점점 화려해지는 이유를


                     - 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사, 2021




종이접기 [최금진]



  
이 길에는 순서와 법칙이 있어요
나중에 당신은 종이 속에 감춰진 무수한 길들을 이해하게 되죠
백지가 숨겨놓은 진실을요
집중력을 발휘할 때만 나무와 숲이 보여요
나무와 숲은 종이들의 영혼이 묻힌 곳이죠
종이를 접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이르는 거리를 당신 손에 갖게 되죠
우리가 길을 벗어나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뇌는 활짝 열려 선분과 선분으로 이어지고
완성품은 아니지만
비로소 달을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생기는 거죠
외울 필요 없어요, 종이가 제 몸을 펼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신이 가보지 않은 더 많은 길이
종이 안에 묻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무와 숲에 눈이 내리면 백지의 들판이 펼쳐지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연필로 편지를 써가는 흰 자작나무도 있어요
자, 보이죠, 쉽고 작은 것에서 나온 길 하나가
온몸으로 눈밭을 뚫고 지나가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오늘 밤 창문을 열고
우리는 달까지 갈 수 있어요, 자 이쪽 면을 접고
반대쪽은 활짝 펼쳐 보세요
네, 네, 맞아요, 거기가 바로 종이의 심장입니다


               - 현대시학 2021년 7~8월호




우리 흐를까 [함기석]




너는 하얀 책
절반은 물이고 나머지는 꿈인 책
펼치면 흰 모래와 푸른 파도가 흘러나오는

너는 작은 종이책
해초와 조가비, 돌고래와 숭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는
한 장 한 장 얇은 살이 나풀거리는

너는 봄밤이다 빨간 지느러미 달린 반달이
내 눈으로 들어와 요트처럼 달리면
화르르 벚꽃이 지는

나도 봄밤이다 내 몸속 깊은
해저에서 짝 잃은 고래의 아픈 허밍이 울리고
등줄기가 아름다운 태고의 사람 하나
물의 묘실에 누워 꿈꾸는

봉인된 방, 시간은
불의 빙산, 사랑은
죽음을 붕괴시키는 천 개의 눈과 분화구를 가진 괴수

들리니? 먼 지층에서 울리는 땅의 심장 소리
그건 나의 숨소리
보이니? 용암을 타고 맹렬히 올라오는 물고기 화석들

어둡고 찬 밤이다
가만가만 귀 기울이면
철벅철벅 잠 못 든 새들이 내 등을 밀어
깊고 깊은 네 자작나무 숲으로 나를 밀물치는 소리

우리 다시 흐를까
내 몸의 절반도 꿈꾸는 물이고
나머지는 피가 꾸는 아픈 환몽이고 벌거숭이 말이니


                  -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민음사, 2020




자작나무 길을 따라 [장이지]




분명히 꿈의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하룻밤에 세 계절을 경험했고
또 다른 세 사람의 '나'를 만난 것이다.

벽난로의 붉은 불꽃을 보고 있었을 때
세상은 온통 눈보라 속이었다.
자작나무 길은 숲 속으로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소년이 도착했다.
소년은 차가운 얼굴을
내 가슴께에 묻고 한참을 울었다.
바둑이가 죽었다고 끝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뜨거운 코코아를 소년에게 대접했다.
소년은 벽난로 앞에서 잠들었다.
불꽃의 춤이 소년의 흰 뺨 위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청년은 검은 박쥐우산을 쓰고
자작나무 길을 따라 왔다.
비가 너무 오는군, 그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되었다.
나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조용히 나무 탁자 위에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받은 종양 제거 수술,
병실의 외로움, 반목했던 사람들,
이제는 멀어진 한 사람에 대한 기억들,
사랑과 미움, 직장들과 인터넷,
길의 무한선율, 물의 얼굴을 한 스승과의 만남,
야콥슨의 전환사, 거울 속의 라캉, 시의 편린들,
아스피린 혹은 광기(狂氣), 선풍기 소리.'
모든 것이 꿈만 같이 여겨졌다.
너무 적막했다. 이 어두운 산장에
이제 나 혼자이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리라 했다.
빗소리만 지루하게 이어졌다.

세 번째 손님이 자작나무 길을 따라 온 것은
새벽녘이었다. 하늘엔 아직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무어라고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돌아갈 시간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달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에게선 낙엽 냄새가 났다.
나는 그가 나였다고 짐작한다.

먼 훗날 내가 다시 이 산장으로 올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가슴에 품어줄 것이고
뜨거운 코코아를 대접해줄 것이다.
내가 그 일로 위로를 받듯이
미래의 나 역시 그 일로 위로받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꿈일것이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것이 나만의 이야기일까.


                   -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2007




몽골애서 쓰는 편지 [안상학]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 사람, 2020




겨울엽서 문태준]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 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
그러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덕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나무 2.  (1) 2024.01.14
새해,,. 2024년에 덧붙여,  (2) 2024.01.14
미루나무  (1) 2024.01.14
래여애반다라( 來如哀反多羅1~9 )  (2) 2023.11.19
바람꽃  (0)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