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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모과 나무.

텁텁한 향이 좋다.











언제나 며칠이 남아있다 [위선환]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
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
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모과나무 가지에 허옇게 서리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걷고 있을 것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
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글어지는
며칠이 또 남아 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내가 잎 지는 모
과나무 아래로 걸어가서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또 물을
것이니......


                - 서정시선, 달아실, 2023




봄 저녁 [장석남]




모과나무에 깃들이는 봄 저녁

봄 저녁에 나는 이마를 떨어뜨리며 섰는
목련나무에 깃들여보기도 하고

시냇물의 말[言]을 삭히고 있는
여울목을
가슴에 만들어보기도 하다가
이도저도 다 힘에 부치는
봄 저녁에는

사다리를 만들어
모과나무에 올라가
마지막 햇빛에 깃들여
이렇게, 이렇게
다 저물어서
사다리만 빈 사다리로 남겼으면

봄 저녁


               -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2004




바람 불고 고요한 [김명리]




죽은 줄 알고 베어내려던
마당의 모과나무에
어느 날인가부터  연둣빛 어른거린다
얼마나 먼 곳에서 걸어왔는지
잎새들 초록으로 건너가는 동안
꽃 한 송이 내보이지 않는다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
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적막이 또 한 채 늘었어요

이대로 죽음이
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바람 불고 고요한 봄 마당


               - 바람 불고 고요한, 문학동네, 2022




저기 투포환 같은 모과가 [유홍준]




일평생 뭉쳐지는 것에만 집중한 모과가
떨어져 있다

모과나무에서 떨어져 모과가
저기
풀밭 속에

떨어져도 모과는 뭉쳐져 있다
떨어져도 모과는 흩어지지 않고 뭉쳐져 있다
그래 너희들은 그리 살아라 나는 이렇게 살다 죽을 거다 고집불통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사람처럼 뭉쳐져 있다

모과는 빨리 썩지 않는다
내용이 없으므로

모과는 돌덩어리다
모과는 고집불통이다

일평생 뭉쳐지는 것에만 집중한 모과가
저기

나뒹굴고 있다


                - 문학사상 2019. 9월호




매춘(賣春) [성선경]




  나는 어질머리를 앓는데 막 웃기 시작한 매화(梅花) 보니 기막히다 어허 저런 우물같이 깊은 내 우울 너 사가라 갓 입대한 이등병같이 노란 개나리 떨긴 왜 떨어 봄바람에 눈 뜨고도 흐릿한 황사 너 사가라 이제 잎눈 났다고 어질머리 흔들어대는 버들 어금니 꽉 깨물어 바람 빠진 풍선같이 볼품없는 이 치통(齒痛) 너 사가라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다고* 저 어지러운 아지랑이 보리밭 뭘 하잔 짓거린가 이 가난 너 사가라 향교 고개 늙은 모과나무 새잎 돋았을 거라고 아슴아슴 벌써 고향 길 넘어가는 향수 배배쫑쫑 종다리 너 사가라

   관절염을 앓는 어머니 약 한 첩 못 사드리고
   일요일 전화통만 붙잡고
   잘 지내시죠 하고 끊는
   끊는
   봄

   옛다 너 사가라.

* 이상화의 시 제목에서 빌림


              - 몽유도원을 꿈꾸다,천년의시작, 2006




교산蛟山 [박용하]




내 탯줄 묻은 옛 동산을 바람 쐬듯 찾았으나
생가는 헐리고 심장이 무너졌다

내 이빨 던진 어린 지붕을 찾았으나
잡초는 우거지고 오솔길을 묻혔다

늙은 모과나무 곁에 우두커니 서서
수줍은 짐승처럼 동해를 품었다

여행하듯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渤海발해나  女眞여진이나 愛日애일 같은 여인들의 이름은 너무 멀다


           - 견자見者, 열림원, 2007




모과[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亡身의 사랑이여!


                  -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1993




녹색비단구렁이 [강영은]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
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
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
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
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
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 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
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
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
기 물길이고 싶어요


               - 녹색비단구렁이,  종려나무, 2008




수국지는 밤 [김은경]

                        


밤빨래를 넌다
마당에서 백 년을 산 플라타너스
말라비틀어진 고추나무 잎사귀는
다들 검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바스락 바스락
밤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 듣노라면
저건 수국 꽃잎 지는 소리
이건 또 발에 차인 돌멩이의 흐느낌.
차가운 몸을 덮던 옷가지들이
어느덧 평면으로 돌아가 있다
깃은 잔뜩 움츠려 있고
발가락은 힘이 없고
목덜미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주일치의 삶, 혹은 하루치의 삶이
견딘 중력의 힘은 투명하고도 위대하다
눈물의 중심부로 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몸부림을 쳤나
땀내 나는 시간은 땟국물로 흘러가도
이렇게 구김으로, 빛바랜 흔적으로 남더라고
빨랫줄을 잡아당긴 채 양팔 벌린
모과나무가 향기롭게 이른다.
지퍼도 단추도 잠그지 않고
온몸 열어 마침내
밤빨래들이 펄럭인다
묵은 그대 묵은 시간
내 손금에 의해 닳아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졌던 것들
날개를 접은 채
지금은 모두 한 줄 선상에 있다
얼룩이 곧 이름이 된 얼룩무늬나비떼처럼.


                 - 계간 실천문학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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