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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기 형도 / 식목제(植木祭).





어느 날 불현 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직목제(稙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기 형도 시 ‘식목제’모두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

** 시인은 가고 이름이 남았다. 하면 다행인 것일까? 짧게나마 알고 인사했던 시인의 얼굴은 잊혀지고, 그 선했던 이미지와 그 ‘시절’ 우울했던 동질의 씁쓸했던 미소만 기억으로 남는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잊혀지는 것,, 책을 나누어주고 남은 시집 중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를 한장, 한장 넘기며 읽어 본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회상’이란 단어는 쓸쓸하다. 시들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고 낯설은데,, 새 시집을 사기 보다는 남겨진 옛시집을 새롭게 읽어 보고 싶다는 마음에 시집의 먼지를 털고 딱아 낸다. 너희도 더블어 쓸쓸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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