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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맑게‘ - 詩詩하게 살자, 정 현종 시. 하루를 공친다 한 여자 때문에. 하루를 공친다 술 때문에. (마음이여 몸이여 무거운 건 얼마나 나쁜가) 정신이라는 과일이 있다. 몸이라는 과일이 있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두엄이고 햇빛이고 바람이거니와 바람 없는 날은 자기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대지여 여자는 바람인가 술은 햇빛인가 그러나 언제나 마음은 하늘이다 바람이 시작하는 그곳이여. - 정 현종 시 ’바람이 시작하는 곳‘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 더보기
이팝나무. 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 20.. 더보기
가문비 나무 아래의 연주, 죽은 사람을 장지에 묻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악기를 하나쯤 다루고 싶어서 대여점에 들러 첼로를 빌렸다 48인치짜리 첼로는 생각보다 육중하였고 나는 그것을 겨우 끌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소파 옆에 세워둔 첼로는 공습경보를 들은 사람처럼 창밖을 보고 있었다 첼로를 이루는 가문비나무는 추운 땅에서 자란 것일수록 좋은 음을 낸다고 들었다 촘촘한 흠을 가진 나무가 인간의 지문 아래 불가사의한 저음을 내는 순간 더운 음악회장에서 깨어난 소빙하기의 음표들이 빛을 향해 솟구치는 광경을 죽은 사람과 함께 본 적이 있었다 가슴에 첼로를 대고 활을 그었다 첼로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내 몸의 윤곽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하얀 나방이 숲으로 떠나가는 깊은 밤 수목 한계선에서 빽빽하게 자란 검은 나무 아래 영혼의 손가락 끝에 홀연.. 더보기
유 형진 / 피터래빗 저격 사건 - ‘모모’가 생각나~ 나에겐 고향이 없지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그를 만난 건 내가 Time seller Inc. 라는 회사에서 일할 때였지 그곳은 시간이 없는 자들에게 시간을 파는 일을 해 그것은 불법이지 그곳의 시간들은 대부분 훔친 것들이거든 나는 시간의 장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시간을 사줄 수 없겠냐고 문의를 해왔어 그는 오자마자 고향 이야기를 꺼냈어 그의 고향은 남쪽의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고향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시간을 팔고 싶다고 했어 들어보니 사줄 가치도 없는 흔해빠진 시간을 들고 와선 아주 비싼 가격을 부르더군 그는 벨벳 정장 차림에 고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깊었어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그런 시간 한 개쯤 사.. 더보기
5월의 시 - 구두끈 / 김 경미. 서랍 뒤쪽에서 불쑥 주황색 구두끈이 나타났다.나타 났다는 말이갑자기 마음에 들어서주황끈에 어울리는 구두와 정장을 사서찻집에 나타나고 싶었다최대한 길게 대화의 선을 잇는 사람들서랍같이 열렸다가서랍같이 닫히며서로를 보관하려는 사람들나도 양말에 어울리는 스카프를 사고스카프 같은 초승달을 보며갑자기 나타날 사람과 걷고 싶다잘 어울리고 싶다* 곱씹게 되는 시가 있다. 소소하게 와닿는 주제로 애정을 풀어 놓는다. 시인이 그만큼 외로움을 타는 것인데,, 나 또한 이런 외로움이 좋다. 시사랑 정모에서 김 경미 시인의 ‘구두끈,을 낭독 했다. 대체로 읽을 시를 준비하지 않는 편인데, 많은 시집 가운데서 김 경미의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 하는지‘라는 민음사의 책이 눈에 들어 왔다. ’세계‘라는.. 더보기
초록 세상. 초록을 말하다  조 용 미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 다시 아팠다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결국은 더 갈데없는 미세한 초.. 더보기
가문비 나무,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나무 몇은 아직 눈 속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땅이 마르는 동안벗은 몸들이 새로운 빛을 채우는 동안그래도 이렇게 발을 디디고 삽니다잔설이 그려내는 응달과 양달 사이에서 - 나 희덕 시 ‘殘雪잔설‘[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치키치키, 빗방울이 16비트 리듬으로살아나는 광릉수목원에 가본 적 있나요수십 만의 히피나무들이 부동자세로입석 매진된 한밤의 우드스탁 말이예요레게머리 촘촘한 수다쟁이 가문비나무와짚내복을 사철 입고 사는 늙은 측백나무 사이우르르쾅, .. 더보기
미선나무 - 한국에만 있는 하얀 개나리. 푸른미선나무의 시 [고형렬] 저 충북 어디 가면 미선나무들이 많이 산다지 그녀들 이름은 상아미선나무 분홍미선나무 혹은 둥근미선나무라지 그중 푸른미선나무도 있다지 영원히 봄에도 푸른미선나무 여름에도 푸른미선나무라지겨울 눈이 좋지 않은 요즘도 푸른미선나무는자신의 미선나무지 나의 미선나무는 되지 않는다지 교목처럼 높지도 않고 위태롭지도 않아 키는 고작 일 미터향기도 짙지 않은 푸른미선나무는항상 기슭에 살아도 자신이 왜 푸른미선나무인진 모른다지 그 자리에서 거치 없는 잎사귀와 관다발만 수없이 만들었지만그 끝없는 사계의 반복만이 그의 산에 사는 즐거움이라지 처녀 같은 푸른미선나무들 자줏빛 반질한 가지 꽃봉오리는이듬해나 꽃 먼저 터트리는 푸른미선나무그 푸른미선나무는 충북 어디 산기슭에만 산다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