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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유 형진 / 피터래빗 저격 사건 - ‘모모’가 생각나~

미카엘 엔더의 ‘모모’






나에겐 고향이 없지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그를 만난 건 내가 Time seller Inc. 라는 회사에서 일할 때였지 그곳은 시간이 없는 자들에게 시간을 파는 일을 해 그것은 불법이지 그곳의 시간들은 대부분 훔친 것들이거든 나는 시간의 장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시간을 사줄 수 없겠냐고 문의를 해왔어 그는 오자마자 고향 이야기를 꺼냈어 그의 고향은 남쪽의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고향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시간을 팔고 싶다고 했어 들어보니 사줄 가치도 없는 흔해빠진 시간을 들고 와선 아주 비싼 가격을 부르더군 그는 벨벳 정장 차림에 고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깊었어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그런 시간 한 개쯤 사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 혹시 팔리지 않는다면 내가 써볼 생각이었지 그래서 그의 시간을 헐값에 샀어 아무도 사가지 않은 그의 시간을 쓰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지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호등을 기다리다가도 깜빡깜빡 잠이 들었어 끝내는 눈을 뜨고 꿈을 꾸며 걷게 되었지 꿈꾸며 걷는 길가엔 은갈치 뼈가 몰려다니고 해초들이 발목을 감싸서 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예전의 고향 없는 내가 그리워졌어 그때의 평화로움은 다시는 나를 찾아와 주질 않았지 구입한 시간은 되팔 수 없었어 그것이 이 일의 룰이거든 그를 찾으면 꼭 보름의 달무리 진 풀밭으로 데려가야 해 그가 판 유년의 시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그곳에서 부탁해


- 유 형진, 피터래빗 저격 사건_의뢰인              
  *계간 [문학과 사회] 2003 가을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
이 하얀 마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산이 흐릿했고
토끼 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십 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
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그 방에서 나는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양희은의「작은 연못」 과
들국화의 「행진」로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함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 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 유 형진, 파터래빗 저격사건- ’내가 가장 예뻤을때‘
* 문학과 사회, 2003 가을.




** 피터 래빗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선스 캐릭터로 1901년 영국의 수채화가이자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가 쓴 『피터 래빗 이야기』라는 동화책의 주인공이다. 시인은 이를 창의적으로 베껴서 하나의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었다.

   서정적 자아는 시간을 파는 불법 회사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시간을 헐값에 샀다. 그 시간을 쓰겠다고 한 순간부터 ‘꿈을 꾸며 걷게’ 되었다. 이 이상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피터 래빗 저격’을 의뢰한다는 이야기다.

   상상력의 재미가 탄탄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독자를 흡입하여 아름다움의 세계로 끌고 간다. 이 이야기의 ‘주관적 시간 창조’와 그것의 반환 욕구의 충돌 지점에서 독자는 방황하면서 시간을 끌게 된다. 탄탈로스(Tantalos)의 현대적 시간인가. (서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