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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이팝나무.

우리 Apt에도 있네, 예전에 이밥(쌀밥)나무라도 했던, 다소 슬픈,







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팝나무 꽃 피기 전에 [정일근]




처음엔 푸른 무정형의 눈물이었다
연초록으로 빚은 둥근 눈물 속에 무엇이 숨었나
국천척지跼天蹐地 조심조심 궁극을 받들어 들여다보니
잎이 되기 전의 하늘의 자궁이
땅의 꽃을 위한 정은正銀의 태몽 꾸고 있었다
여기서 가까운 신라가 알에서 나왔듯
여기서 더 가까운 가야가 알에서 나왔듯
신전리 이팝나무*는
숭어리마다 신화의 알 감추고
꽃 피는 오월 부르고 있다.

* 양산 상북 신전리 이팝나무. 1971년 천연기념물 제 234호 지정.

         - 시안, 이천십삼년 여름호




참을 수 없을 만큼 [황동규]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팽나무를 포구나무라고 부른 까닭 [고두현]
―물건방조어부림 3





어떻게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까
오래된 일이지만 예전부터 궁금했지.
이 숲 속 팽나무를 우린 포구나무라고 배우며 자랐지.
소금기에 강해 포구(浦口)에서 쑥쑥 큰다고.
포구 열매에선 늘 풋내가 났지.
푸조나무는 어때? 오래오래 푸근하고 넉넉하고
편안한 그늘 드리워 준다고 그렇게 불렸대.
이팝나무 꽃은 입하 무렵에 피지. 흰 쌀밥 닮은 이팝 꽃잎.
고봉밥처럼 풍성히 피어야 풍년 든다고 아버진 말씀하셨지.
아 보리밥나무도 있네. 씨 모양이 보리밥 같아 그렇게 부르는
보리수나무,보리똥나무, 볼레나무…………
그러고 보니 모두 먹는 타령이군.
비바람 해일 풍랑 다 막아 주고
긴 숲 그림자로 물고기까지 불러들이는
물건방조어부림에 와 보면 왜 그런지 알게 되지.
그 숲 참느릅나무 그늘 아래 숨죽이고 앉아
손가락 걸어 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야.


              - 달의 뒷면을 보다, 민음사, 2015




이팝나무 꽃 [정한아]




잠든 크루소 씨의 눈꺼풀 밖으로 비어져 나온
이팝나무 꽃잎들을
시궁쥐가 먹어치우고 있다

나비야, 너에게 이름을 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와서 좀 보렴
그는 이팝나무 꽃잎들로 고치를 짓고 있구나
그 고치가 그의 안전가옥이구나
아름다움으로는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구나


                - 울프 노트, 문학과지성사, 2018




아침이 온다는 것 [이준관]




신선한 모유같은 우유를 배달하러
우유 배달 아줌마가 온다는 것
이팝나무 잎새 같은 학생들 태우러
초록버스가 온다는 것
꽃다지 같은 아기들 태우러
어린이집 노랑버스가 온다는 것

중풍으로 쓰러진 옆집 할머니가
보행보조기를 밀며
아기처럼 걸음마를 다시 배운다는 것
동네 빵집에서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모닝빵을 굽는다는 것
아침 밥상에 놓을 접시처럼
접시꽃이 일찍 핀다는 것

참새들이 대추나무에
풋대추처럼 조롱조롱 매달려
노래한다는 것

내가 창문을 열고
해와 하늘과 그리운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아,
그것은
아침이 온다는 것


                      - 천국의 계단,서정시학, 2014




환한 대낮 [나태주]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런다냐? 그것은
꾀꼬리 쌍으로 우는 환한 대낮이었다.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이팝나무 우체국 [박성우]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 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 밭길로 부추 밭길로 녹차 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 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는 법이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고
파닥 파다닥 이른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세상의 모든 밥[허문영]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밥 종류가 무척이나 많다

고봉밥 국밥 햅쌀밥 잿밥 된밥 이밥 약밥 쌀밥 고두밥 제삿밥 보리밥 콩밥 까마귀밥 맨밥 더운밥 진밥 잿밥 주먹밥 김밥 눌은밥 눈칫밥 까치밥 따로국밥 식은밥 개밥 기름밥 짬밥 오곡밥 장국밥 팥밥 좁쌀밥  소나기밥 불공밥 주먹밥 개밥 한솥밥 절밥 헛제삿밥.....

이것 말고도 수십 가지는 더 있을 듯한데
밥이 희망이 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소금물에 볍씨를 띄울 즈음
잘디 잔 흰 꽃을 쌀밥처럼 매단 조팝나무가
지천으로 산기슭에 꽃을 피우면
해거름에 허기진 하얀 밤이 어느새 오고
마을 어귀 이팝나무도 내가 질세라
흰 쌀밥 같은 꽃을 잎새 위에 가득 얹었다

막 지어낸 하얀 밥을 사발에 퍼담다가
손가락에 묻은 밥알을 입으로 떼어먹으시며
정성으로 쌓아주던 고봉밥은
밥상 위에 하얗게 핀 조팝나무, 이팝나무 꽃 무더기
어머니의 환한 미소로 피었다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살강 위에 삼베보자기 들추고 꺼내 먹던
보리밥 생각에 목이 메이고
여기저기서 먹었던 눈칫밥에 마음 서러워지고
부모님 제삿밥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무리 찬밥이라도
뜨거워지지 않고 되는 밥이 어디 있던가
세상의 모든 밥은
뜨거움 속에서 익은 것이다.




지독한 사랑 [송종규]




 그 방은 침묵 속에 쌓여 있고 그 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그 방은 너무 휑하고 그 방에는 너무 가벼운 내가 있을 뿐인데 그 방은, 꽉 차 있다
 그 방은 혼돈으로 꽉 차 있고 그 방은, 가혹하거나 간절한 말들이 터질 듯 팽창해 있다
 그 방에는 수많은 말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고,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으로 걸려 있고
 그 방의 혼돈 속에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 방에 있는 동안 나는
 안전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의 말들은 내가 다가가면 부스러지고
 내 손이 닿기 전에 아득하게 달아난다
 농밀하던 그 방의 평화와 혼돈은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나는 떠나버린 그들의 등 뒤에 텅 빈 채 서 있거나 그 방처럼 나도, 터질 듯 팽창하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침대 밑에, 서랍 속에, 벽 속에 숨어 있던 말들이 다시, 그 방을 가득 채우기까지
 아니, 내가 이팝나무처럼 터져 새하얀 말들이 내 안 가득 흩날리기까지
 커다란 허공이 시간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내 안의 문들은 차례로 빗장을 닫아건다

            
                 - 시집 [녹슨 방]




어부림 [손택수]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 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로 드리우고
그물을 끄집어 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궤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 철썩
파도 소리를 흉내 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 든다


                - 2004 창작과비평,봄호

  


** 우리 Apt에도 있는 이팝나무, 조팝나무와 헷갈렸었지, 배고푼 춘궁기가 있는 시절에는 이밥(쌀밥)나무 라고도 불리 웠다고,, 먹고 사는 것은  세대를 넘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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